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지지하는 쪽이든, 비판하는 쪽이든 김태곤 감독의 <굿바이 싱글>에 대해 공통으로 지적하는 아쉬움은 영화가 지닌 작위성과 상투성에 관한 것이다. 특히 영화의 뼈대가 되는 설정인 고주연(김혜수)과 김단지(김현수)의 관계 형성과 변화 과정이 억지스럽다는 평이 종종 눈에 띈다. 나 역시 주연과 단지의 만남이 작위적이고 이후 관계의 변화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지닌 작위성과 상투성을, 단지 이야기의 전개를 위한 게으른 선택으로 치부하는 것에 반대한다. 내게 <굿바이 싱글>의 작위성과 상투성은 영화의 메시지와 긴밀히 소통하는 의도적 장치라고 여겨진다. 이것이 곧 작위성과 상투성에 대한 긍정을 담보한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일단 작위성과 상투성이 영화의 메시지와 만나는 방식을 따져보려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두 인물의 관계를 중심으로 영화의 주요 설정들을 다시 통과해야만 한다.
복제로서의 이미지가 삶을 끌어가는 모습
주연과 단지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자. 산부인과 엘리베이터에 나란히 오른 두 사람의 모양새는 데칼코마니처럼 포개진다. 모자를 덮어쓴 후드티 차림에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뒤덮은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 양쪽 구석으로 몸을 돌린 채 서 있다. 비슷한 외양과 달리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극과 극이다. 임신을 결심한 주연은 폐경 진단을 받았고, 원치 않은 임신을 한 10대 소녀 단지는 낙태를 결심한 참이다. 두 사람의 가운데 전면에는 한 임신부가 가족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녀의 당당한 위치는 임신에 있어 정상성의 기준을 꼿꼿이 세운다. 그에 비해 너무 늦은, 혹은 너무 이른 주연과 단지는 임신에 있어 소외된 이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채 주변부로 밀려나 있다. 이들을 한 엘리베이터에 몰아넣고, 주연이 단지를 대변하는 상황을 그린 것은 판타지에 가까운 클리셰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들의 만남으로 인해 실현될 두 가지 소망이다. 그것은 ‘누가 아기를 대신 낳아주면 안 될까?’(주연)와 ‘누가 아기를 대신 키워주면 안 될까?’(단지)이다. 그리고 이 두개의 소망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하나의 의문은 ‘왜 아기는 필요한 때 필요한 사람에게 생기지 않을까’이다. 영화는 단순하고도 흔한 소망을 마치 만화에서 한칸 옆에 다음 칸을 배치하는 것만큼이나 간단하게, 주연 옆에 단지를 나란히 세우면서 충족시킨다.
주연을 연기자로 설정한 것은 위에서 밝힌 ‘대신한다’는 영화의 주된 모티브와 긴밀히 연결된다. 배우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연은 ‘배역을 창조하는 방식’의 일환으로 스크린 밖에서 임신부 단지의 삶을 대신 살기로 한다. 이와 관련해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주연과 단지의 갈등이 촉발되는 순간이다. 두 사람의 갈등이 임신 스캔들의 피해자 지훈(곽시양)과 단지의 막돼먹은 언니 선영(이수경)의 등장에서 비롯된 것이라 오해하기 쉽지만, 최초로 갈등의 불씨를 지핀 이는 그들 자신이다. 앵커 민호(이성민)와의 데이트를 자랑하던 주연은 ‘그렇게 좋냐?’는 단지의 물음에 “좋지. 아기에게 목소리도 들려주고”라고 말한다(주연은 단지에게 민호의 뉴스 영상을 보여주며 태교를 시켜왔다). 이에 단지는 주연에게 “임신은 내가 했거든요”라고 쏘아붙인다. 주연의 말실수는 주연이 배우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의미심장하다. 연기자가 배역에 몰입해 현실과 연기를 혼동하듯, 외출할 때마다 무겁게 매고 다니는 볼록한 복대를 주연은 진짜 아기로 착각한 것이다. 주연이 착각한 이유는 ‘40대에 미혼모가 되기로 결심한 당당한 여성’ 이미지에서 파생된 수많은 다른 이미지들, 이를테면 밀려드는 광고와 드라마 ‘신사임당’ 이미지 등이 실제 아기의 자리를 대체할 정도로 포화되었기 때문이다. 주연이 체현해내는 것은 실제의 자리를 대체한 복제로서의 이미지가 삶을 끌어가는 모습이다.
그와 동시에 단지는 자신을 ‘복덩이’라 했다는 주연의 진심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자신의 뱃속 아이를 향한 것인지 고민한다. 그래서 민호와의 데이트를 위해 텐트를 정리하던 주연이 ‘왜 네 방 놔두고 여기에 물건을 쌓아놨냐?’고 묻자 “그게 어디 제 방이에요? 아기 방이지”라고 쏘아붙인다. 그 순간 단지는 아기가 실재이며, 자신은 이미지일 뿐임을 자각한다. 주연과 단지의 관계가 지속 가능했던 이유는 두 사람이 각각 이미지와 실재의 자리를 담당하면서 균형을 이뤄왔기 때문이다. 주연의 이미지가 실재의 자리를 위협할 정도로 커지고, 단지가 자신을 실재가 아닌 이미지의 자리에 놓으면서 둘의 관계는 분열된다.
이미지 이면의 또 다른 이미지
두 여성이 분리된 이후 상황이 보여주는 것은 애초에 둘이 점한 위치가 각각 이미지와 실재가 아닌, 이미지와 또 다른 이미지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단지의 존재는 주연의 실제 모습을 가리키는 것도, 이미지 이면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단지는 주연에 종속된 실재 혹은 이미지가 아닌, 따로 떨어진 이미지로 존재한다. 이미지가 삶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은 스타인 주연에게만이 아니라 단지에게도 역시 그렇다. 자신이 10대 미혼부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숨길 수 있는 현빈(찬희)과 달리 교복으로 상징되는 ‘10대’의 정체성과 부른 배로 인한 ‘임신’의 조합에서 도출 되는 ‘불온한 10대’라는 이미지에서 단지는 숨을 수 없다. 주연과 단지의 갈등이 해소되는 미술대회 장면에서 둘은 비로소 각자의 이미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이때 주연은 단지의 보호자이자 어쩌면 가장 극성맞은 학부모의 역할을 수행한다. 단지의 입장을 불허하는 주최쪽과 다른 학부모들과 대립하면서 주연이 요구한 것은 단지를 미술대회장에 들여보내 달라는 것이다. 이를 곧 ‘10대 미혼모를 이해해주세요’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미술대회에 진입하고자 하는 이들의 욕망은 들뢰즈, 가타리가 말한 의미에서 카프카적이다(<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카프카에게 있어 ‘문제는 자유가 아니라 출구’였듯이 주연과 단지에게도 문제는 10대 미혼모에 대한 구제가 아닌 출구로서의 미술 대회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대회는 가장 하찮은 틈이자 가장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틈이다. 그와 동시에 오직 그들을 위해 마련된 문이기도 하다. 입학 허가도, 입상도 아닌 그저 사람들을 비집고 문을 통과하는 행위 자체가 이 순간 이들에게는 가장 절박한 것이다.
10대 임신부와 40대 폐경기 여성의 이미지를 나란히 세우면서 영화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지 이면에는 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이면에는 또 다른 이미지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이 지점이 이들의 느슨한 결합이 표상한 것으로 인식되는 대안가족이라는 의미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여긴다. 영화가 보여주는 두개의 이미지는 대개의 20, 30대 여성들이 운이 좋아 피할 수 있었거나 앞으로 맞게 될까 두려운 이미지다. 단지는 (실제 여성이 아닌) 사회에서 인식되는 여성의 입구에 서 있으며, 주연은 그 출구에 서 있다. 입구와 출구를 맞붙이면서 <굿바이 싱글>은 우리가 여성으로 살 수 있는 시공간이 얼마나 좁은지, 그리고 그 좁은 공간을 여성이 온전히 점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싱글에게 안녕을 고하면서 찾아오는 것은 남녀의 결합을 의미하는 커플이 아니다. 이 영화가 ‘커플’이라는 단어 대신 맞이하고 있는 것은 나와 비슷한 것을 나란한 존재자로 세운다는 의미에서의 ‘더블’이다. <굿바이 싱글>이 가진 의미는 거창한 대안을 제시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절박한 틈을 발견하고 이를 뚫고 나가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준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