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수라>를 본 후 머리 한구석에서 ‘또 한편의 한국영화, 남자영화’ 정도로 분류했던 것 같다. 준수한 만듦새와 몇몇 빼어난 장면들이 잔상처럼 남았고, 그뿐이었다. 크게 비평의 언어를 필요로 하는 영화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첫인상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건 <아수라> 이후 영화를 둘러싸고 갈라진 반응들 때문이다.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렇지 않은 영화가 없겠지만 <아수라>는 유달리 강하게 나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영화다. 조금 과격하게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감독의 취향을 극적으로 밀어붙였고 감독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방식을 취해서 완성됐다. 감독의 개성, 일관된 인장들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만큼 누군가에는 피로와 불편으로, 누군가에게는 쾌감으로 다가오는 게 당연한 일이다.
저평가된 수작인가, 또 하나의 실패인가
다만 애초에 나는 이것이 단순히 취향의 문제일 것이라 섣불리 예단해버렸는데, 이후 영화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낸 쪽이나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이들이 문제 삼는 각각의 논거를 들으며 이 영화를 바라보는 욕망이 그렇게 단순한 차원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들었다. 이제 와 뒤늦게 영화에 대한 찬반 의견을 하나 더 보태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아수라>의 성취를 둘러싼 각기 다른 이해를 보며 이 영화가 최근 한국영화의 어떤 경향을 더듬어보는 유효한 리트머스지가 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가 들었다. 굳이 막연함이란 전제를 붙인 건 논리적으로 선명하게 설명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이 영화를, 나아가 근래 한국영화들을 정의하는 열쇠말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집중하고 싶은 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보다는 어떻게 이해(혹은 소비)되는가의 측면이다.
옹호와 반대의 이분법으로 가를 땐 간과하기 쉬운 것들부터 짚어보자. <아수라>를 찬성하는 쪽이든 반대하는 쪽이든 동의하는 지점이 몇 가지 있는 것 같다. 우선 이 영화가 감독의 비전을 끝까지 밀어붙여 매우 고집스럽고 과격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김성수 감독은 잘 다루지 못하는 여성 캐릭터를 굳이 끌어들이지 않고, 장르영화의 공식처럼 첨가되던 신파적 요소는 과감히 생략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수컷들의 지긋지긋한 폭력과 추잡한 실체, 권력의 비루함을 차곡차곡 채워넣었다. 요컨대 <아수라>는 본인이 하고 싶고, 잘하는 것만 추려낸 이기적인 장난감처럼 보인다. 장르 공식이나 상업영화의 요구보다 감독이 하고 싶은 걸 따랐다는 것, 그걸 피곤할 정도로 밀어붙인 점은 작가 의식의 발로로 보일 여지가 충분하다. “이 영화는 기시감을 반복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시감을 주는 상황을 전개하는 척 하면서 우리가 보고 싶지 않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경계 끝까지 밀어붙인 배짱의 산물”(<씨네21> 1076호 김영진의 <아수라> 영화비평, ‘조잡한 세계의 잔혹한 조감도’)이란 평가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두 번째로 이야기의 약점에 관한 공감대가 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내러티브가 성기고 피로하고 비현실적이며 때론 유아적이기까지 하다’는 게 <아수라>를 비판하는 쪽의 요지다. 한마디로 이야기가 동어반복이며 조악하다는 건데, 반면 이 영화에 적극적인 옹호를 보내는 쪽은 그와 같은 구성이 의도된 것이며 영화의 뉘앙스를 쌓아나가는 유용한 방식이라고 해석하는 것 같다. 남성 중심적인 세계를 재현했지만 그 재현 자체가 자기반성적이라는 요지다. 이처럼 “폭력을 통해 폭력을 지적한다”는 감독의 변은 얼핏 그럴듯해 보인다. 분명 <아수라>는 세계를 매우 어둡고 부정적으로 묘사해 세계의 조악함을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문제는 이때 이야기의 조악함이 필수적이었냐는 지점인데, 영화에 대한 찬반은 이 부분에 대한 판단을 기점으로 나뉜다.
옹호하는 쪽은 영화가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이 현실의 치졸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의 일부라고 말한다. 영화보다 끔찍한 현실의 상황을 극단적 폭력의 전시를 통해 드러냈다는 입장이다. 반대하는 쪽은 이건 그저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뿐이며 폭력의 단순 과시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 같다. “이 폭력의 전시가 피로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이 한국 사회의 피로함을 재현하거나 은유해서가 아니라 일차원적이라서다”(‘매거진 IZE’ 위근우 기자의 글, ‘<아수라>는 알탕영화인가, 오해받은 수작인가’)라는 해석이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수라>가 긍정과 부정 양 방향에서 천편일률의 조립식 공장을 향해 가는 한국영화의 흐름을 지적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이루고 있는 어떤 성취나 작가적 고집, 내적인 완성도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찬성과 옹호 양쪽에서 이뤄지는 해석의 과잉, 그 마찰음들이 한국영화 내에서 이 영화의 위치를 드러내는 건 아닌가 싶다. 전체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수라>가 김성수 감독의 취향과 개성을 온전히 드러낸 영화라는 점이며 그 방식이 온전히 상업영화나 장르영화의 공식들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아수라>는 불편함을 남길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폭력을 반복, 전시한다. 이를 두고 한쪽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구원의 부재라고 말하고, 다른 한쪽은 또 하나의 쾌감에 봉사하는 장르영화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후자에 가깝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가진 개성과 감독의 뚝심을 폄하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다만 영화를 옹호하는 쪽에서 그 근거로 이야기와 구성에 대한 찬사를 꼽는 건 이상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아수라>의 이율배반
예술적 가치나 작가주의를 논할 때 영화에서는 종종 서사가 사악한 것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있다. 영화는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기에 형식을 통해 작가적 메시지를 구현해야 한다는 견해는, 때로 이야기를 거추장스럽고 부수적인 것으로 밀어낸다. 부분적으로는 동의한다. 소위 ‘영화적’이라는 스타일들은 영화만이 추구할 수 있는 표현들을 창조해내며 영역을 넓혀갔다. 하지만 간혹 엉성한 스토리의 행간을 자기과시적인 이미지로 채워낸 영화들이 비슷한 변명을 할 때 난감함을 느낀다. 스토리와 내러티브는 엄밀히 구분될 필요가 있는데, 때론 엉성한 내러티브까지 표현의 일부인 양 포장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아수라>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 영화가 폭력의 극단적인 전시를 통해 폭력의 보잘것없는 일면을 강조한다고 보는 건, 감독의 뚝심을 선의로 해석하고 싶은 이들이 쉽게 꺼낼 수 있는 변명에 불과하다. <아수라>의 서사는 명백히 실패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로 보이지 않을 만큼 빛나는 부분들이 있다. 지금 <아수라>를 긍정하는 목소리에는 실패를 실패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욕망이 묻어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이들이 찾아내는 건 감독의 태도, 획일화된 영화를 강조하는 현 상황에서 개성을 지켜낸 뚝심, 영화 속 부분적으로 빛나는 시퀀스들이다. 단지 그 부분을 조명하는 것으로 족한데, 때론 부분의 성취를 전체의 미덕으로 확장 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단적으로 <아수라>는 탐욕스럽고 무정한 남성권력 세계가 진정 그렇게 인식되도록 재현하고 있는가. 이 영화는 그만큼 끔찍하고 불편한가. <아수라>가 주는 피로감은 상황을 끝까지 몰아붙인 단념의 정조 때문도 아니고, 끝내 황폐한 세상에 도달하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피로할 수밖에 없게 구성된 내러티브 탓이다. 좋아하는 장면, 잘하는 장면을 꾹꾹 눌러 담고 일체의 완급조절 없이 완성시킨 일차원적인 폭력의 세계. 여기서 폭력의 허무함을 말하는 건 뒤늦은 변명 내지는 허세에 불과하다. 그건 의리니 충성이니 하는 남성세계의 위선을 까발리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만큼 허무한 수사다. 설사 그러한 의도가 있었다고 한들 이 영화가 그 허무를 제대로 전달하는지 의문이다. 우리는 좀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그 장면들이, 표현들이 그토록 끔찍하고 우스꽝스러웠나. 굳이 내러티브적 완성도에 의미 부여를 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의 태도나 정조는 귀중한 것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신파 공식에 기댄 영화가 판치는 한국영화의 흐름 안에서는 말이다. 나는 김성수 감독이 그냥 자신이 잘하는 장르영화를 찍고 싶었고, 좋아하는 장면만을 모아서 완성한 영화가 <아수라>라고 본다. 이유나 의미는 그다음이다. 이 영화는 멋스러움, 나르시시즘, 액션에의 쾌감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극적으로 과대 포장한다. 정우성은 피칠갑이 되어도 정우성이고 악다구니 같은 장례식장조차 끔찍한 살육이라기보다는 진귀한 구경거리에 가깝다. 이 점에 솔직해지지 않고 영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이율배반적인 태도다. <아수라>는 잘 만들었고 즐길 만하며 몇몇 관객에겐 충분히 호소할 수 있는 상업장르영화다. 만약 우리가 <아수라>에서 의미나 행간을 읽어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이 사람이 나를 이렇게 피로하게 만들어서 뭘 얻으려고 하는 걸까’가 아니다. 그보다는 ‘쾌감과 피로감을 이중교차시키는 이 영화가 왜 서사적으로 실패했음에도 우리에게 어떤 정서적 얼룩을 남기는가’가 되어야 한다.
<아수라>가 신파를 덜어내는 과정에서 역설적이지만 인물의 심리도 함께 제거해버린다. 관객은 한도경(정우성), 박성배(황정민) 등 어떤 캐릭터와도 시점을 일치시키기 어렵다. 그들이 악당이고 황폐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다. 단순히 영화가 이들의 심리 변화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내면은 극단적인 상황과 폭력의 전시에 자리를 양보한다. 말하자면 기능과 욕망으 로 뭉쳐진 덩어리일 뿐 이들은 애초에 사람이 아니다. 혹은 사람이 될 틈이 없다. 그럼에도 한도경의 고뇌가 느껴지는 건, 박성배의 끔찍함에 피와 살이 도는 건 오직 배우의 아우라와 생생한 장면 덕분이다. 달리 말하자면 <아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지와 정서의 반복으로 이뤄진 영화다. 한 단어로 표현하면 멋진 액션 장면으로 ‘전시’된 영화다. 우리는 안남시의 시장 박성배를 보기 이전에 여러 영화에서 이미 학습한 ‘배우 황정민’을 본다. 지치고 황폐한 한도경의 눈빛 이전에 진지한 연기를 위한 ‘정우성의 발버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요컨대 내러티브에 몰입되기보다는 영화 바깥 배우들의 아우라를 전면에 내세우는 데 거리낌이 없다.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지옥도는 고생해서 잘 찍은 화면 이상의 의미로 확장되기 어렵다. 문제는 이 개별 장면들이 지나치게 잘 찍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개별 시퀀스만 떼어놓고 보면 훨씬 근사할, 잘 다듬어진 조각들을 기계적으로 이어붙인 느낌이다. 이 고저장단 없는 강, 강, 강 시퀀스의 나열을 두고 폭력의 극단을 형상화하려는 타협 없는 연출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이 영화는 지나치게 멋을 부린다. 심지어 시퀀스간의 연결이나 정서의 형상화에도 그다지 신경을 쏟지 않는다(차라리 <비트>(1997), <태양은 없다>(1998) 등 감독의 전작을 의식한 듯한 장면들이 더 많다). 전체를 아우르는 시선의 부재, 일차원적인 폭력의 나열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밀정>, 뭉개진 내러티브 안을 채운 막연한 무드
내가 여기서 좀더 집중하고 싶은 건 개별 시퀀스의 완성도와 전체 리듬간의 현격한 차이다. 그것이 의도이건 실패이건 관계없이 언젠가부터 한국영화에서는 개별 장면의 빼어난 성취들만으로, 혹은 배우들의 호연만으로 영화의 빈틈이 상당 부분 메워지는 착시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예컨대 <아수라>가 구원의 출구 따윈 없는 정조를 표현하는데 사실 130분이 넘는 상영시간은 필요치 않다. 마지막 장례식장 시퀀스 하나로도 충분하다. 아니, 어떤 시퀀스를 가져다놓아도 그 정서는 충분히 달성된다. 감독의 목적이 그 황폐한 폭력의 민낯을 전달하는 것이었다면 영화가 반복하는 상황들은 그저 과잉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설사 그 과잉 된 상태가 목적이었다 해도 이 영화의 구성이 지나치게 치우쳐져 있다는 인상을 지우긴 힘들다. 나는 이러한 불균형이 감독의 결기 혹은 뚝심으로 포장되는 것에 반대한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일관성조차 귀해 보일 정도로 최근 한국영화 속에서 무드나 뉘앙스는 절대적인 마법의 도구로 남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영화들이 조각난 채 자신을 충분히 설명해내지 못하는데도 그럴듯한 무드를 자아내는 개별 시퀀스의 힘만으로 마치 잘 만든 영화인 양 포장된다. 이때의 무드는 영화 안쪽으로부터 피어난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저 착시나 속임수는 아닌가.
<밀정>과 <아수라>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긴 어렵다. 하지만 두 영화를 향한 긍정적인 반응이 무드와 뉘앙스를 잘 구현한 개별 장면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밀정>에서 이정출(송강호)이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되는 과정은 사실 뜬끔없이 제시된다. 이정출의 심리를 형상화하는 대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근거로 끌고 오는 것이다. 이때 이정출의 변모는 내러티브 안에서 쌓아나간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기보다는 의열단이라는 역사적 흔적들에 의한 외부의 호명에 가깝다. 이정출의 심리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의심하는 히가시 경부와의 대립이 좀더 부각되어야 함에도 영화 중반 이를 차단한 채 엉뚱하게 독립운동의 당위를 끌어들인다. 그 결과 이정출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심리가 정확히 이해가지 않더라도 영화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첩보활동이 전개되는 과정에 시간을 할애해 충분히 근사하고 멋있게 보이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관객이 목격하는건 단지 이 멋스럽고 당연한 구경거리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관객은 이 영화가 취하는 일종의 허세에 포섭되거나 반발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개별 시퀀스의 완성도와 배우들의 호연은 이러한 내러티브의 불균질한 요철마저 뭉개버린다.
<밀정>의 개별 시퀀스들의 기계적인 완성도는 딱히 흠잡을 데 없다. 하지만 각 시퀀스들의 연결이 어떤 흐름을 형성해내지 못할때 영화는 변명을 시작한다. 개별 장면의 흥미롭고 충실한 묘사는 일종의 착시를 일으키고, 배우의 아우라는 내러티브 바깥에서 관객을 설득하려 애쓰는 것이다. <밀정>과 <아수라>는 방향도, 스타일도, 고집도 다른 영화지만 내러티브를 뭉개고 그 자리에 막연한 무드를 채워넣으며 만족하는 태도는 비슷해 보인다. 부분의 짜임새와 전체의 합은 다름에도 조각의 완성도가 전체의 무드를 지배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떠도는 걸까. 멋진 화면들을 이어 붙이고, 배우들의 호연을 배치시킨 후 막연한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최근 한국영화가 무드와 뉘앙스를 착취하는 방식 중 하나인 것 같다. 익숙한 배우의 아우라로 풀칠을 시작하는 순간 설득과 공감의 내러티브는 멸시당한다. 그 장면만 보면 근사한데, 전체 영화에서는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것이다. 과잉, 뚝심, 전시, 반복 뭐라고 치장하든 영화 내부에서 견고한 연결고리를 형성하지 못한 장면들은 결국 허세 혹은 빈껍데기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어떤 껍데기는 불쾌하고, 어떤 껍데기는 피곤하다.
무드와 뉘앙스는 어떻게 피어나는가. 혹은 무드와 뉘앙스만으로 영화가 성립하는가. 그럴 수도 있다. 다만 무드는 개별 장면에서 짜내는 것이 아니라 영상의 창조와 편집을 통해 ‘형상화’되어야 한다. 최근 한국영화 속 인상적인 장면들에는 근사한 순간들이 있지만 제각각 조각난 채 스타일을 과시하는 것에 그친다. <아수라>의 폭력이 왜 남성 중심의 폭력적 권력을 향한 조롱으로 체화 되지 않는가. <밀정>의 이정출이 지닌 인간적이고 양가적 감정이 왜 애국이란 거대 담론에 휩쓸려 내려가는가. <곡성> 속 굿판의 농밀한 에너지가 왜 관객을 기만하는 도구로 전락하는가. 이 장면들의 정서는 매우 그럴듯하지만 개별 장면 안에서 따로 운용된다. <아수라>가 뒤늦게 내게 남긴 건 구로사와 기요시의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이하 <크리피>)에 대한 오판을 수정 하는 일이었다. 나는 <크리피>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범작에 불과하다고 봤다. 내러티브의 인과를 무드로 뭉개는 순간이 적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빌려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반성한다. <크리피>는 반복, 점층되는 숏의 운동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무서운 영화다. 얼핏 내러티브의 부재를 정서와 형상의 반복으로 채우는 방식이 <아수라>와 유사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질서의 붕괴 끝에 질식할 것 같은 절망으로 채워지는 것도 닮았고 개별 장면들을 굳이 맥락 속에 녹여내려 애쓰지 않은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 속살의 밀도는 전혀 다르다. <아수라>가 취향의 기계적 합, 조립과 나열이라면 <크리피>는 이를 녹여내 하나의 형상으로 빚어낸 조각품이다. 모든 숏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그 일체감이 구로사와 기요시라는 무겁고, 무섭고, 음험한 세계 한가운데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영화라는 현실을 책임지는 자는 숏의 힘이 순간의 자극이나 과시로 흐르도록 방치해선 안 된다. 그 에너지는 진실이 스며들 수 있도록 온전히 내부를 향해야 한다. 조각난 영화는 더이상 영화가 아니다. <아수라>를 필두로 한 최근 한국영화들이 장면의 완성도에 천착하느라 놓치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