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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의 영화비평] 남북분단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남한과 북한은 이데올로기로 나뉘어졌다. 남북문제를 영화화할때 이데올로기적인 접근을 하는 이유다. 직접 메가폰을 쥐진 않았지만 김기덕은 이미 몇번에 걸쳐 남한과 북한에 관한 영화-<풍산개>(2011), <붉은가족>(2012)- 를 제작해왔다. 만약 직접 연출한 <야생동물 보호구역>(1997), <해안선>(2002)까지 한 소재로 본다면 김기덕 영화의 남북에 대한 고민은 더 긴 역사를 지닌다.

당연한 일임에도 동시대의 대중영화 감독들이 대부분 도외시하는 남북의 문제에 김기덕은 왜 그렇게 천착하는 것일까? 그가 직접 쓴 노트를 읽어보면 남북은 그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다. 그는 영화의 제목처럼 단순한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 <풍산개>에서 주인공 풍산(윤계상)이 휴전선을 넘는 방식처럼 말이다. 긴장대 하나로 그는 귀신같이 분계선 위를 난다. <붉은가족>에서는 남파 간첩들로 이뤄진 가족이 등장한다. 나란히 이웃한 남쪽 가족과 북쪽 가족은 쌍둥이처럼 수많은 문제를 품고 있지만, 영화는 그들을 천연덕스럽게 붙여둔다. 남북의 비극을 극대로 느끼게 해 해법을 찾는 것, 그게 김기덕식 인간의 길이다. <그물>도 그러하다. 이데올로기로 똘똘 뭉친 집단이 아래위에서 주인공 남철우(류승범)를 괴롭히지만 영화는 이데올로기 자체에 관심이 없다. 김기덕에게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의 영화를 보노라면, 예술가는 개념이 아니라 감각을 생성하고 드러내는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북녘의 한 집. 철우는 고기 망을 걷으러 이른 새벽에 깨어난다. 조용히 밥 먹는 그를 보던 아내가 멋쩍게 웃는다. 철우가 “와 웃는데?”라고 묻자 그녀는 “당신은 새벽에가 제일 멋있어 보입네다”라고 말한다. 철우의 반응은 자연스럽다. 자기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확인하겠다는 듯이 밥을 먹다 그녀를 슬며시 덮친다. 새벽부터 섹스에 몰두하는 부모 보기가 민망한지 어린 딸은 이불을 머리 위로 덮어버리고, 카메라는 아이의 반응까지 놓치지 않고 담는다. 나는 도입부에 이 시퀀스를 배치한 김기덕의 의도가 궁금했다. 실수로 남에 왔다 생고생을 한 후 북으로 돌아가는 남자의 이야기로 소개받은 <그물>에서, 그것도 영화 맨앞에 이 장면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곧바로 떠올린 건 <아멘>(2011)이었다. 헤어진 남자의 흔적을 찾아 유럽을 떠도는 여성에게 방독면을 쓴 남자(김기덕이 직접 연기했다)가 접근한다. 그리고 그녀를 범한다. 구원을 바라는 제목을 지닌 영화에서, 그리고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영화에서 말이다. 나는 비릿한 냄새를 두 영화에서 맡았다.

유토피아의 악몽

초소를 통과한 철우는 목숨처럼 아끼는 배를 이끌고 임진강으로 나선다. 여기서 또 한번, 이상한 장면이 나온다. 무슨 이유인지 철우의 배는 북과 남을 나눈 경계선에 점점 접근한다(나중에 그는 그물이 스크루에 감겼다고 설명한다). 북쪽 경비병은 그가 고의로 남으로 향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차마 총을 쏘지 못한다. 점점 경계선 너머로 나아가던 배는, 다음 숏에서 갑자기 남쪽 초소 앞에 도착해 있다. 저예산영화에서 모든 과정을 다 촬영하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고, 구차한 전개를 축약해 보여줬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장면에서 느낀 이미지는, 흡사 <솔라리스>(1972) 같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SF영화에서 인물이 물의 형상 속에 공간 이동을 할 때의 그것 같았다. 조사 과정에서 철우는 사고일 뿐 남쪽으로 올 의향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도 나처럼 다른 땅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을 테고 한번쯤 다른 땅을 밟는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보트가 남쪽에 도착할 때의 SF 같은 상황 때문일까, 나는 이후의 이야기가 철우의 꿈으로 읽혔다. 좀더 과장한다면 <그물> 전체가 잘못된 행성에 도착한 인간을 다룬 SF영화로 보인다. 그만큼 남과 북은 낯선 공간인 게 사실 아닌가. 나에게 북은 솔라리스보다 더 미스터리한 행성이다.

갈 수 없는 땅에 대한 꿈은 어느 정도 유토피아적인 상상과 결합되기 마련이다. 금지된 땅이라는 점에서 낭만적 환상은 더욱 배가된다. 남북 체제가 상대방을 적대적으로 비방하는 현실 아래 살고 있다지만, 진실 너머에 사는 민중이라면 제각기의 상상을 하게 된다. 철우가 남쪽에 도착한 사연을 그의 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가 남한 땅의 모습을 절대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할지라도, 그가 마음속으로 남한 땅에 전혀 궁금증을 느끼지 않았을 리 없다. 궁금증이 풀리기도 전에 철우의 꿈은 완벽한 악몽임이 드러난다. 남쪽 조사관은 철우가 서울의 풍경을 목격할 경우 전향할 거라고 낙관한다. 어처구니없는 자신감이다. 그들은 그를 시내로 끌어내 길을 잃게 만들고 짐승을 보듯 관찰한다. 그들이 최고의 무기라고 자부하는 건 자본주의의 풍경이다. 쇼윈도에 전시된 자본주의의 산물들이 그의 눈을 멀게 만들 거라 착각한다. 시각이 포착한 대상이 자신의 것이라고 꿈꾸게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이쪽 유토피아는 자본주의의 땅이며 욕망을 채우려면 무조건 돈이 필요한 땅이다. 욕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자와 그것에 돈을 지불해야 하는 자가 분리된 데서 비극이 시작되는 땅이다. 그가 밤거리에서 만난 여성은 몸을 팔면서도 삶을 유지하기 힘든 사람이다. 자유로운 땅에서 왜 힘들게 사느냐고 묻자, 그녀는 “돈이 없으니 몸이라고 팔아야죠, 사는게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 죽고 싶어요”라고 되받는다. 철우는 생각했을 것이다. 저 쇼윈도 속에 전시된 것들과 세상에서 다섯 번째로 높다는 빌딩이 도대체 내 삶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폭력의 냄새

유토피아의 상(像)이 전혀 다른 사람이 만났을 때 대화는 끊어진다. 남쪽 조사기관은 마음을 돌리지 않는 철우를 이해하지 못한다. 탈북자들이 드글거리는 시대에 이 남자는 왜 다시 북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까. 그를 불쌍히 여기는 남쪽 기관의 부장은 “독재 국가로 돌려보낼 수는 없잖아?”라고 여러 차례 반문한다. 그의 눈에 북쪽은 자유를 박탈당해 굶주림에 지쳤어도 표현할 수 없는 땅이다. 그런데 자유의 땅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 그는 자기 기관의 조사원들이 철우에게 가하는 폭력에는 눈을 감는다. 그들이 철우를 자유의 땅으로 귀순하게 만들려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철우는 진짜 악몽을 꾸게 된다. 재떨이로 인간의 얼굴을 때리는 조사관의 폭력적 태도도 한몫하지만 그게 폭력성을 대표하는 건 아니다. 남쪽 요원들은 철우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거나 믿지 않는 척한다. 그리고 그에게 간첩이라는 거짓 진실을 만들어 입히려고 한다.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 주먹이 얼굴로 날아오고 폭언이 쏟아지고 잠을 재우지 않는다.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게 만드는 지긋지긋한 폭력성은 어딜 가나 숨 쉬면서 그를 괴롭힌다. 그런데 말이다, <그물>은 김기덕의 예전 영화에서 폭력을 전시하던 방향과 사뭇 다르게 폭력을 그린다.

폭력의 엘레지란 점에서 <일대일>(2014)은 김기덕 영화의 한 정점이다. 한국 사회의 병폐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이 영화에서 김기덕은 폭력의 화신인 그림자리더(마동석)를 신적 위치에 둔다. 분노하고 증오하고 복수했기에 실패했던 그는 그 고리를 끊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종교적 제의를 결말부에 배치해 <일대일>은 거의 폭력에 대한 성찰에 이른다. 자기희생을 받아들이며 숭고성을 득하는 그를 통해 김기덕은 자기 영화에서 폭력이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못이 박힌 방망이에서 서울이라는 땅 위로 뚝뚝 떨어지는 피의 소리와 선명한 붉은 빛깔로 그것은 또렷이 인지된다. <일대일>을 전후한 그의 영화사 ‘김기덕필름’의 영화- <신의 선물>(2013), <스톱>(2015)- 가 폭력 자체보다 ‘폭력 앞의 삶’으로 눈길을 돌린 건 우연이 아닌 것 같다(물론 지금까지의 경험상 김기덕의 영화가 향후 어디로 튈지 단언할 수는 없다). 그는 좀더 거대한 폭력적 시스템 앞에서 헐떡이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의 영화에서 폭력은 그렇게 한번 죽었지만, 폭력은 얄궂게도 죽음으로 우리 곁에 상존한다. 그런 까닭에 폭력은 고통을 부여하는 것에 더해 죽음의 향기를 풍긴다. 자연스레 통증이 아니라 체취로 표현된다.

<그물>에서 폭력을 상징하는 두 존재인 남과 북의 두 조사관은 죽음의 냄새를 흘린다. 남쪽 조사관의 입에서 풍기는 썩은내와 그의 충치가 사탕을 으깨 씹을 때 나는 비릿한 냄새, 그리고 북쪽 조사관이 똥통에 빠진 돈을 탐욕스럽게 만질 때 그의 손에 밴 똥내가 바로 그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자신이 휘두르는 폭력이죽음의 냄새를 내뿜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한 사회의 작가들은 비슷한 생각을 공유한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신동일의 <컴, 투게더>(2016)도 비슷한 설정을 보여준다. 한 가족의 가장인 남자(임형국)는 어느 날부터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한다. 찌개에 코를 담가봐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 날생선과 멸치볶음도 그의 코를 열지 못하자 그는 그것들을 버린다. 신동일은 썩은 내가 진동하는 사회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인간을 그렇게 묘사한다.

강에서 죽다

철우는 마침내 돌아온다. 그는 이데올로기나 물질보다 가족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기에 망설임 없이 귀환을 원했다. 갈망했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으니 그는 성공한 것일까? 김기덕은 그의 실패를 도입부의 반복으로 표현한다. 초주검이 되어 돌아온 철우는 마냥 누워 있다. 보다 못한 아내는 가슴을 열어 남편의 얼굴을 갖다대본다. 그가 꿈쩍하지 않자 그의 아랫도리를 내려 자지를 빤다. 말없이 살았던 그녀가 소리내 울기 시작하고 그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린다. 이번에는 어린 딸도 눈을 돌리지 않고 슬픈 풍경을 바라본다. 그의 몸은 돌아왔으나 죽음의 손길이 한번 닿은 몸은 그렇게 기능을 상실한 뒤였다. 김기덕 영화에서 삶은 심장의 박동이 아닌 심장의 감각 여부에 달려 있다. 그는 잔혹하게도 감각을 상실한 자의 죽음을 선언한다.

<그물>에서 철우는 북쪽 초소를 두번 통과한다. 처음 통과했을때, 그곳은 꿈으로의 이탈을 허락하는 해방 공간으로의 출입구였다. 귀환 후 다시 찾은 초소는 그의 출입을 불허한다. 살아 있는 철우가 출입을 허락받지 못한다는 말은, 즉 죽어야만 그의 출입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게 해서 한때 삶의 공간이었던 초소와 강은 죽음의 공간으로 화한다. 불현듯 초소는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경비병들은 죽음의 강을 건널 수 있게끔 허가증을 발부하는 자들처럼 보인다. 그리고 상상의 공간에서조차 유토피아를 꿈꾸지 못하게 된 철우는 실제적인 의미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두번의 총소리에 이어 그는 쓰러지고, 그가 목숨처럼 여겼던 배는 관이 된다. 아마도 차가운 물의 감각과 만날 즈음 철우는 알 것이다, 언제나 그는 그의 부재였음을. 분단 이후의 시간을 사는 남과 북의 민중에 대한 김기덕의 생각은 그러하다. 보트가 남쪽에 도착할 때의 SF 같은 상황 때문일까, 나는 이후의 이야기가 철우의 꿈으로 읽혔다. 좀더 과장한다면 <그물> 전체가 잘못된 행성에 도착한 인간을 다룬 SF영화로 보인다. 그만큼 남과 북은 낯선 공간인 게 사실 아닌가. 나에게 북은 솔라리스보다 더 미스터리한 행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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