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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시간들> 투쟁과 파괴가 아닌, 어떤 헤어짐에 관한 소묘

당신 없는 당신의 집

라야 감독의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은 재개발을 앞둔 둔촌주공아파트의 모습을 담은 영화다. ‘재개발’을 소재로 삼은 다큐멘터리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재개발 다큐멘터리’로 분류되며 그러한 맥락 속에서 이야기된다. 문제는 ‘재개발 다큐멘터리’라는 분류가 아니라 그 분류가 영화에 관한 모종의 규정으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재개발 다큐멘터리’라는 범주로 포괄되는 이상, 장소만 달라졌을 뿐 모든 영화가 다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환각이 작동한다. 이 영화가 재개발 다큐멘터리에 관한 보통의 인식과 얼마나 먼가를 짚으며 이야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관객은 <집의 시간들>을 보는 동안 재개발을 인식할 수밖에 없지만, 엄밀히 말해 영화 속에서 재개발은 재현되지 않는다. 굴착기 소리도, 건물 잔해의 흉측함과 가련함도, 사람들의 저항 혹은 들뜸과 회한도 여기에는 없다. 재개발은 하나의 전제이자 결과일 뿐이다. 이것은 내레이션과 자막을 통해 발화되거나 기록된다. 달리 말해 영화 속에서 재개발은 사람의 언어로만 포착된다.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영화 속에서 언어의 영역과 이미지의 영역이 명확히 분리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영화는 인간의 언어를 장소에 투사하면서 말과 이미지를 접붙이는 작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주민을 인터뷰한 다음 따로 집을 촬영하고, 그 위에 인터뷰 음성을 덧씌운다. 이런 방식을 사용한 이유에 관해 감독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공간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를 바랐다고 여러 번 언급했다. 그런데 정말 주민의 음성이 집의 목소리처럼 들리는가.

나는 감독의 의도가 발휘되었는가에 관해 긍정하기 힘들다. 어떤 내레이션도 그 장소의 시간과 맞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대부분 전지적 시점에서 전개되며, 늘 화면이 보여주는 시간보다 나중에 존재한다. <집의 시간들>에서 음성은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며 이미지보다 앞선 시간에 존재하지만 이미지와 음성이 분리된 시간 속에 각각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주민의 이야기에 따라 촬영이 이뤄졌고, 인터뷰의 내용이 이미지와 조응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미지의 목소리라는 환각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공간의 모습과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에 분리된 시간성은 또렷이 인지되며, 이것은 재개발 이후 닥쳐올 시간을 미리 예감케 한다.

열린 문과 움직이는 공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감독이 의도한 효과가 영화에서 발휘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것이 이미지 위에 씌워진 내레이션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는 거다. 감독이 언급한 ‘공간의 목소리’를 ‘공간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풀이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공간을 연출하는 카메라와 음향에서 비롯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장면은 내레이션의 맥락 속에서 읽히지만, 그것을 초과하는 어떤 잉여가 있다. 정적인 구도 속에서 포착되는 움직임과 연출적 개입이다. 집의 내부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카메라에 포착된 문들이다. 집을 보여주는 장면은 대개 거실 내부와 발코니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담긴 풀숏으로 시작된다. 몇번의 예외를 제외하면 창문과 방문은 반쯤 열려 있고, 때로는 현관문도 활짝 열린 상태다. 창문이나 현관문의 열린 틈으로 외부의 소리들, 특히 자연이 내는 소리가 유입된다. 자연과 맞닿은 둔춘주공아파트의 정체성은 열린 문을 통해 강조된다. 그렇다면 방문은 왜 열려야 했을까. 기본적으로 공간 촬영의 편의를 위해서라고 짐작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촬영을 위해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문이 이미 열려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공간에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이러한 행위를 기다리거나 환영한다는 의미를 만들어준다. 집을 찍는다는 것이 집에 가하는 어떤 인위적인 작용이 아니라 보여준 그대로를 담는다는 환상에 가까운 행위를 실행하기 위해 문들은 열린 채로 있어야 한다.

문은 때로 스스로 움직인다. 문의 일부만 카메라에 담고 그것을 작동시킨 원인을 프레임 밖으로 밀어내면서 영화는 스스로 움직이는 문을 보여준다. 바람에 흔들리는 장신구나 스스로 빛을 내는 장식품을 통해 영화는 집의 부분들에 생동감을 심어준다. 여기에 기여하는 것 중 하나가 나무다. 영화 초반 집 안에서 흔들리는 장신구를 보여준 화면이 현관 밖 흔들리는 나무로 연결되는 시퀀스는 흔들리는 사물과 건물 밖 나무의 흔들림을 동기화하면서 바깥과 내부의 은밀한 교통을 담아낸다. 작가가 의도한 공간의 목소리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아니라 그 뒤에 배경음처럼 깔린 현장음에서 온다. 새소리,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등이 집으로 유입되면서 내부 공간이 생동하는 바탕을 마련한다. 공간은 카메라를 환영하면서 자신을 내보일 뿐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영화는 이미지에 따라 외부의 소리를 적절히 통제한다. 둔촌주공아파트에 머물던 카메라는 단 한번, 시선을 외부로 돌린다. 한 화자의 언급에 따라 영화는 한 고층 아파트를 보여준다. 이때, 이전까지 들려오던 자연의 소리를 소거한 채 외부의 소리가 차단된 고요함 속에서 아파트의 전경과 단지 내부를 조망한다. 소리를 소거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장면은 스틸컷처럼 보인다. 이는 소리가 정적인 장면을 생동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역으로 증명한다. ‘나무가 죽어버려 이식을 반복해야 하며, 자연이 아파트를 받아주지 않은 것 같다’고 묘사되는 초고층 아파트 단지는 둔촌주공아파트와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이 공간을 벗어나 둔촌주공아파트로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자연의 소리도 복귀한다. 사운드는 곧 생의 증거인 것이다.

사람의 감정, 공간의 감정

공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가 기억하는 대상으로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욕망은, 앞서 언급한 이미지의 자율적 생동을 담아내려는 욕망과 충돌한다. 충돌을 무릅쓰고 감독이 공간에 자율성을 주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짐작하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그것이 주는 감흥만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주민들의 목소리는 기억 속에서 집을 사유하는 데 반해 이미지는 여전한 현존을 강조하는 데서 오는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끼며, 나는 방의 주인이 사라진 뒤에 남겨질 집과 이를 둘러싼 자연물이 감내해야 할 시간을 염려하게 되었다. 공간과의 이별을 앞둔 마을 주민들의 개별적인 감정은 표현의 미세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으로 요약된다. 아쉬움 속에는 어쩔 수 없음이라는 인정이 수반된다. 반면 공간의 감정을 상상해본다면 그것은 결코 아쉬움일 수 없다. 마을 주민들은 그런 장소를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사 후 만날 다른 장소에 관한 기대를 품는다. 그러나 현재 그 공간에 자리한 나무와 집들에 재개발은 없다. 개발은 그들에게 재생될 수 없는 소멸과 죽음을 의미한다. <집의 시간들>을 생각하면서 자주 떠올린 영화는 재개발과 재건축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몇편의 애니메이션이다. 사람과 분리된 공간이 주는 심상 때문이다. <토이 스토리>(1995)가 인간의 시선 바깥에서 펼쳐지는 인형과 장난감의 삶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했던 이야기는 무엇인가. <인사이드 아웃>(2015)이 인간 내부의 감정을 인격화하면서 보여줬던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공간에, 우리의 신체 내부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다른 생이 있다는 것을 이들은 믿게 했다. 이런 인간화 전략이 필요한 것은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다. 우리는 극영화뿐만 아니라 실제 일어나는 사건들을 쉽사리 실감하지 못한다. 많은 다큐멘터리가 ‘여기 사람이 산다’라는 메시지를 지속해서 강조해야 했던 이유도 우리가 종종 당연한 사실을 잊기 때문이다. 용산 철거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2012)에서 불타는 망루 안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 안의 미세한 움직임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지 않으면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풍동 철거 투쟁을 다룬 <골리앗의 구조>(2006)에서 슬레이트로 건물 외벽을 두른 건물 안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내부에 동석한 카메라가 없었다면 실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떼쓰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해 달라”라는 철거민의 말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얼마나 쉽게 망각되는지 일러준다.

어떤 다큐멘터리는 그만큼이나 절박한 이유로 사람을 생략한다. 그 앞줄에 정재훈의 <호수길>(2009)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응암2동의 어느 골목 어귀에서 벌어진 철거를 담은 이 영화에는 카메라를 든 나도, 카메라 앞의 너도 없다. 오직 비인칭적인 카메라와 그 앞의 사람이든, 동물이든, 건물이든, 산이든 모두 평등하게 포착된, 파편화된 마을의 풍경만이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한 건물의 철거가 그 건물을 둘러싼 모든 것의 일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나는 <집의 시간들>이 <호수길>이 보여준 상황과 방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재개발은 이제 더는 거기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이 살던 공간과 집의 일이며, 그것은 명확히 분리된다. <집의 시간들>에서 사람들은 미래를 상상하며 공간을 기억할 수 있지만, 철거될 건물과 나무에게 과거를 회상할 미래의 공간은 주어져 있지 않다. 공간이 내는 목소리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당연히 그 공간이 처한 다가올 상황에 관해서도 말해야 한다. 공간과 자연을 순진무구한 대상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재개발과 재건축은 이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다. 공간을 대신해 싸워줄 사람은 사라졌다. 이것이 <집의 시간들> 속 흔적으로 드러난 사람들을 통해 표현된다. 재건축이 행운으로 인식되는 시대에, 공간을 기억하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안심해야 할까. 선택될 세간살이들과 버려질 세간살이들, 뿌리째 뽑혀 사라지거나 조형 요소로 다듬어질 나무들의 미래 대신 현재를 보여주는 영화는 포클레인 소음에 밀려 사라질 나무와 공간과 물질의 울음과 저항을 보는 대신 눈을 감아버린다. 영화가 끔찍한 미래를 담아야 했다는 말이 아니다. 지나치게 평온한 재개발의 예고 속에 숨은 것들이 있음을 여기에서라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개발 다큐멘터리의 범주 속에서 <집의 시간들>이 보여주는 것은 이제 거주 공간에 관해서만큼은 재개발이 무척이나 평화로운 외형을 띠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옮겨 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원래 있던 곳에서 평화롭게 밀려난다. 왜 우리는 저항할 수 없게 되었는가. 저층 아파트가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지어지면 그만큼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많아질 텐데, 왜 사람들은 여전히 집을 찾지 못하고, 집값은 치솟는 것일까. 예전에 살던 곳에서 더는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다시 어떤 투쟁을 생각한다. <상계동 올림픽>(1988)에서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았던 판자촌 사람들과 같은 억울함이 더는 없는가. 우리는 전보다 나아졌는가. 처절한 몸싸움을 벌일 새도 없이, 우리는 스스로 우아하게 밀려난다. 싸울 대상이 없기에 더는 싸울 수도 없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 속에는 자연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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