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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의 재난 앞에서 무력한 소녀를 보며 슬픔에 빠지다

재난과 계급의 결합이 낳은 불편함

<백두산>은 슬픈 영화였다. 순옥이라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슬플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린 배우인 김시아가 순옥을 연기했다. 전에 그를 두번 보았음을 기억했다. 그는 부모의 존재가 아쉬운 역할을 내리 맡았다. <미쓰백>(2018)에서 친부로부터 폭력을 당하며, <우리집>(2019)에서는 부모의 존재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아예 버림받은 순옥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른 영화들이 떠올랐다. 부모에게 입은 상처 때문에 영화가 슬프다고 생각했다.

국가간에 존재하는 상하관계

재난영화에 있어 한국은 아찔한 공간이다. <대지진>(1974)이나 <샌 안드레아스>(2015)의 지진이 한국의 일이라면? <백두산>은 그런 그림을 그린다. 백두산의 폭발이 4차까지 이어질 경우, 한반도의 아래 일부분만 존재할 거라는 예측이 나온다. 땅이 꺼지고 빌딩이 무너지는 액션영화를 하도 경험하다 보니 어지간한 재난의 광경에는 마음이 동하지 않던 차에 <백두산>은 달랐다. 땅이 좁으니 이렇게 반응하나 싶었는데, 따지고 보면 넓은 땅을 지닌 미국이라 해서 다를 것도 없다.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서 재난의 범위는 점점 커졌다. 1990년대 이후엔 특정 지역을 넘어 지구 자체가 폭발해 없어진다고 상상하는 영화를 자주 접하게 됐다. 세기말의 불안이 더해져 더욱 그랬을 것이다. 사실 지구가 사라지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별로 괴로울 것도 없다. 상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선 죽을까봐 애타는 상황이 한창인데, 바다 건너 다른 땅 사람들은 멀쩡해야 억울한 법이다. 모두 죽는다면 억울할 일도 없다. 아벨 페라라의 <4:44 지구 최후의 날>(2011)이 진정한 재난영화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다. 미국 동부시간으로 새벽 4시 44분에 지구적 재난이 일어날 예정이다. 카메라는 불안과 공포의 풍경보다 평상시처럼 행동하며 종말을 맞는 인물에 더 많은 시간을 부여한다. 지구적 재난은 오히려 일상을 살게 한다, 고 페라라는 믿는다. 모두 그렇게 상상해버리면 영화의 재미가 줄겠지만, 할리우드는 매번 흥미로운 구석을 찾는다. 예를 들어, 종말과 홀로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로는 여러 번 리메이크된 <나는 전설이다>(2007)가 유명하지만, 주제 면에서 더 간간한 건 래널드 맥두걸의 <세계, 육체 그리고 악마>(1959)다. 영화는 살아남은 세 인간을 흑인과 두 명의 백인으로 구성해 인종문제를 건드린다. 핵폭발의 공포도 차별의식을 이겨내지 못한다. 재난과 계급을 결합한 예는 <2012>(2009)나 <설국열차>(2013) 등에서 계속 발견된다. 신을 믿고 따르는 인간이면 탈 수 있는 노아의 방주는 이제 없다. 종말을 견딜 안전한 방주에 타려면 재력과 권력이 있어야 하고, 보통 사람은 용케 방주에 올라타더라도 전보다 더한 계급사회와 마주해야 한다. 이제부터 노예로 산다면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설국열차>의 하층민들은 영양 공급원이 뭔지 모르는 채 매일 바퀴벌레를 먹는다.

<백두산>의 땅 너비를 생각하다 멀리 왔다. <백두산>의 골칫거리 중 하나도 계급과 상관이 있다. 근대사회의 구성원은 계급이 없는 듯이 굴지만 엄연한 계급을 느끼며 산다. 국가간에도 계급, 즉 상하관계가 존재한다. <백두산>에서 미국과 중국은 한국의 상위 국가다. 미국의 군 책임자가 한국의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걸 넘어 진행 중인 비밀작전을 포기하도록 명한다. 재난을 최소화하는 최선의 방책은 백두산 아래 광산에서 핵폭탄을 터뜨리는 것인데, 미국은 그것의 성공 여부나 안전성에는 관심이 없다. 핵의 사용으로 인해 인접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데에만 신경을 쓸 뿐, 한반도와 그곳에 사는 인간의 생명은 다음의 이야기다. 한반도의 국민과 미국의 간섭, 그 사이에서 행동을 취해야 하는 대통령은 당연한 길을 택한다. <백두산>이 왜 우방인 미국을 적대시하며, 근래 만들어진 한국영화는 왜 북한을 착한 쪽으로 그리냐는 비판을 읽었다. 말을 따지기에 앞서, 왜 그 말을 하게 되었는지 살피는 게 필요하다. <백두산>은 애초에 미국을 나쁜 친구로, 북한을 가족으로 설정한 영화가 아니다. 전반부에서 국가간의 관계는 분명히 다르다. 북한과의 공동 작전이 아니기에, 북한은 작전에 우호적이지 않다. 이데올로기보다 좁은 땅에 사는 생명에 접근하는 자세가 극중 행동의 기반이다. 이러한 재난이 벌어졌을 경우, 북한과 미국이 어떻게 반응할지 논리적으로 따져본 끝에 도출된 게 현재의 시나리오다. 따지자면 시나리오 도출과정에 의문을 제기할 일이지, 결말에서의 양국과 한국의 관계를 비판할 일은 아니다.

수많은 ‘순옥이’들의 아우성

대통령이 나서는 국가적 재난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백두산>의 슬픔은 아주 개인적인 이유에서 출발한다. 국가간의 계급은 인물들 사이에도 작용한다. 순옥의 반대편에는 봉래(마동석)가 있다. 미국 시민권자인 그에게 백두산의 폭발은 피할 수 있는 재난이다. 결국 한반도를 떠나지는 않지만, 첫 폭발이 발생했을 때 그는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서두른다. 마음의 짐만 떨쳐내면 육체적 안전은 미국이 보장해주는 게, 그가 지닌 매력적인 권리다. 그동안 이해준의 영화를 보면서 그들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할까, 생각했다. <천하장사 마돈나>(2006)의 동구에겐 인천의 변두리가, <나의 독재자>(2014)의 성근에겐 분단된 땅이 그들을 얽맨다. <김씨 표류기>(2009)에서 한강의 밤섬에 떨어진 남자 김씨와 방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여자 김씨는 말할 것도 없다. 내처 <백두산>을 보면서도 좁은 땅의 문제라고 여겼다. 그러나 문제는 땅의 사이즈가 아니라 선택의 부재였다. 공간에서 벗어나기 전에 벗어날 수 있도록 선택할 권리의 부재, 그것이 동구와 성근과 김씨의 현실이다. 그들과 봉래의 차이는 거기에 있다. 선택의 부재로 치면 제일 심한 게 순옥이다. 투옥된 아버지와 마약에 취해 현실을 잊으려는 엄마, 그리고 속수무책인 조모가 있으나, 함경도의 모퉁이에 사는 소녀에게는 임박한 재난 앞에서 어떤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는다. <백두산>은 그들을 한 그릇에 넣고 비빈다. 종래엔 순옥은 물론 봉래도, 그리고 대통령도 이 땅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티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백두산>은 수많은 순옥이 바득바득 애쓰는 영화다. 비행기로 도피하는 건 꿈도 꾸지 못하고, 배로 떠나는 것도 불가능한 인간들이 아우성치는 영화가 <백두산>이다. 거기에 한국의 집단의식이 비쳐 불편하게 여기는 쪽도 있겠고, 나처럼 그래도 너와 나라고 위안 삼는 인간도 있으리라고 본다. 언젠가 오슨 웰스는 “지성인이라면 이 세상에 어떤 종류의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실의 계급과 선택에 대해 정의로운 고민을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대신 <백두산>은 내 곁에 있는 나랑 비슷한 누군가를 통해 동질감을 호소하기로 작정한 대중영화다. 그것마저 싫다면 어쩔 수 없다, 영화에서 걸어 나가야지. 결말에서 로버트, 즉 봉래는 복구가 절실한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한동안 이 땅에서 뭔가 찾을 게 있을 거 같다고 답한다. 그것도 선택할 수 있는 자의 권리다. 나는 다시 순옥을 본다. 소녀는 좁은 아파트에서 새로운 가족과 살게 되었다. 미래에 재난이 닥쳐도, 평범한 성인으로 자란다면 순옥은 이 땅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야 한다, 나도 그러하다. 재난 앞에서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는 소녀를 보며 슬픔에 빠진 사연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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