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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문3: 최후의 대결>(2015, 이하 <엽문3>)로 마침내 <엽문> 시리즈는 3부작의 마침표를 찍었다. 엽위신의 <엽문>(2008)은 홍콩 무술영화의 역사에 중요한 변곡점을 그은 작품이었다. 그 중요성은 액션영화의 트렌드가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을 파악해야 이해될 수 있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1967)나 <소림 36방>(1978)과 같은 쇼브러더스 무협영화 이래 무술안무의 주종을 이룬 건 황비홍의 무술로 유명한 홍가권(洪家拳)이었다. 광둥 남파권법의 일종으로 넓은 보폭에 큰 동작을 특징으로 삼는 장교대마(長橋大馬)의 홍가권은 박력을 강조해야 하는 영화적 표현의 측면에서 각광받았다. 더군다나 유가량, 유가휘 등 무술 스턴트팀 상당수가 홍가권 수련자 출신으로 채워져 있었던 바, 홍가권 중심의 안무가 유행하는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하지만 영화 무술의 패러다임이 폭력의 현실성을 살리는 실전 무술 중심의 안무로
[조재휘의 영화비평] 홍콩 액션영화의 한 시대의 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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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홧발에 짓밟히는 순수한 소녀, 악마와도 같은 일본놈들, 그리고 무기력한 조선의 아버지와 오빠. <귀향>은 염려했던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다. 개봉 전부터 SNS를 통해 논란이 되었던 위안소에서의 집단 강간 장면을 비롯한 일본군과 ‘위안부’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는 “폭력을, 그리고 그 역사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진부한 질문을 다시 논의의 장에 올려놓았다. 일본인 개개인을 괴물화하지 않는다면, 조선인 개개인을 무기력한 소녀로 그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역사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일까. <귀향>은 폭력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 폭력이 된다. 그리고 그 폭력에 대한 논의는 피해자 재현 윤리뿐 아니라 ‘우리’를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그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질문들로 이어진다.
폭력, 매혹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것이어야
첫 질문을 던져보자. <귀향>의 선정적인 재현은 ‘피해자 여성’에 대한 또 다른 폭력 아닌가? 물
[손희정의 영화비평] 어떻게 새로운 ‘우리’를 상상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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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이 등장한다. 현실을 빗대어 풍자한다. 모든 (포유)동물들의 평화로운 공존, 그러나 여전히 지배하는 불안과 공포. DNA로 대표되는 생물학적 속성은 사회화 과정으로 제어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두려움을 유지하고 증폭시키는 고정관념과 편견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일까? 나아가 모두가 저마다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받으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이상적 이념을 실현하는 것은 개인의 몫인가, 집단의 몫인가? 우리는 그것을 이행할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혹은 여전히 그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달콤한 청사진에 불과한 것인가? <주토피아>에 대한 언급은 이처럼 간결히 정리할 수 있다. 적어도 애니메이션영화 자체의 즐거움을 거세한다면 말이다. 제작사가 디즈니라면 평가의 방향성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 글은 그러한 무한 반복 재생산에서 벗어나보고자 한다. <주토피아>는 꽤나 재밌기 때문이다.
동물, 유토피아 그리
[나호원의 영화비평] 친근하지만 새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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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의 초점이 맥없이 흐려졌다. 2004년 말 동남아 쓰나미 때의 일이다. 당시 4년차 사건기자였던 나는 현지 사정을 알아볼 겨를도 없이 타이 푸껫으로 날아가야 했다. 현장에 도착하니 천혜의 에메랄드빛 바다와 수백구의 익사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눈앞이 뿌예지고 시야가 좁아졌다. 무의식에 이끌리듯 시신 옆 땅바닥 같은 곳에 시선을 두며 취재를 계속했다. 부패가 시작된 익사체는 초록색으로 변하며 부푼다. 체내가스 탓이다. 고온다습한 곳에서 빠른 속도로 빛깔과 부피가 변하면서 심한 악취를 낸다. 사찰마다 임시로 마련된 시신 집합소에는 도리 없이 썩어가는 시체 더미 옆에 새로 들어온 희생자의 몸들이 쌓여갔다. 유족의 신원 확인 전까지는 매장이나 화장을 할 수 없다. 생존자들은 이미 형체를 분간할 수 없게 된 시신들을 하나하나 들춰보며 가족의 생사 여부만이라도 알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당시 쓰나미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23만명이 넘는다.
어떤 여인은 시댁에 알리지 않은 채 친정 부모
[송형국의 영화비평] 가장 정확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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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은 납치, 감금, 성폭행, 출산과 양육이라는 단어들로 구성된 끔찍한 실화에서 모티브를 차용한 에마 도노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은 소재가 안고 있는 폭력의 선정성을 서사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대신 비극을 이겨내고 삶을 온전히 긍정하게 되는 치유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잭의 시점에서 서술이 이루어지는 원작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룸>은 잭의 시점숏과 내레이션을 적극 도입했다. 그런데 이제 막 다섯살 생일을 맞은 잭의 내레이션은 ‘무지한 서술자’였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의 그것과 달리 통찰력 있는 성자의 언술처럼 다가온다. 강인한 엄마와 상처받은 여성 그리고 혼란스러운 딸의 역할까지 아우르는 브리 라슨은 흡사 이 세상에 속한 아이가 아닌 듯 신비로운 잭을 보여준 제이콥 트렘블레이의 모습과 함께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가장 큰 힘이다(그녀의 연기에 화답하듯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는 여우주연상을 선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김지미의 영화비평] 따뜻한 방식으로 탈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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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했던 아도르노의 선언. 우리는 지옥 같던 그곳을 상징화할 언어(또는 재현 형식)를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것이 아우슈비츠 영화 대부분이 실패를 반복하는 이유다. 아우슈비츠는 예술적 행위가 끝내 다다를 수 없는 영원한 ‘공백’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공백은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악행이 낳은 결과다. <사울의 아들>로 그 공백이 메워졌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다. 한편의 영화로 채워질 공백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사울의 아들>은 어금니 꽉 깨물고 그 공백 위를 뚜벅뚜벅 걸으며, 낡디낡은 명제 하나를 되살려낸다.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인식하고 있는 한,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예술’은 언제나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헤겔). 감독 라슬로 네메시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우슈비츠 희생자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 고통의 표현 형식을 고안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죽은
[안시환의 영화비평]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여주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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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전의 이야기
미국이라는 나라가 인류 문명에 기여한 단 한 가지를 꼽으라면 (‘할리우드!’라고 <씨네21> 독자들은 생각하겠지만…) ‘표현의 자유’를 상식과 제도로 정착시켰다는 데 있다. 이게 얼마나 위대한 일이냐면, ‘생각하고 느낀 대로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상식을 제도로 보장하는 일이 (21세기를 16년이나 보낸 지금까지도) 한국에서는 요원하다. 이 분야에 관한 한 대부분의 국가는 여전히 미개한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제일은 미국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전투였고, 무엇보다 공격이었다. 평등이 방어적 권리라면 자유는 공격적 권리다. 자유는 자유의 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그런 결기로 뭉친 이들이 미국 수정헌법 1조에서 저 유명한 ‘표현의 자유’를 선포했고, 그 뒤에 붙은 2조에선 ‘총기 소지의 자유’를 박아두었는데, 내가 파악한 그 논리 구조는 이러하다. “표현의 자유를 모두에게 보장하려고 이 나라를 만든다. 누구도 어떤 이유
[안수찬의 영화비평] 완전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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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을 보고 한때 좋아했던 장이머우의 <영웅: 천하의 시작>(2002, 이하 <영웅>)과 <연인>(2004)을 다시 봤는데 끝까지 보기가 힘들었다. 일단 거기 담긴 세계관과 태도가 전혀 다르다. <자객 섭은낭>은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강호영웅의 행동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장이머우의 영화들은 상투적이다. <영웅>의 마지막 장면은 천하를 위해 주인공이 암살을 포기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개봉 당시에 나는 이 장면을 장이머우가 중국 인민들을 역사상 처음으로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준 공산당 독재를 상징적으로 추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연인>에서 3일을 같이 지낸 남자와 도망치기 위해 3년 동안 애인이었던 남자를 버리는 여자의 선택을, ‘십면매복’이라는 중국어 제목처럼 평생 젊은 시절을 자기 의지로 살지 못했던 장이머우 세대의 자기고백처럼 받아들인 것도 좀 부끄러
[김영진의 영화비평] 섬세한 묘사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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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은 마치 고풍스럽게 세공된 붉은 타일을 길고 가느다란 손으로 하나씩 조심스럽게 이어붙여 만든 우아한 조각품 같다. 모든 조각이 아름다워 어느 한 조각도 쉽게 집어들고 묘사할 수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중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회귀의 테마를 형식, 인물, 소품, 내러티브라는 층위에서 정교하게 구현해내는 정치(精緻)한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싶다.
원작 소설과의 차이점
멜로드라마에는 두 연인을 갈라놓는 장벽이 등장하곤 하는데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테레즈(루니 마라)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그들이 동성을 사랑한다는 점 자체다. 캐롤의 남편 하지(카일 챈들러)가 단적인 예다. 하지는 이혼을 원하는 캐롤을 붙잡기 위해 한편으로 그녀에게 애원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녀의 성적 지향성을 문제 삼아 공동 양육권을 거부하며 그녀에게 무언의 협박을 가한다. 동성애자인 캐롤이 이성애자인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는 기대와 성적 지향성을 도덕
[박소미의 영화비평] 테레즈가 캐롤에게 다가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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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승 가신공주의 명을 받고 고향 위박으로 돌아온 은낭이 어머니 섭전씨와 찻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섭전씨는 가신공주에게 돌려받은 옥결을 은낭에게 전해주며 황실에서 위박으로 시집온 계안의 어머니, 가성공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가 끝나면 건너편에 앉아 있던 은낭이 옥결을 쌌던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숨죽여 울고 있다. 세간의 평처럼 ‘어느 장면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아름다운’ 이 영화에서 이상하게도 은낭이 우는 이 한 장면이 영화가 끝난 한참 뒤에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이 영화엔 세번의 플래시백이 등장한다. 고향집에 돌아온 은낭을 위해 하녀들이 목욕물을 준비하는 장면이 지나가면 (갑자기) 봄볕이 내려앉은 들판에 긴 행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장면이 보인다. 바로 이어지는 욕탕 안 은낭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이것이 은낭의 플래시백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익스트림 롱숏으로 물러앉은 카메라 탓에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다.
[우혜경의 영화비평] 처절하게 아름다운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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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토드 헤인즈는 <캐롤>(2015)의 도입부에서 데이비드 린의 1945년 작품 <밀회>의 도입부를 정확하게 재연한다. <밀회>를 떠올려보자. 기차역 카페 귀퉁이에 알렉(트레버 하워드)과 로라(셀리아 존슨), 두 남녀가 앉아 있다. 우연히 지나가던 여성이 여주인공 로라를 발견하고 다가와 친숙하게 말을 건다. 로라와 남자가 약간 당황해 하지만 그런 그들의 표정에 숨은 절박함에는 무관심한 듯 여자는 수다를 멈추지 않는다. 그 여정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인 줄 알았더라면 여자는 차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을 깨달은 알렉은 자리를 먼저 뜨면서 로라의 어깨 위로 손을 지그시 얹는다. 그가 떠나고 정신을 잃었던 로라는 기운을 차려 집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교외의 아담한 집에서 자상한 남편과 귀여운 두 아이가 그녀를 반긴다. 로라는 “이곳은 내 집이고 당신은 내 남편이며 내 아이들은 2층
[이용철의 영화비평]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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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감독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숨겨진 부분들에 대해 짐작할 수는 있다. <아버지의 초상>(2015)은 다만 대부분 영화에서 ‘시네마틱한 말하기’라 믿는 ‘시점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해서만 거부한다. 이 점이 이 작품을 독특한 위치로 끌어올린다. 과거 다큐멘터리영화의 감독들이 선호하던 사실적 화면의 취향과 함께, 스테판 브리제는 자신의 영화를 더 미니멀한 것으로 세공해낸다. 이 미니멀한 미장센에 대한 의지는 그의 이전 작품들에서도 찾을 수 있는 특징이다. <마드무아젤 샹봉>(2009)이나 <어 퓨 아워스 오브 스프링>(2012) 등 이전의 연출작들은 주인공의 심리를 3인칭 관점에서 최대한 간소화해 풀어낸다는 점에서 흡사한 리듬감을 지녔다. 하지만 이 전략은 인공적 절제미를 더 강조해 보여준다. 간소화되고, 그래서 아름답다. 사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찾
[이지현의 영화비평] 단순한 확신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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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가렐의 영화에서 음악의 삽입이 종종 난데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음악이 어떤 장면의 시작에 앞서 장면의 성격을 예견하는 표지점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어색한 지점에서 음악이 돌출되는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연인들>(2005)에서 연인의 얼굴 클로즈업 위로 이따금 흘렀다가 멈추길 반복하는 분절된 음악, 혹은 부분적 무성영화라 할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냈다>(1985)에서 영화의 침묵을 찢고 니코의 <All Tomorrows Parties>가 흐르던 장면이 대표적이다. 음악이 흐를 때의 느낌은 마치 장면을 보던 감독이 머릿속에서 불현듯 떠올리고 이것이 영화에 실시간으로 반영되기라도 한 것 같다. 이로 인해 그의 영화 속 음악은 상반된 두 기능을 동시에 취한다. 장면에 갑작스레 끼어들어 몰입을 방해하는 동시에 장면을 어루만지면서 더 깊이 몰입하게 한다.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속 첫 음
[김소희의 영화비평] 권태와 생동의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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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리커트는 월가의 은둔 고수다. 제이미(핀 위트록)와 찰리(존 마가로)는 시골의 초짜다. 친구 사이인 제이미와 찰리는 부모의 차고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소액 투자를 거듭한다. 겨우겨우 약간의 자본을 축적하는 데 성공한다. 두 사람은 월스트리트에서 큰 판에 끼기를 원해 벤 리커트에게 도움을 청한다. 초짜는 고수 앞에서 주름을 잡는다. “미국 부동산이 폭락한다는 쪽에 걸어보려고요.” 고수는 초짜의 투자 설명을 경청한다. “판을 제대로 봤군. 도와줄게.” 결과적으로 미국 부동산 시장은 붕괴된다. 덕분에 제이미와 찰리는 대박난다. 영화 <빅 쇼트>의 한 장면이다. 믿지기 않지만 실화다. <빅 쇼트>는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를 다룬 영화다. 미국 경제와 세계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뻔한 사건이다. 제이미와 찰리처럼 하늘이 무너졌을 때 솟아날 구멍을 찾아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마이클 버리이고 마크 바움이고 자레드 베넷이다.
지금껏 월스트리트 금융계를 다룬
[신기주의 영화비평] 우리는 돈을 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