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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연의 영화비평]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실험하고 보여주는 장률의 <춘몽>

장률 감독의 모든 영화들을 지배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죽음’이었다. 그의 영화에는 모든 인간이라면 숙명적으로 맞이해야 할 육체적 죽음이 있었고, 이주민(민족 혹은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돌연하고도 부조리한 죽음들이 있었다. 죽음에 대한 그의 묘사가 달라진 건 아마도 감독의 한국 생활 이후일 것이다. 특히 <풍경>(2013)과 <경주>(2014)에서부터 <필름시대사랑>(2015)을 거쳐 이번 영화 <춘몽>까지, 한국에서 제작된 이 영화들 속 죽음들은 육체의 물리적 소멸이나 서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시적인 방식으로 사유되고 묘사되는 죽음들이다. 그에게 영화란 꿈의 언어와 흡사한 것이고, 동시에 그것은 죽음을 사유하는 언어이다.

죽음과 영화

<경주>에서 시작해보자. <춘몽>과 흡사 거울처럼 마주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서사의 작인은 ‘죽음’이었다. 선배의 돌연한 죽음으로 경주를 방문한 한 남자의 이틀을 기록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그는 무수한 죽음들이 남긴 ‘흔적들’을 경험한다. 장례식장에서 시작된 여정은 그를 7년 전 방문했던 찻집의 새로운 여주인이자 미망인에게 그녀의 죽은 남편을 환기하는 이미지로, 유원지에서 자살하게 될 한 모녀와 스쳐가는 인연으로, 이미 죽어버린 점술가 노인의 유령을 마주하는 자로, 그리고 백주에 자기 눈앞에서 죽음을 맞는 폭주족들을 목격하는 기이한 여행자로 안내한다. 창밖에 거대한 무덤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도시, 죽은 자들의 지표가 현실의 삶을 은유하는 도시에서 주인공은 7년 전의 불완전한 기억과 정념 그리고 무수한 만남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여행을 한다. <경주>는 서사와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곳곳에 자리한 죽음(이미 발생한 죽음)에 대한 흔적들을 공간적으로 새기는 영화였다. 그러나 <춘몽>은 죽음 이전으로 돌아간다. 살아남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목도하는 영화가 아니라, 이제 곧 다가올 죽음을 예감한 자가 자신의 삶의 흔적들을 한 소외된 도시 공간에 새겨나가는 영화이고, 자신의 예견된 죽음을 스스로 준비하고 애도하는 영화이다.

“타향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밤에 꾸는 꿈이란 현실에 침입할 여지가 훨씬 많다.”

장률 감독은 이번 영화에 관한 정성일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이방인들의 꿈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한 바 있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 낯선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들 속에서 밤의 이미지는 고스란히 현실의 공간으로 침입해온다. 이러한 그의 꿈 이미지는 <풍경>에서 이미 진술된 바 있다. 한국으로 이주해온 노동자들에게 그는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이국의 땅에서 어떤 꿈을 꾸었는가? 어떤 이는 자신들의 소망 이미지를 담은 백일몽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어떤 이는 소름끼치도록 공포스러웠던 악몽, 혹은 정말로 현실이 되어버린 불길한 예지몽에 대해 이야기한다. <춘몽>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낯선 땅, 온전치 못한 아버지, 타향살이의 고단함만을 지니고 살아가는 조선족 출신 예리(한예리)가 꾸는 가장 고단하고도 불길했던 어떤 꿈과 죽음에 관한 기록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춘몽>에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한 여인과 세 남자의 비루한 도시(수색동) 여정이 아니라, “꿈꾸는 자”와 그 “꿈의 구조”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음을 암시하는 꿈과 진짜 발생할 죽음, 그리고 꿈과 현실의 경계를 거부하는 영화적 장치들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꿈을 꾸는 자의 이야기’. 영화는 초반부 예리의 기묘한 꿈 이미지를 보여준다. 예리는 꿈속에서 병든 아버지의 휠체어가 집 앞 경사진 골목을 위태롭게 굴러가는 것을 본 것이다. 퍼뜩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아버지의 방으로 가 잠든 아버지를 근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극중 예리나 관객은 모두 그것이 그녀 아버지의 죽음을 예지하는 꿈일지도 모른다고 오인한다. 그런데 영화의 중반부에 우리는 정말로 아버지가 탄 휠체어가 그 골목을 위태롭게 굴러 내려오는 장면을 보게 된다. 자신의 의지로는 눈조차 뜨지 못하는 아버지가 어떻게 골목을 굴러 내려오게 되었는가에 관한 문제는 영화적 서사나 현실의 개연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에 상응하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잠든 예리의 얼굴 위로 무언가가 떨어지고 이내 천장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것이 예리의 또 다른 악몽(죽음의 예지몽)일 것이라 간주하지만, 그 장면은 이내 꿈이 아니라 진짜로 발생한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정말로 한밤중에 천장의 벽지가 떨어져내린 것이다.

장률 감독은 이처럼 영화에서 꿈의 이미지와 현실의 이미지를 유사한 방식으로 겹쳐놓거나 반복하는 트릭을 쓴다. 그 이유는 명확해 보인다. 그는 애써 꿈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고자 하는 우리의 통상적 관람방식을 부정한다. 영화적 서사 안에서 불가해적으로 넘나드는 꿈과 현실의 경계 혹은 구조를 새기는 것이다. 이를 선언하듯 보여주는 본격적인 장면이 무려 상영 30여분이 지나고서야 제시되는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 장면이다. 수색동 옥상에서 술을 마시던 4명의 친구들 중 예리는 취기가 올라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녀의 춤사위를 따라 카메라가 360도를 한 바퀴 돌았을 때 세 남자들은 사라지고 그들이 먹던 술자리 흔적만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순간 홀로 남은 예리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이전 장면들이 꿈이었을지, 아니면 모두가 사라지고 홀로 남은 예리의 모습 이후가 꿈이 될지 판단하기 모호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호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서로 다른 세계에 대한 경계를 무화시키는 장률 감독의 의지는 서사적 사건이나 초월적 무드를 형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가령 <경주>에서 박해일이 찻집에서 죽은 선배의 미망인을 만나는 환영적 장면은 컷 분할이 아니라 긴 패닝숏을 통해 제시된다(카메라가 패닝하는 동안 미망인은 찻집 주인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 영화 <춘몽>에서 가장 매력적이기도 한 오프닝 시퀀스 역시, 감독은 물리적으로 숏을 분할하기를 거부하고 카메라의 연속성, 즉 360도 패닝숏을 통해 제시한다. 꿈과 현실,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이 영화에서 카메라 운동의 연속성으로 통합되듯 부정된다.

그리고 역시 예리의 춤사위로부터 이어지는 이 영화의 꿈과 죽음의 경계에 관한 마지막 장면. 예리의 이상형(혹은 백일몽-춘몽)을 상징했던 한 남자가 불쑥 그녀의 주막을 찾아온다. 최면에 빠지듯 남자에게 매혹된 그녀는 그와 함께 춤을 추다, 남자를 뒤쫓아 주막 문 밖으로 달려나가버린다. 그리고 이내 화면을 채우는 그녀의 흑백 영정사진. 그리고 다시 영화는 주막에 모여 앉은 세 남자의 흑백 이미지로부터 점차 컬러로 전환되고, 마치 부유하는 유령적 시선인 양 주막 문 밖으로 흘러나간다. 그 순간 미라처럼 앉아만 있던 아버지가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골목길을 성큼성큼 걸어나가고, 예리의 삶의 공간이었던 수색동의 가난한 골목들과 여전히 그것에 자리하고 있는 다른 이들의 일상의 모습들이 보여진다. 그렇다면 이 컬러의 세계는 현실의 이미지였을까, 죽어버린 예리가 꿈꾸던 소망 이미지-춘몽이었을까? 혹 그것도 아니라면 세 남자들이 꿈꾸는 한 여성에 관한 성적 백일몽-춘몽이었을까?

꿈과 영화

“네 사람이 한 사람인 것 같아요. 어떻게 네 사람이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건 현실에선 불가능하죠. 미치는 게 아니라면요. 그런데 꿈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률 감독은 불가해한 꿈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다. 꿈속에서 시공간의 불연속성이나 인과론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영화는 꿈에 비유되어왔었다. 영화 <춘몽>에서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꿈의 이미지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불쑥불쑥 멀쩡한 사람처럼 말을 내뱉는 아버지 상태의 진위도, 뜬금없이 산속에서 오토바이를 끌고 내려오는 주영(이주영)의 행위도, 그리고 ‘꿈속에서 세 남자와 다 잤으니 잔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예리의 대사도 현실의 논리를 따져 파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심지어 감독은 네명의 인물이 어쩌면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가. 변신에 관한 꿈의 능력은 영화적 재현 능력과 닮아 있다.

이것과 관련한 매우 흥미로운 대화가 있다. 시를 쓰는 주영은 예리에게 백두산 천지를 가본 적 있는지 물어본다. 그러자 그녀는 천지는 보지 못했는데, 그 안에 고인 물은 만지고 왔다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천지의 이미지는 예리가 읽곤 하는 시나 소설 속 문장들처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는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영화’ 혹은 ‘죽음’의 존재론에 관한 비유이기도 하다. “볼 수 없는데 만질 수 있는 것.” 논리적 모순 같지만 우리는 그 역전된 현상을 자주 체험한다. “볼 수는 있는데 만질 수 없는 것.” 영화의 존재론 혹은 유령의 존재론이 그러하다. 그리고 앙드레 바쟁이 미라 콤플렉스라 말했던 (불멸의 욕망이 물화되어 나타나는) 사진-영화의 존재론이 그러하다. 바로 여기서, 장률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가 구성하는 시공간의 새로운 시적 운율에 대해 사유한다(영화에서 예리를 사랑하는 주영은 ‘언니가 시예요’라는 말을 한다. 어쩌면 장률 감독에게 최대의 찬사는 이 영화 <춘몽>이 그 자체로 시적 세계를 구성한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시적 언어를 마치 영화적 언어로 번역하듯 작업한다). 그의 초기 영화적 필모그래피가 삶에 공존하는 죽음의 문제를 형상화하는 것이었다면, <풍경> 이후 그는 죽음을 기록하고 혹은 죽음을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 영화의 존재론과 영화언어의 시적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다.

가령 <경주>에서 박해일은 7년 전 들었던 샘물 소리를 기억한다. 그런데 다른 이는 그곳엔 샘물이 없었으니 그가 착각했거나 환청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그 기억은 오인이거나 왜곡된 것이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영화의 후반부 박해일의 여정 막바지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분명 어디선가 들려오는 샘물 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게 된다. 영화적 이미지와 사운드, 현실의 개연성을 넘어서는 시적 언어의 세계에 대한 욕망. 영화 매체에 대한 자기 반영성에 대한 장률 감독의 실험은 <필름시대사랑>에서 보다 본격화된다.

<필름시대사랑>은 ‘영화적 죽음’에 대한 기록이자 동시에 그 죽음에 저항하는 영화였다. ‘영화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필름’의 소멸, 그 소멸된 필름으로 다시 기록된 기묘한 세계. 유효기간이 지나 누렇게 바랜 16mm 필름의 질감이 물질적으로 환기되고 디지털 매체가 장악한 영화적 시대에 무성영화의 화법이 제시된다. 이미지와 사운드가 충돌되고, 필름과 디지털이 겹쳐지며, 과거의 이미지와 새로운 이미지가 교차한다. 감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필름시대사랑>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전작들을 이 영화에서 새롭게 참조하고 콜라주한다. 박해일의 <살인의 추억>(2003)과 문소리의 <박하사탕>(1999), 안성기의 <화려한 휴가>(2007) 등의 이미지는 무성영화 시대의 간자막 방식으로 이 영화에서 재편된다.

그러한 실험은 이번 영화 <춘몽>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우리는 수색동을 하릴없이 배회하는 네 청년의 모습을 이미 다른 영화에서 목도한 바 있다. <푸른 강은 흘러라>(2008)에서 해맑은 조선족 여학생이었던 한예리와 <무산일기>(2010)의 탈북자 박정범, <똥파리>(2008)의 건달 양익준과 <용서받지 못한 자>(2005)의 고문관이었던 윤종빈의 캐릭터를 이 영화는 마치 후일담인 양 한 텍스트로 소환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영화의 여러 층위가 겹쳐지고 반복된다. 영화와 영화, 꿈과 영화, 현실과 영화에 관한 규정되지 않은 확장과 해석의 가능성을 그는 제안하고 싶어 한다.

장률 감독이 네명의 캐릭터가 한명일 수도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이 영화 <춘몽>은 <풍경>과 <경주> 그리고 <필름시대사랑>과 더불어 한편의 영화로 완성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를테면 <춘몽>은 <풍경>의 극영화 버전이고 동시에 <경주>의 수색동 버전이다. <경주>와 <춘몽>은 표면적으로 정념의 영화들이다. <경주>에서 한 남자가 경주에서 그곳의 ‘여신’으로 불리는 한 여자를 만나 하룻밤을 보내는 이야기였던 것처럼 이 영화 <춘몽> 역시 세 남자가 한 여자를 두고 벌이는 음란한 욕망에 관한 영화이자 역설적으로 동시에 그녀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순수한 대상으로 숭배하는 영화이기도 하다(장률 감독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이 지니는 기이한 이중성. 정념의 대상이자 순수함의 상징). 그러나 동시에 두 영화 모두 표면적인 로맨스 아래 본질적으로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공간에 새겨넣는 영화이며,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우연적이고도 기이한 숙명적인 세계에 관한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점술가에 의해 운명이 예정된 인물들이 등장하고, 종종 등장인물들에 의해 언급되는 ‘운’이라는 요소는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며, 금지된 곳에 오르는 영화(경주의 무덤과 수색의 변전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필름시대사랑>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화가 어떻게 현실로부터 탈주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는지 또 혹은 이전에 축적된 영화적 유산들이 새로운 영화에서 어떻게 되살아올 수 있는지, 실험하고 확인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장률 감독의 초기 필모그래피들은 영화학계에서 디아스포라, 경계, 주변인, 정체성, 유목이라는 키워드들로 읽혀왔다. 중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조선족의 정체성은 중국에서도 어쩌면 그가 지금 작업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계속 낯선 이방인의 지위를 부여해왔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키워드들은 한국에서 작업했던 작품들 속에서 여전히 관철되어 있으며, <춘몽>은 상암이라는 도시 공간에 대비되는 수색의 풍경, 어쩌면 감독의 고향 이미지와 가장 닮아 있는 공간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하고 담아내려는 향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흥미로운 점은 확실히 <풍경> 이후,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자의식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실험된다는 점이다. <춘몽>은 현대 서울 도식 공간에 구성된 그의 고향 이미지-그리움에 대한 정서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근작 네편의 영화와 더불어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시를 쓸 수 있는지, 꿈을 꿀 수 있는지…)에 대해 실험하고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춘몽>은 장률 감독 본인의 가장 내밀한 백일몽-춘몽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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