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백>을 외부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본 사람일 것이다. 후반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아 최승호 감독이 직접 내레이션을 하는 가운데 1차 편집본을 뉴스타파 사무실에서 봤다. 최승호 감독뿐만 아니라 정재홍 작가를 비롯한 스탭들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내 반응을 기다렸다. <자백>을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하고 싶었던 그들은 몇몇 영화계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한국의 영화제에서는 틀기 어려울 것이니 해외 영화제에서 먼저 상영한 후 국내 개봉을 꾀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올해 초 상황은 그랬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수석 프로그래머 자격으로 <자백>을 먼저 본 입장에서 나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사가 끝난 후 나는 간단히 말했다. “재미있는데요. 전주에서 상영하시죠.” 최승호 감독의 입이 벌어졌다. “아, 그렇습니까? 하하하.”
실제로 이 다큐멘터리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감독이 주인공이 되어 권력기관의 문을 끊임없이 일상적으로 두드리는 강인함이 경직된 권력자와 하수인들의 태도와 대비되면서 분노와 유머를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어떤 상황에서도 방송용 멘트를 칠 때처럼 살짝 높은 톤으로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최승호 감독의 모습은 해방감을 준다. <자백>의 화면 안에서 그는 서슴없이 현장으로 달려가 카메라 앞에서 발언해야 할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만족스러운 답은 돌아오지 않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때로 사건의 총지휘자들에게 사과할 의향은 없느냐고 책임을 추궁한다. 국가권력 기관에 의한 간첩조작이라는 사건들이 분명히 일어났으나 그것을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황망한 상황에 대해 가차 없이 관련된 자들을 찾아가 책임을 묻고 따지는 최승호를 보며 지난 몇년간 이렇게 당당하게 자기 역할을 하는 저널리스트가 있었다는 것에 우리는 어떤 극영화의 영웅 주인공보다 깊은 일체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낀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인과응보의 규율을 담아내는 덕분에 동시대의 다른 상업영화 못지않은 카타르시스를 준다.
집요하게 버텨내고 악착같이 쫓다
그런데 <자백>은 탐사 저널리즘의 재미와 가치에 머무는 작품이 아니었다. 나중에 나는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이 다큐멘터리를 보며 큰 화면을 당당하게 견뎌낼 뿐만 아니라 큰 화면 내에서 거대한 이미지의 잔상을 남기고 있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최승호와 그의 촬영 스탭은 그들이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이 영화가 저널리즘의 기록 수준을 넘어 상당한 감동을 주는 영화적 성취를 이뤄내는 지점으로 나아갔다. 방송국 PD 출신의 최승호는 극장용 다큐멘터리가 뭔지 모르고 이 영화를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진실을 건져내려는 그의 간절한 태도가 이 영화에 예외적으로 비범한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 점을 (홍상수의 영화를 주로 촬영했던) 촬영감독 박홍렬과 토론하면서 다시 깨우쳤는데 그는 <아수라>에 관한 내 비평(<씨네21> 1076호)에 동의하면서 뜻밖의 견해를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자백>은 <아수라>와 서로 다른 지점에서 근래의 한국영화들이 해내지 못하는 걸 해낸 업적이 있는 영화다. 대다수 한국영화가 소재와 스토리를 통해 당대의 한국 사회에 저항하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자본에 종속적인 이미지와 태도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아수라>에서 광각으로 잡은 수많은 정우성의 클로즈업과 바스트숏은, 다른 소재와 이야기를 보는 것 같지만 결국은 같은 이미지를 보게 만드는 다른 한국영화들과 다른 저항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자본에 길들여진, 다르게 말하면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인물숏이 아니다. 광각으로 인물의 얼굴과 공간을 함께 담아내는 거리감과 시간은 어떤 태도를 갖고 어떤 이미지로 저항할 것인가에 관한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고 박홍렬은 말했다.
<자백>도 <아수라>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미지로 저항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수많은 흔적을 새기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에 비하면 대다수 한국의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는 훨씬 더 비겁하게 뒤로 물러서고 있다. 최승호 감독은 그 자신의 영화를 만드는 태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화면으로 웅변한다. 사소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국정원 합동조사센터 정문에서 버티는 카메라, 검사의 사과를 받으려는 카메라, 누구나 다 아는 김기춘을 만나 정중하게 끝까지 사과를 요구하는 장면, 이런 장면들에서 최승호는 흔들리지 않고 집요하게 버틴다. 그의 집요함을 따라 카메라를 든 그의 취재 스탭들도 카메라를 놓지 않고 있다. <아수라>에서 정우성의 클로즈업을 그 뒤 공간과 함께 잡아내는 카메라의 거리감을 원했던 감독의 의지와 마찬가지로 이 다큐멘터리에서도 감독의 의지가 없었으면 실세 권력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기는 어려운 것이다.
영화 속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향해 최승호가 심경을 묻는 장면에서 킬킬대며 웃는 것은 쉽다. 권력의 장막 뒤에서 모든 걸 지휘했던 그들이 도망치듯 카메라를 피해다니는 것과 그들을 악착같이 쫓으며 말 한마디 얻어내려고 하는 최승호의 집요함은 우리를 웃게 만든다. 그 장면들이 끝날 때 즈음 우리는 더이상 웃지 못하게 된다. 카메라를 피해 우산으로 얼굴을 가렸던 원세훈은 취재 스탭을 비웃고 김기춘은 중앙정보부 시절 조작했던 간첩사건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고 완강하게 거듭 부인한다. 이들의 모습은 웃음과 슬픔과 분노 등의 감정을 넘어서는 망연자실함을 던져주는데 그것에 가장 가까운 감정이라면 공포다. 이 영화를 다시 볼 때 나는 이 장면들에서 다시 웃을 수 없었고 장면 내내 견디기 힘든, 최승호가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취재 상황의 연장에서 대하는 그 상황을 견디기 힘든 모멸감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최고 권력자부터 그에게 복무하는 말단 관료에 이르기까지 질문을 받아주지 않는 상대는 이 나라에 널려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더라도 그들은 끝까지 강자의 우월한 여유를 잃지 않는다.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최승호의 최재진과 몸싸움을 벌이는 원세훈 일행과 공항 로비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조용히 침묵을 지키는 김기춘과 그의 부인의 대응방식은 다르지만 그들이 그들의 행적을 부인하고 사과하지 않으며 동요하지 않는 것은 같다. 이 항상적인 부동성이 그들 권력의 본질이며 최승호의 카메라는 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무기력할 터인데 전혀 굴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서 최승호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질문한다.
소급적 효과를 주는 ‘정감 이미지’
이는 최승호와 그의 스탭들이 화면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실에 대한 간절함을 희구하는 태도이다. 이 간절한 태도는 <자백>에 영화적인 공기와 시적 응집력이 생기는 컷의 배치를 가능하게 해준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최승호는 국정원에서 간첩혐의로 심문을 받던 도중 자살한 탈북자 한준식의 딸과 어렵게 통화하는 데 성공하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알려야 하는 최승호의 입장과 그 소식을 들어야 하는 북한에 사는 딸의 입장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가혹하다. 최승호는 한준식의 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면서 동시에 한준식이 북한을 드나들었다는 국정원의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딸은 진실을 알려준다. 이것으로 최승호의 저널리스트로서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동시에 그는 한준식의 딸에게 아버지의 기일을 알려주면서 애도와 위로를 표해야 하는 인간적으로 고통스런 입장에 처한다.
이 장면에서 통화가 끊기고 화면은 최승호의 얼굴을 보여주는게 아니라 북한과 중국 국경 지대의 얼어붙은 강을 낮은 앵글로 보여준다. 앞서 인용한 박홍렬과의 대화에서 그는 이 장면이 다소 과장하자면 오즈 야스지로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필로숏’과 비슷한 충격을 준다고 말했다.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문득 정원에 핀 꽃과 나무를 보여주거나 방 안 구석에 놓인 꽃병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오즈의 인서트 화면 효과는 그때까지 인물들이 처했던 정서적 상황을 공감각적으로 확산하는 충격을 준다. <자백>의 이 장면에서 얼어붙은 강의 이미지는 대다수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쓰는 인서트 화면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다시 박홍렬의 말에 따르면 이 인서트는 질 들뢰즈가 말하는 ‘정감 이미지’의 실례다. 그 화면은 강의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관객이 한번도 보지 못한 딸의 얼굴을, 죽은 한준식의 집을, 딸을 두고 온 아버지 한준식의 심정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딸의 감정을, 무서운 국정원 독방에서 딸을 그리워하던 아버지의 감정을, 그리고 이제는 그가 무명인으로서 죽어 있는 무덤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이런 정감 이미지의 효과는 즉각적인 것이 아니라 소급적이다. 우리가 반복해서 떠올릴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미학적 여백의 창출은 최승호라는 감독이 알고 한 게 아니라 그의 태도가 불러온 컷의 효과일 것이다. 박홍렬은 이 장면을 언급하면서 “좋은 영화는 열심히 준비하고 고민한 태도로 우연을 기다리고 필연을 만나는 순간의 기록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동의하는 나는 그외의 것을 덧붙이고 싶은데,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렇게 끈질기게 탐문하며 포착된 예기치 않은 순간들이 꽤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김기춘이 기획한 재일동포 간첩단 조작사건의 희생자 중 한명인 김승효는 당시 고문의 후유증으로 반쯤 정신을 놓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오랜만에 그를 찾아온 친구들도 기억하지 못했던 그가 조금씩 자신의 과거를 얘기하는 모습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럽다. 카메라는 여기서 어떤 배우도 연기하지 못할, 어떤 최고의 분장사도 꾸미지 못할 한 파괴 당한 영혼의 초상을 기록하는데 그가 하는 어떤 말보다 그가 감당하고 있는 고통의 무게는 그의 얼굴과 행동에 다 드러난다.
피해자들을 위한 진실의 애도 스토리
<자백>은 가해자들이 부정하거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건의 희생자들의 모습과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시대의 공기를 신중하게 포착한다. 첩보영화를 보는 것처럼 국경을 넘나들며 서울시청 공무원이었던 유우성의 간첩조작사건의 팩트를 취재하는 카메라는 진실의 맥락이 드러나는 사건들의 정황을 따라가면서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반되는 현재의 모습을 단단하게 재배치한다. 격한 분노가 있지만 그 분노를 다스리는 맥락적 구성을 통해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국정원과 그 전신인 중앙정보부 구성원들의 비윤리성을 침착한 활달함으로 극복한다. 절대로 굴하지 않는 신화 속의 다윗처럼 무수하게 깨지고 제지당하는 상황에서도 최승호의 카메라는 불굴의 낙천성으로 권력자들에게 대드는 가운데 피해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가끔씩 호흡을 늦추며 우리에게 묻는다. 이것에 차분히 공감하시겠습니까, 분노하는 동시에 애도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 격함을 감춘 차분한 이 태도는 한국적 정동의 문법을 만들어내는 성취일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비롯한 부조리한 비극을 애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재구성할 수 있는 스토리가 필요하다. 명시적으로 가해자인 국가권력 기관이 있는데 그 기관의 종사자들이 오랫동안 가해를 부정하는 사이에 한국 사회에는 그 가해자들이 행한 비극의 피해자들을 애도할 수 있는 스토리가 없어졌다. 그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또는 왜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빠져야 했는지 그들의 스토리를 우리가 구성할 수 없다면 애도는 불가능하다. 이제는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무기력한 세월호 비극을 비롯해 우리는 비극의 희생자들을 위해 애도할 진실의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최승호의 다큐멘터리 <자백>은 직접적으로는 국정원의 간첩조작사건의 이면을 명쾌하게 파헤친 저널리즘의 개가를 증명하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이 사회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피해자들을 위한 진실의 애도 스토리로서 둔중한 존재감을 지닌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진실의 애도 스토리가 필요하고 최승호는 앞으로 <자백> 이상의 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