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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에 대한 묘사가 있는 글임을 밝힌다.
소녀들이 길을 떠나는 엔딩을 언제나 좋아했다. 그들 앞에 놓인 철길이 불안과 희망으로 설레게 했다. <저주받은 재산>(1966)과 <천국의 나날들>(1978)이 그랬다. 관습에 저항하고 자유를 갈망하던 자들이 죽거나 희생한 길의 끝에서 소녀들만이 미래로 향한다. ‘아비치’의 노래 <날 깨워줘>(2014)의 뮤직비디오에도 길을 떠나는 자매가 나온다. 자매는 보수적인 마을에서 외계인 취급을 받으며 산다. 동생이 푸념한다. “그들은 우리를 싫어하나봐.” 어느 날, 소녀는 동생을 깨워 떠나자고 말한다. 동생이 묻는다. “어디로?” 소녀는 답한다. “우리가 속한 곳으로.” 그들은 어디로 갈까? 그들이 속한 곳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어쨌든 떠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성인 남자들이 만든 시스템 속에서 살기에 소녀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소녀들은 맞서는 게 맞다. 피가 너무 뜨거워서, 규칙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에 타
[이용철의 영화비평] 춤추며 살아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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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내쉬(앤드루 가필드)는 납득이 안 된다. 데니스는 법원에서 퇴거 명령을 받는다. 평생 살던 집에서 나가라는 통지다. 데니스의 엄마가 작은 가게도 열었던 집이다. 아들이 태어나서 학교에 들어갔던 집이다. 지금까지 내 집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데니스는 아들의 손을 잡고 법정에 서서 하소연한다. 법은 냉정하다.
어느 날 아침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부동산 브로커 릭 카버(마이클 섀넌)가 찾아온다. 손에는 법원 등기 서류가 들려 있다. 릭의 뒤에는 장전된 총을 찬 보안관이 서 있다. 릭은 데니스 가족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생필품만 챙겨서 집에서 나가라고 요구한다. 릭은 얄밉게도 예의까지 차린다. “우리도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법원의 명령에 따라, 이제 이 집은 은행의 소유입니다.” 데니스는 그렇게 자신의 집에서 내쫓긴다. <라스트 홈>의 첫 장면이다.
거두절미하고 전개되는 <라스트 홈>의 첫 장면을 이해하려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신기주의 영화비평] 승자의 나라에서 내 집을 지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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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사이드 다운>은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4명의 유가족과 16명의 국내외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제목인 ‘업사이드 다운’은 관객의 뇌리에 깊이 남은 뒤집힌 세월호를 가리키는 말이자, 이러한 참사를 배태한 한국 사회의 뒤집힌 가치체계를 꼬집는 말이다. 즉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월호 사건은 배가 기울게 된 원인부터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한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구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한명도 구조하지 못한 해경이나, 대형 오보를 터뜨린 것도 모자라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은 언론이나, 유가족을 범죄자처럼 고립시키며 비난했던 정부의 행위는 모두 뒤집힌 가치체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린 시절 이민을 간 재미동포 김동빈 감독은 20대 초반의 다큐멘터리스트이다. 2013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미군 유가족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Vermont Fallen>을 찍은 후, 제작사가 제공하는 심리치료
[황진미의 영화비평] 참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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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번역 출간된 하스미 시게히코의 평론집 <영화의 맨살>에는 ‘영화는 어떻게 죽는가- 할리우드의 50년대’라는 글이 실려있다. 강연을 풀어낸 이 글의 주제는 코언 형제의 신작 <헤일, 시저!>와 크게 통하는 부분이 있다. 경쾌하게 조롱 섞인 긍정을 담은 이 희극 영화는 언뜻 영화 찬가의 외피를 두른 것처럼 보이지만 할리우드 전성기인 1930년대나 1940년대가 아니라 1950년대의 할리우드를 배경 삼았다는 점에서 이 당시에 영화가 죽어가고 있다는 쓰디쓴 진술을 담으려는 속내와 무관하지 않다.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다수의 실력 있는 영화인들은 매카시즘 광풍으로 실업자가 되거나 근신하며 남의 이름을 빌려 활동하지 않으면 망명해야 했다. 할리우드가 전무후무한 커다란 재능의 손실을 겪은 시기였다. 또한 텔레비전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1년에 500여편을 주기적으로 생산하던 작업공정 구조가 훼손되면서 스튜디오 시스템이 무너졌으며 단단한 드라마보다는 대작 위주의 물량공
[김영진의 영화비평] 비극의 시대를 비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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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등장한 가장 주목할 만한 미국 감독 중 하나인 데이비드 O. 러셀은 처음부터 일관된 세계관을 보여주는 감독이었다. 데뷔작 <스팽킹 더 몽키>(1994)에서 <디제스터>(1996)를 거쳐 <쓰리 킹즈>(1999)와 <아이 하트 허커비스>(2004)에 이르기까지, 열혈 인권운동가 출신의 그는 자본주의가 잠식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을 ‘웃픈’ 코미디로 둔갑시켜 조롱과 연민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그의 영화관이 일종의 방향 전환을 이룬 영화는 2010년작 영화 <파이터>이다. 때로 과격하고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화려한 허상에 반기를 들었던 그의 급진주의는 이 영화에 이르러 자취를 감춘다. 보다 세련되고 진중한 방식의 드라마로 구성된 <파이터>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하층민의 이야기는 훌륭한 배우들의 앙상블에 힘입어 밀도 있게 그려진다.
아카데미영화제에서 환대를 받고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휩
[최은영의 영화비평] TV 속 여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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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아들>을 VR(Virtual Reality)로 감상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곤 잠시 멍해졌다. 관계자들에게 대체 무슨 생각인지 묻고 싶었다. 누가 그 끔찍한 학살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싶어 한단 말인가. <사울의 아들>에 쏟아진 격찬의 근거는 대개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을 비틀어 접근하는 형식, 재현의 윤리 때문이다. 감독은 대학살의 현장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선 안 된다는 판단으로 프레임을 제한하고, 초점을 흐리고, 일인칭의 제한된 시점을 택했다고 수차례 밝혔다. 적지 않은 평자들이 이 영화에 보낸 지지 역시 이러한 형식이 영화의 윤리성을 담보한 고뇌의 결과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VR은 연출 의도를 정면으로 뒤집는 포맷이다. 보다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영상을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 지각적 리얼리티로서의 VR 방식을 라슬로 네메시 감독이 과연 허락한 것일까.
한편으론 궁금하다. 형식적 성취를 완전히 배반하는 VR을 앞두고 호기심이 앞선다.
[송경원의 영화비평] 액자는 그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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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이후 미국 군인의 파병은 대개 일관된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상대편 국가의 지도자(와 국민)는 미 제국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혁명전을 치른다고 생각하는 반면, 정작 전쟁에 뛰어든 미군은 정치적 측면에 무지하다. 혹은 관심이 없는 척해야 한다. 그들은 누군가의 결정에 따라 전쟁을 수행할 따름이다. 그러한 상황이 잘 드러난 작품은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2001)이다. 소말리아 내란에 끼어든 병사들은 하나같이 “나는 정치에 대해 모른다”라고 말한다. <블랙 호크 다운> 개봉 당시, 나는 영화는 물론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작전 자체에 반감을 느꼈다. 내 기본적인 생각은 ‘집안싸움에 이웃 아저씨가 주먹질로 개입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었고, 영화가 소말리아의 민중을 조지 로메로 영화의 좀비처럼 그리는 게 불편했다. 얼마 후 한국 장교들의 인터넷 포럼에서 내 표현을 비웃는 글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기자라고 판단했으며 마치 비전문
[이용철의 영화비평] 원치 않는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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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는 1981년 북아일랜드에서 옥중단식으로 사망한 보비 샌즈를 그린다. 2008년에 만들어진 스티븐 매퀸 감독의 데뷔작으로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았다. 영화는 ‘목숨을 건 단식’이라는 역사적이고 논쟁적인 사건을 다루면서, 절제된 시선으로 객관성과 성찰성을 확보한다. 영화는 한순간도 숭고함을 주장하지 않지만, 지난한 ‘몸의 투쟁’을 면밀히 비춤으로써 숭고함에 육박해 들어가는 실존의 경지를 보여준다.
다층적인 시선과 구성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담요투쟁과 오물투쟁을 보여주는 1부, 단식투쟁을 결심한 보비 샌즈와 가톨릭 사제간의 대화를 담은 2부, 단식으로 죽어가는 보비 샌즈를 그린 3부. 1부의 중간까지 보비 샌즈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담요투쟁과 오물투쟁을 벌이는 다른 수감자들과 이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교도관을 비춘다. 영화 초반 마치 주인공인 양 비추던 강박적인 교도관의 총상 장면은 당혹스러운데, 영화는 왜 이처럼 비관습적인 흐름을 택
[황진미의 영화비평] 숭고함을 응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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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문3: 최후의 대결>(2015, 이하 <엽문3>)로 마침내 <엽문> 시리즈는 3부작의 마침표를 찍었다. 엽위신의 <엽문>(2008)은 홍콩 무술영화의 역사에 중요한 변곡점을 그은 작품이었다. 그 중요성은 액션영화의 트렌드가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을 파악해야 이해될 수 있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나 <소림 36방>(1978)과 같은 쇼브러더스 무협영화 이래 무술안무의 주종을 이룬 건 황비홍의 무술로 유명한 홍가권(洪家拳)이었다. 광둥 남파권법의 일종으로 넓은 보폭에 큰 동작을 특징으로 삼는 장교대마(長橋大馬)의 홍가권은 박력을 강조해야 하는 영화적 표현의 측면에서 각광받았다. 더군다나 유가량, 유가휘 등 무술 스턴트팀 상당수가 홍가권 수련자 출신으로 채워져 있었던 바, 홍가권 중심의 안무가 유행하는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하지만 영화 무술의 패러다임이 폭력의 현실성을 살리는 실전 무술 중심의 안무로
[조재휘의 영화비평] 홍콩 액션영화의 한 시대의 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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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홧발에 짓밟히는 순수한 소녀, 악마와도 같은 일본놈들, 그리고 무기력한 조선의 아버지와 오빠. <귀향>은 염려했던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다. 개봉 전부터 SNS를 통해 논란이 되었던 위안소에서의 집단 강간 장면을 비롯한 일본군과 ‘위안부’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는 “폭력을, 그리고 그 역사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진부한 질문을 다시 논의의 장에 올려놓았다. 일본인 개개인을 괴물화하지 않는다면, 조선인 개개인을 무기력한 소녀로 그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역사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일까. <귀향>은 폭력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 폭력이 된다. 그리고 그 폭력에 대한 논의는 피해자 재현 윤리뿐 아니라 ‘우리’를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그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질문들로 이어진다.
폭력, 매혹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것이어야
첫 질문을 던져보자. <귀향>의 선정적인 재현은 ‘피해자 여성’에 대한 또 다른 폭력 아닌가? 물
[손희정의 영화비평] 어떻게 새로운 ‘우리’를 상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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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이 등장한다. 현실을 빗대어 풍자한다. 모든 (포유)동물들의 평화로운 공존, 그러나 여전히 지배하는 불안과 공포. DNA로 대표되는 생물학적 속성은 사회화 과정으로 제어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두려움을 유지하고 증폭시키는 고정관념과 편견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나아가 모두가 저마다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받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이상적 이념을 실현하는 것은 개인의 몫인가, 집단의 몫인가? 우리는 그것을 이행할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혹은 여전히 그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달콤한 청사진에 불과한 것인가? <주토피아>에 대한 언급은 이처럼 간결히 정리할 수 있다. 적어도 애니메이션영화 자체의 즐거움을 거세한다면 말이다. 제작사가 디즈니라면 평가의 방향성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 글은 그러한 무한 반복 재생산에서 벗어나보고자 한다. <주토피아>는 꽤나 재밌기 때문이다.
동물, 유토피아 그리
[나호원의 영화비평] 친근하지만 새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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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의 초점이 맥없이 흐려졌다. 2004년 말 동남아 쓰나미 때의 일이다. 당시 4년차 사건기자였던 나는 현지 사정을 알아볼 겨를도 없이 타이 푸껫으로 날아가야 했다. 현장에 도착하니 천혜의 에메랄드빛 바다와 수백구의 익사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눈앞이 뿌예지고 시야가 좁아졌다. 무의식에 이끌리듯 시신 옆 땅바닥 같은 곳에 시선을 두며 취재를 계속했다. 부패가 시작된 익사체는 초록색으로 변하며 부푼다. 체내가스 탓이다. 고온다습한 곳에서 빠른 속도로 빛깔과 부피가 변하면서 심한 악취를 낸다. 사찰마다 임시로 마련된 시신 집합소에는 도리 없이 썩어가는 시체 더미 옆에 새로 들어온 희생자의 몸들이 쌓여갔다. 유족의 신원 확인 전까지는 매장이나 화장을 할 수 없다. 생존자들은 이미 형체를 분간할 수 없게 된 시신들을 하나하나 들춰보며 가족의 생사 여부만이라도 알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당시 쓰나미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23만명이 넘는다.
어떤 여인은 시댁에 알리지 않은 채 친정 부모
[송형국의 영화비평] 가장 정확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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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은 납치, 감금, 성폭행, 출산과 양육이라는 단어들로 구성된 끔찍한 실화에서 모티브를 차용한 에마 도노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은 소재가 안고 있는 폭력의 선정성을 서사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대신 비극을 이겨내고 삶을 온전히 긍정하게 되는 치유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잭의 시점에서 서술이 이루어지는 원작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룸>은 잭의 시점숏과 내레이션을 적극 도입했다. 그런데 이제 막 다섯살 생일을 맞은 잭의 내레이션은 ‘무지한 서술자’였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의 그것과 달리 통찰력 있는 성자의 언술처럼 다가온다. 강인한 엄마와 상처받은 여성 그리고 혼란스러운 딸의 역할까지 아우르는 브리 라슨은 흡사 이 세상에 속한 아이가 아닌 듯 신비로운 잭을 보여준 제이콥 트렘블레이의 모습과 함께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가장 큰 힘이다(그녀의 연기에 화답하듯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는 여우주연상을 선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김지미의 영화비평] 따뜻한 방식으로 탈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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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했던 아도르노의 선언. 우리는 지옥 같던 그곳을 상징화할 언어(또는 재현 형식)를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것이 아우슈비츠 영화 대부분이 실패를 반복하는 이유다. 아우슈비츠는 예술적 행위가 끝내 다다를 수 없는 영원한 ‘공백’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공백은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악행이 낳은 결과다. <사울의 아들>로 그 공백이 메워졌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한편의 영화로 채워질 공백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사울의 아들>은 어금니 꽉 깨물고 그 공백 위를 뚜벅뚜벅 걸으며, 낡디낡은 명제 하나를 되살려낸다.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인식하고 있는 한,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예술’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헤겔). 감독 라슬로 네메시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우슈비츠 희생자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 고통의 표현 형식을 고안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죽은
[안시환의 영화비평]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