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프리드 히치콕은 프랑수아 트뤼포와의 대화에서 <싸이코>가 완벽한 영화는 아니라고 했다. 주제는 불쾌하고, 인물은 특징도 없이 왜소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히치콕은 이 영화에 만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관객에게 조바심을 느끼게 하고, 공포에 떨게 했으며, 비명을 지르게 했다는 점에서 <싸이코>(1960)가 관객에게 ‘정서적 영향’을 주었으며, 이 점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것이 순수영화(pure film)의 힘이라고 덧붙였다. 이소현 감독의 <할머니의 먼 집>을 보면서 불현듯 위의 대화가 떠오른 이유는 단순하게도 이 영화를 보고 취한 나의 행동 때문이었다. 극장을 나와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참으로 오랜만의 통화였다. 그리고 확언컨대 이 영화를 본 손녀, 손자의 수만큼 세상의 할머니들은 잠시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것, 잠시 용기를 내 전화번호를 누른다는 것, 궁금치도 않았던 안부를 새삼 묻는다는 것, ‘내 강아지’라는 한마디에 일순 모든 것이 부끄러워진다는 것, 전화를 끊고 다음의 통화를 결심한다는 것, 이 일련의 행동은 그 당시 <싸이코>를 본 관객이 받은 정서적 영향과 다른 것일까. 멀어도 너무 먼 히치콕의 말을 떠올린 것은 이 때문이다.
셀프 카메라 다큐의 오류를 피하려는 노력
말할 것도 없이, <싸이코>와 <할머니의 먼 집>을 본 관객의 정서의 질감과 시차의 폭은 크다. 히치콕이 말하는 순수영화의 힘은 무성영화의 힘이다. 영화에 사운드가 도입되면서 이미지가 경시되는 것을 아쉬워했던 히치콕은 영화의 본질은 이미지와 그 구성에 있다고 믿으며, 무성영화에서 익혔던 기교를 버리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실천하고자 했던 순수영화의 힘이란, 관객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제대로 만든 영화라면 일본 관객이든 인도 관객이든 같은 순간에 ‘비명’을 질러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한 ‘비명’이란 은유가 아니다. 비명과 같은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 그 반응의 조각들을 모아 관객에게 정서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영화감독이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히치콕의 말을 더듬으면서 지금의 영화와 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을 떠올리면 흥미롭다. 관객과 친밀함을 유지하려는 감독의 노력은 여전히 변함없으면서도, 아니 더 강화되고 있음에도 지금의 관객은 더이상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영화가 주는 영향이란, 골방의 시네필에게나 어울리는 세례 의식이 되어 버렸다 해도 우스갯소리가 아닐 것이다.
관객에게 친밀하게 다가가려는 감독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화로부터 더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 요즘의 관객에게 이소현 감독의 <할머니의 먼 집>은 정서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각자의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고(심지어 고인이 된 할머니일지라도) 극장을 나와 전화를 하게 만든다. 영화관을 나오는 동시에 영화를 잊어버리기 일쑤인 우리에게 이 일련의 행동이 사소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욱 흥미로운 건 이 영화의 형식이 관객과 친밀함을 유지하려 부단히 애쓰는 극영화가 아닌, 사적 다큐멘터리는 점이다. 이소현 감독이 친밀함을 유지하려 애쓰는 대상은 관객이 아니다. 감독의 할머니다. 그럼에도 관객에게 끼치는 이 정서적 영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사적 다큐멘터리로서 새롭다고는 할 수 없다.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고, 갖가지 이름으로 대체되지만 결국엔 ‘불안세대’인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질문의 대상을 ‘밖’이 아니라 ‘안’에서 찾기 시작했다. ‘나와 나의 가족’이라는 대상이 사적 다큐멘터리의 주요한 소재가 되었다는 것은 지난 몇년간 개봉된 다큐의 경향만으로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할머니의 먼 집>은 소재 면에서나 기술적 완성도에 무심하거나 혹은 어느 정도 면죄부를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 거친 만듦새의 부족함까지, 사적 다큐멘터리의 주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셀프 카메라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사적 다큐멘터리’로 구분하는 것은 중요할 것 같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끼치는 정서적 영향의 정체는 이 두 가지를 분리하여 보는 데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먼 집>은 셀프 카메라 다큐멘터리가 범하기 가장 쉬운 오류를 의식하며 그것을 피하려 애쓴다. 셀프 카메라 다큐멘터리가 범하기 가장 쉬운 오류란 자신에게 파고들어 질문의 방향을 밖으로 던지는 시도조차 잊고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다는점일 것이다. 촬영의 방향을 열어둔다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고유한 특성일 텐데 셀프 카메라 다큐멘터리들이 자칫 자신의 안으로 쉽게 파고들어가는 이유란 이 방향감각을 잃는 데서 온다. 자신을 향한 카메라가 내면에 안착되어 우울과 자기연민이라는 감정적 토로의 창구로 쓰인다면 사적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셀프 카메라 다큐멘터리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감정을 잘라내는 숏들의 의미
단명하게도 사담(私談)을 다루는 것이 사적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할머니의 먼 집>은 셀프 카메라 다큐멘터리가 범하기 쉬운, 나와 나의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자신의 안으로, 할머니라는 대상 안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을 견제한다. “아흔셋, 나의 사랑하는 할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다”라는 로그라인은 홍보를 목적으로 한 은유적 표현이 아니다. 이소현 감독이 카메라를 든 동기의 발언일 뿐이다. 관객은 로그라인으로 인해 영화에 스며 있을 것 같은 동정과 연민을 짐작하지만 영화는 그 방향을 거스른다. 이런 장면이 있다. 할머니의 손녀인 이소현 감독과 할머니의 딸인 감독의 엄마는 할머니가 계신 화순으로 내려간다. 오랜만에 본 할머니는 홀로 지내다 넘어져 이곳저곳이 상처투성이인데, 그것을 본 엄마는 너무 속이 상하고, 이소현 감독은 엄마 앞으로 카메라를 든다. 엄마의 격정적인 감정은 이소현 감독에게 카메라를 들게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대상을 ‘잡는’ 방식이 아니라 그 대상을 ‘대하는’ 방식으로서의 숏의 편집이다. “당신 때문에 자식들이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몰라”라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먹먹함이 남아 있다. 주름진 눈꼬리에도 눈물 자국이 남아 있는데, 이 숏을 본 관객은 엄마가 감정을 토로하기 전인지 후인지 헷갈린다. 하지만 이 숏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감정을 토로한 후의 숏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엄마는 초록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리고 티셔츠의 목덜미 부분에 미처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빗방울처럼 찍혀 있다. 이 숏이 보여주지 않는 몇초 전, 엄마는 울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옷으로 떨어졌었다. 감정의 토로가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소현 감독은 이것을 자른다. 편집이라는 ‘숏의 물리적 자름’은 자신이 보고 있는 대상에 대한 ‘감정의 자름’이 된다. 이 감정의 자름이란 대상을 견제하려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감정을 잘라내는 숏들은 영화 내내 반복된다. 이 자름의 공식은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는 이소현 감독에게 엄격하게 대입된다. 할머니 옆에 앉아 “할머니 내가 맨날 온디 왜 죽고 싶어 해?”라고 말하며, 운 적 없는 아이처럼 시치미 떼는 장면은 자신의 내면에 파고드는, 할머니에게 파고드는 자신을 떼어놓느라 고군분투한 흔적이다. <할머니의 먼 집>은 이런 흔적들의 투성이다.
이소현 감독이 자신을 견제하며 만들어놓은 흔적의 자리에 놓이는 건 다름 아닌 관객이다. 이소현 감독이 ‘잘라’낸 자리를 이어 받아 ‘덧붙이는’ 것은 결국 관객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 몫이란 그저 정서적 영향을 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