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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웨스턴은 무정부적이다. 첫 번째 웨스턴의 주인공은 강도였다. 수정주의 웨스턴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아니, 수정주의쪽으로 오면서 더 무정부적으로 변했다. 그렇다고 해서 웨스턴이 정치적 아나키즘에 딱 들어맞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나키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권력과의 관계’에서 그러하다는 말이다. 웨스턴의 주인공은 권력에서 벗어나 자유를 좇는 자들이다. 그들이 말을 타고 어디로 달려가는지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간혹 그것이 <헤이트풀8>(2015)처럼 지옥으로 판명날 때도 있지만, 웨스턴은 무법자가 찾아가는 공동체의 이상향에 관한 영화다. 기억하라, 웨스턴은 19세기에 관한 이야기다. 이상하게도 관객은 무법자들의 세계를 동경한다. 당신은 언젠가 <내일을 향해 쏴라>(1969)의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를 사랑한 적이 있다. 혹은 <와일드 번치>(1969)의 불한당들은 어떤가. 그런데 또 이상한
[이용철의 영화비평] 이상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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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반대로 인간은 신의 형상을 만들어왔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2015)는 신을 인간에 가까운 존재로 그리는 정도가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 끌어내린다. 그런데 그 수단이 첨단의 장비(컴퓨터)를 신에게 선사하면서 이뤄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에서는 장비는 업그레이드됐지만 위엄은 다운그레이드되는 난감한 상황이 펼쳐진다. 베냐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물을 가장 가까이 끌어오려는 대중의 욕망이, 거리감을 전제하는 아우라와 대치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는데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그에 대한 하나의 증거물이다. 수많은 재현물에서 인간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신비화된 신의 창조과정을, 자코 반 도마엘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간단하게 누설해버린다.
감각의 언어를 긍정하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의 신에 대한 재현방식 자체는 따지고 보면 그리 도발적인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
[김소희의 영화비평] 디지털 유토피아의 가능성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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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 영화 <캐리>(1976), <쇼생크 탈출>(1994) 등의 원작 소설가 스티븐 킹은 부사를 많이 쓰는 작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곤 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그는 [“내려놔요!” 하고 그녀가 소리쳤다. “돌려줘.” 그는 애원했다]와 [“내려놔요!” 하고 그녀가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돌려줘.” 그는 비굴하게 애원했다]를 비교하며 각각의 문장이 전보다 약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약해진 것은 우리가 문장을 읽고 상상할 수 있는 인물의 감정, 톤과 뉘앙스 같은 것들일 터다. 후자에서 문장이 허용하는 상상의 두께는 얄팍해졌고 표현은 납작해졌다. 독자의 상상을 제한하는 화려한 사족에 그칠 때 수사는 표현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악화시키는 셈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지의 수사학에도 해당하는 지적이 아닐까.
이미지를 향한 소렌티노의 열망
파올로 소렌티노의 영화는 과잉된 스타일 때문에 비판
[박소미의 영화비평] 아름다움의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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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프리퀄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리지널 3부작만큼 재미있지는 않지만 자기만의 이야기도 있고 자기만의 아름다움도 있는 작품들이다. 다들 죽이고 싶어 하는 자자 빙크스도 굳이 싫어할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이 캐릭터에 반영된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매력 없고 짜증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집중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시된다면 우리 중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헤이든 크리스텐슨? 로렌스 올리비에의 재림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구박은 좀 심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프리퀄을 옹호하려고 해도 이 세 영화가 그렇게 매력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번에 새로 나온 J. J. 에이브럼즈의 속편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이하 <깨어난 포스>)가 이들 세편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재미있고 더 <스타워즈>스러운 영화라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크리에이터인 조지
[듀나의 영화비평] 보수적이고 완벽한 자기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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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호랑이 사냥의 의미
<대호>(2015)는 1925년 일제의 호랑이 수렵을 소재로 한다. 실제로 일제의 수렵에 의해 한반도의 맹수들이 멸종되었다. 이는 물론 제국의 식민지배의 일환이자 자연에 대한 지배를 과시하려는 근대인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1907년 조선 군대를 해산한 일본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제정하여 조선인의 총기소지를 금했다. 그러나 1913년 총독부는 호랑이처럼 해로운 짐승을 제거하는 데 협력하는 조선인에게 총포류를 빌려주라는 지침을 내린다. 엔도 기미오의 책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에는 “호랑이를 산신으로 숭배해온 조선에 많은 일본인이 신식의 연발총과 군총을 들고 밀어닥쳐 1897년부터 1926년에 걸쳐 호랑이를 멸종시켜버렸다”는 기술이 나온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인간을 해치는 호랑이를 잡아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일본인들에게는 조선의 전 지역에 이동과 정착이 가능하도록 안전을 확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표면
[황진미의 영화비평] 인간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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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살을 당할 수도 있어.”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에서 절정을 찍는 오싹함은 이 무미건조한 대사 한줄에 실려 있다. 영화 말미, 암살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는 케이트(에밀리 블런트)를 찾아와 자신들의 작전이 적법하게 이루어졌다고 위증하도록 강요한다. 케이트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자 알레한드로는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진정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건넨다. 이 대사는 이상하다. 자살이라는 능동적 행위에 ‘당한다’는 피동사는 붙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반면 이 상황은 적절하다. 우리는 알레한드로의 표현이 케이트를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하겠단 협박임을 안다. 인상적인 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이 순간을 굳이 ‘자살’로 꾸미겠다는 알레한드로의 표현이다. 이를 단지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라 말하는 건 케이트가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린다고
[송경원의 영화비평] 영화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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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는 드니 빌뇌브에게 세계적 명성을 선물했던 <그을린 사랑>(2011)을 넘어서는 작품이다. <그을린 사랑>은 플롯을 직조하는 그의 능력을 입증했지만 그러한 플롯 방식이 인물의 트라우마가 벌거벗는 순간의 쾌감을 기대하는 관객의 외설적 욕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으로 아슬아슬한 작품이기도 했다. <시카리오>는 관객에게 전달되는 서사적 정보를 조절하는 탁월한 능력을 확인시켜주면서도, 거기에 정확하게 구성된 숏의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까지 더해진 작품이다. <히트>(감독 마이클 만, 1995)와 자웅을 겨룰 만한 백주의 도심 총격전과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일행이 후아레즈로 진입하는 일련의 장면이 대표적이다. 특히 총격 장면에서 총을 겨누는 자와 피살자의 매치컷이 이토록 정확하게 붙어서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영화는 드물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카메라 없
[안시환의 영화비평] 진실의 가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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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지>는 ‘예술가의 탄생’이라는 서사를 통해 전체주의 사회에서 자란 탈북자의 ‘개인 되기’를 그린다. 김수는 <씨네21> 1031호에 실린 리뷰와 20자평을 통해 “탈북자의 고난을 피상적으로 그렸고, 반전도 쉽게 예측되며, 그림들도 현역 작가들의 작품을 짜깁기한 티가 많이 난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부당하다. <설지>가 걸작은 아닐지라도, 그리 형편없는 작품은 아니며, 특히 탈북자의 고통을 피상적으로 그렸다거나 영화 속 그림들이 짜깁기에 불과하다는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다.
탈북자는 어떤 존재인가?
현재 한국의 탈북자 수는 약 2만8천명을 헤아리며, 한해에 2천~3천명씩 늘고 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탈북자들이 중국, 몽골, 러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유럽, 북남미 등에 존재한다. 일단 북한을 이탈한 이들이 중국 등 제3국에 머물다가 일부가 한국에 입국하기도 하고, 북한으로 재입국하는 경우도 있으며, 한국을 경유해 유
[황진미의 영화비평] 탈북자의 ‘개인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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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감독에게 ‘계륵’이다. 그 어떤 원작보다 강렬하게 권위의 무게로 짓누르지만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강렬한 드라마의 유혹은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특히 <맥베스>는 감독들이 가장 탐내는 원작 중 하나이고, 맥베스의 욕망과 불안은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스크린 위를 비틀거리며 거닐었다. 저스틴 커젤의 <맥베스>는 동일한 원작을 둔 다른 영화들과 서두부터 그 차이가 확연하다. 로만 폴란스키, 오슨 웰스의 <맥베스>가 모두 원작처럼 세 마녀들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의 성>이 신비로운 ‘성’(城)에서 시작하여 일단 신비감과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세팅에서 출발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이 설정은 맥베스가 자신의 부인과 공모하여 덩컨 왕을 암살하고, 그렇게 획득한 왕권의 안위에 대해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게 되는 모든 욕망의 근간이 된다.
채워지지 않는 결핍-죽은 아이
[김지미의 영화비평] 권력의 화염, 영원회귀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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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신문과 종편 채널을 보유한 모 미디어그룹의 한 고위 ‘내부자’는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 시장이 두개잖아요. 진보 보수, 양쪽 다 잡자는 거죠.” JTBC의 정치적 성향이 <중앙일보>와 차이를 보이는 데 대한 언급이었다. 손석희 사장이 진행하는 뉴스나 드라마 <송곳>이 방영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JTBC는 이념보다 시장논리를 우선시하는, 한국에선 이례적인 종편 채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요즘 같은 세상에 시장논리가 아닌 다른 걸 중시하는 상업방송이 많다는 게 희한한 노릇이지만). 먼저 전제할 것은, 이 글은 JTBC 뉴스나 <송곳>, 영화 <베테랑>이나 <내부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들 작품이 공감받고 흥행하는 환경, 정의란 눈 씻고 찾아봐야 없다는 인식이 하나의 시장을 형성했다는 점만큼은 엄연하다. 좀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선, 사회 불만 고조→고발성 작품 투
[송형국의 영화비평] 두개의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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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는 하나의 국가이다. 그리고 기예르모 델 토로와 같은 쾌락주의인 영화광의 정신은 대부분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작은 장르의 국가들이 벌집처럼 촘촘히 모여 있는 지도의 모양을 취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들의 이야기의 여정은 드물게 한 국가에 머물기도 하지만 대부분 하나 이상의 국경을 가로지른다. 종종 그 여정은 엉뚱한 결합으로 끝나곤 한다. <벌집의 정령>(1973)에서 따온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어린 소녀의 이미지가 엉뚱하게도 일본의 거대 괴수, 거대 로봇과 만나는 <퍼시픽 림>(2013) 같은 영화가 그렇다. 이 여정을 하나로 잇는 장르의 지도를 그린다면 정말 이상한 그림이 나올 것이다.
<푸른 수염> <어셔가의 몰락> <드라큘라> 그리고 아서 코난 도일
멕시코 감독이 할리우드를 통해 일본 대중문화에 바치는 예찬이라는 희귀한 괴물이었던 <퍼시픽 림>과는 달리 <크림슨 피크>는 비교적 정통적으로 보인다.
[듀나의 영화비평] 장르의 지도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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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있긴 있는 겁니까?” “궁금은 하네요.” 영화 초반, 강동원이 던지는 이 말은 바로 관객이 <검은 사제들>이라는 영화를 보기 전 떠올리는 질문이다. 한국 공포영화사에서 ‘구마’(驅魔, exorcism)는 이례적인 낯선 소재다. ‘장미십자회’, ‘12형상 악마’ 같은 단어는 서구영화에서 종종 들어봐 생소하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신부가 악령 들린 소녀에게 구마의식을 치른다는 설정은 언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가톨릭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종교가 된 지는 오래지만 그와는 별도로 기독교적인 악마를 인정하는 정서가 일반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기에 <검은 사제들>이 넘어야 할 첫 번째 장애물은 지금 21세기 한국에서 엑소시즘이 행해지는 배경에 대해 관객을 설득시키는 것이다. <검은 사제들>은 매우 영리하게 첫 번째 장애물을 넘어간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토록 서구적인 포장지 안에 한국 공포영화의 엑기스를 담아 새로운 공포 장르의 맛을 만들어냈다. &l
[이현경의 영화비평] “궁금은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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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서사와 공간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개인은 출신, 계층, 성향 등과 연관되어 도시의 공간을 살아내고, 도시는 이런 개개인의 욕망이 집단적으로 투사된 장소로 나타난다. 자크 오디아르의 새 영화 <디판>(2015)을 보고 영화 속 공간을 설명하는 것이 영화의 서사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는 차례로 텐트로 이루어진 스리랑카 난민캠프, 파리의 방 한칸짜리 난민센터, 파리 변두리의 슬럼화된 집합주거단지의 아파트, 런던의 교외지역 단독주택이 나온다. 영화의 공간은 뒤로 갈수록 사적인 성격이 강화된다.
오디아르는 자신의 새 영화를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말했다고 한다. 많은 영화들은 사랑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오디아르의 설명은 영화를 공간을 통해서 설명하려는 목적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것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데, 스리랑카 타밀 독립전쟁 중에 자신의 가족을 잃은 남자, 여자, 소녀가
[윤웅원의 영화비평]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가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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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신기하게 생각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비평과 흥행의 온도차’이다. 미지근하게 섞이는 대신 각자의 ‘온도’를 유지하겠다는 양쪽의 패기도 호기롭지만, 이렇게 타협 없이 차이를 낳고 마는 영화들의 목록이 꽤 흥미롭기 때문이다. 샘 멘데스의 두 번째, 대니얼 크레이그의 네 번째 007, <007 스펙터>(이하 <스펙터>)는 최근 이 목록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고, 그래서인지 나는 이 영화가 조금 더 궁금해졌다.
비평의 ‘차가움’
흥행의 ‘뜨거움’은 분명 007 시리즈에 대한 관객의 낮은 진입 장벽과 높은 기대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지난 23편을 거쳐오면서 007 시리즈는 관객을 꾸준히 훈련시켜왔다. 우리는 제임스 본드가 멋지게 슈트를 입고, 신기에 가까운 최첨단 무기를 장착한 다음, 세계 곳곳을 누비며 ‘악당’을 제거하는 MI6의 미션을 수행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총소리와 함께 시작될 타이틀 시퀀스도, 매혹적인
[우혜경의 영화비평] ‘동시대성’이라는 만만찮은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