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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다큐멘터리 <침묵의 시선>은 시종일관 긴장감으로 충만하다. 1965년 인도네시아 대학살 가해자들의 증언과 그것을 듣는 피해자 가족의 표정을 주로 포착하는 이 영화는 말들보다는 말들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드는 침묵의 행간에 집중한다. 형을 학살로 잃고 형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부모를 대신해 가해자들을 찾아가 사과할 것을 침착하게 요구하는 주인공 아디의 표정을 보는 것은 관객인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나는 물론 상식적인 관전자의 입장에서 아디의 편이다. 그러나 아디는 대부분 자신들의 잘못을 부정하는 상대와 부딪치고 때론 협박을 받는다. 과거의 상황이 현재에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데 대해, 정작 아디는 두려워하지 않는데 관전자들은 두려워하게 된다. 이 소시민적 불안에 대한 근심을 이겨내면서 스크린을 응시하는 게 <침묵의 시선>의 화면에 긴장을 낳는다.
여기서 가해자인 상대방을 만나 직접 쳐다보거나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촬영한, 가해
[김영진의 영화비평] 흔들리지 않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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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계 영국인인 니마 누리자데는 저명한 정치 활동가인 알리레자 누리자데의 아들이자 CF와 뮤직비디오계의 스타이다. 그런 사람이 미국에 건너와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어떤 영화를 만들었을지 짐작해보자. 정치적인 영화일까, 아니면 감각적인 스타일의 영화일까. 선입견이 하나둘 쌓이기 전에 한국에서 홈비디오로만 선보인 데뷔작 <프로젝트 엑스>(2012)에 대해 우선 말해야겠다. 멀리 <애니멀 하우스>(1978)부터 <슈퍼배드>(2007)에 이르는 선배를 둔 <프로젝트 엑스>는 미국의 고등학생이 꿈꾸는 욕망이 어느 정도의 바닥으로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시험하는 장이다. 앞서 말한 두 영화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한심함은 비교할 바가 안 된다. 주인공 소년은 생일 파티에 예쁜 소녀들이 몇명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을 뿐인데, 악동 친구를 둔 덕에 하룻밤 파티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빠진다. 술, 음악, 섹스, 약은 기본이고, 천명이 넘는 인원이
[이용철의 영화비평] 의미 없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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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자>와 <선녀와 나무꾼> 설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멱 감는 틈을 타 의복을 절취하는 수법으로 선녀를 약취•유인한 뒤 강제로 성관계를 맺고 아이까지 낳게 한 나무꾼의 이야기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 이야기는 만주족 기원설화 중 하나로 출발해 시베리아, 일본 등 동북아 지역에서 여러 형태의 민담으로 변이, 전승돼왔다. 선녀의 날개옷은 하늘나라로 갈 수 있는 도구이기에 앞서 지상의 인간과 다른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나무꾼은 이를 훔침으로써 천상의 여인을 자신과 동등한 신분으로 전락시키는 동시에 욕망을 지속 가능한 상태로 유지한다. 이같은 이야기의 원형은 주로 나쁜 남자가 여성을 착취하는 얼개를 공유하며 무수히 활용됐는데 가까운 예로는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2001)가 있다. 사창가의 폭력배가 길에서 본 여대생에게 반해 돈을 훔치도록 유도한 다음 성매매 여성으로 전락시킨다는 이야기. 그 와중에 두 사람 사이에 스톡홀름 증후
[송형국의 영화비평] 날개옷을 빼앗긴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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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클 벨리에>는 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Children of Deaf Adult), 일명 ‘코다’(CODA)인 폴라(루안 에머라)가 노래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면서 가족과 겪는 갈등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를 보고 혹자는 농인들의 삶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비판하고, 혹자는 농인들을 자녀에게 의존하는 모습으로 그렸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는 농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빚어진 오해이다. <미라클 벨리에>는 농문화의 관점에서, 부모-자식간의 관계나 사춘기의 고민 등을 잘 풀어낸 영화이다.
흔히 농인을 ‘청각장애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장애인’이라는 규정은 비장애인 중심의 의학적 사고이다. 청인들은 농인들이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답답할 거라 생각하지만, 농인들은 소리에 대한 욕구가 없기 때문에 결핍도 없다고 한다. 마치 무성영화가 그 자체로 완벽하듯이 그들의 고요한 세계는 그 자체로 완벽하며, 수어(手語)를 통해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장애를
[황진미의 영화비평] 차이 받아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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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공단>(2014)은 22명의 노동자가 자신의 일과 일터에 얽힌 사적 경험과 기억을 고백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그들의 사연 하나하나를 듣다 보면,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사연이 ‘노동자 계급’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나무 하나하나를 보며 걸었는데 어느새 숲을 조망하는 위치에 서게 된 듯한 느낌. 임흥순은 자본주의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결과인 계급 갈등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도, 이 땅의 노동자(더 나아가서는 동남아 지역의 노동자까지) 계급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데 성공한다.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사람의 집단으로서 노동자 계급. 어쩌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이기도 한) ‘얼굴 없는 마네킹’처럼 노동자 계급을 다뤄왔는지도 모른다. <위로공단>은 노동자 개개인의 사연을 통해 마네킹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노동자의 역사가 살아난다.
일터와 만나지 못한 목소
[안시환의 영화비평] 듣기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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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한국영화는 남성들의 육체를 중심으로 그들이 누아르(액션)와 멜로드라마(신파)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뿌렸던 눈물과 땀, 피에 주목했었다. 고함치고 분노에 일그러진 표정에 담긴 고뇌와 단련된 신체로도 뚫을 수 없는 견고한 사회의 시스템과 싸움을 벌이면서 그들은 항복을 선언했다. 간혹 안간힘을 써서 이 세계의 끝까지 돌파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대부분 개인(혹은 짝패)이 악의 득세를 막아낼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을 뿐이다. 남성 중심의 서사와 남성간의 대결구도에서 벗어나 여성이 중심축을 이루고 그녀들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삶의 방식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보여준 신수원의 <마돈나>, 안국진의 데뷔작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임흥순의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은 서로 다른 형식과 시각을 지니고 있음에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진지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들이 여성을 향해 다가서는 방법을 찾아보고 각 영화들이 지닌 태도에 대한 질
[박인호의 영화비평] 여성 노동자,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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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 <암살>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등 최근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약진하고 있다. 가장 특이한 점은 총칼을 든 여주인공의 등장이다. 전통적인 남성 장르로 간주됐던 누아르, 액션, 무협, 잔혹극 등에서 최근 여성주인공이 잇따라 등장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동안 무장한 여성 전사의 등장이 없었던 건 아니다. <쉬리>(1999)나 <고지전>(2011)에서도 여성 저격수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반동인물들이었다. <쉬리>의 그녀(김윤진)는 북한의 간첩이자 암살범으로, 남한의 국정원 요원과 연인이었다. 즉 ‘두 얼굴의 괴물’로, 우리가 북한에 대해 품는 이미지를 대변한다. 사랑하고 통일하고 싶지만 속내를 알 수 없는 위험한 존재라는 뜻이다. <고지전>의 그녀(김옥빈)도 북한군 저격수로, 감정이 거의 없는 기계적인 존재다. 남한 병사인
[황진미의 영화비평] 실현되지 못한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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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의 속편이 나올 거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제법 그럴듯한 상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표현의 행간을 좀더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이하 <로그네이션>)은 분명 기대만큼의 재미를 정확하고 안전하게 제공하는 영리한 블록버스터다. 적절한 타이밍에 볼거리를 제공하고 필요한 디테일은 일부러 프레이밍까지 해서 확실하게 보여준다. 인물의 심리를 적당히 짐작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혹여 부족할까 일일이 대사로 설명까지 해주는) 과도한 친절은 이 시리즈가 다수의 관객이 쉽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을 지향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나쁘다는 게 아니다. <로그네이션>의 연출은 계량화된 공식의 완성형으로서 탄탄함을 자랑하는, 상업영화의 총아다. 기본적으로는 다섯 번째 속편임에도 늘어지기는커녕 1편으로 회귀하는 듯한 에너지에 대해 경탄했다. 그러나 다음 이야기가 더 보고 싶은지 묻는다면 이제 그만 에단 헌트를 놓아주고 싶은 마
[송경원의 영화비평] 뭐든 이루어지면 식상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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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녀, 칼의 기억>은 서로 다른 운명을 향해가는 세 검객의 칼처럼 각기 다른 플롯이 얽히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아버지의 복수를 사명으로 품고 세상에 뛰어든 홍이(김고은)의 성장담, 검 한 자루를 쥐고 천출에서 무인정권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선 덕기/유백(이병헌)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암투, 대의와 연정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두고 흔들리는 설랑/월소(전도연)와 덕기/유백간의 멜로드라마가 고려 말기라는 역사적 배경을 타고서 흘러간다. 보다 다층적이고 현대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한 각본상에서의 야심은 엿보이지만 일일이 뜯어보면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무협영화의 전형적인 서사와 장치를 여러 겹으로 포개놓고 있다. 풍천삼협의 과거사와 유백의 권력욕은 형제의 의를 맺은 협객들이 배신으로 인해 원수가 되는 장철의 <자마>(1973)를 연상케 하며, 설랑과 덕기 사이의 엇갈리는 애증 관계는 장이모의 <영웅: 천하의 시작>(2002)에서 비설(장만옥)과 파검(양조위)
[조재휘의 영화비평] 의협(義俠)의 정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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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1세기 넘게 서부극에서 보아왔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다고 해도 아주 잠시만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이런 장르를 통해 접했던 전설적인 인물들, 그러니까 와이어트 어프, 애니 오클리, 버펄로 빌, 빌리 더 키드와 같은 인물들 역시 서부극 팬들의 상상 속에 거주하는 캐릭터들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서부극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어디를 목적지로 삼아야 하는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려는 시도는 허망하다. 그 순간부터 장르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존 포드의 영화들을 기준점으로 삼으면 안전하겠지만 심지어 그의 영화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 수정주의 서부극, 스파게티 웨스턴 그리고 그 밖의 온갖 변종들은 오래전에 장르가 먹어버렸다. <백 투 더 퓨처3>의 마티 맥플라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때 그가 모델로 삼았던 것이 존 웨인이 아니라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는 것을 잊지 말자. 어차피 다 거짓말인데 더 오래된 거짓말이라고 나을 게
[듀나의 영화비평] 괴물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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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자정을 넘긴 시간, 변두리 멀티플렉스의 아주 작은 관에서 <러브 앤 머시>를 보았다. 두 시간 동안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하지만 나의 망각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한명의 뮤지션의 내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잔잔한 기쁨과 슬픔의 시간을 가졌다.
대서양을 처음 비행한 사람이 린드버그인 것은 초등학생도 알지만 두 번째로 비행한 사람에 대해선 인간의 역사는 냉담하다. 시장과 역사는 언제나 첫 번째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권력을 부과한다. 우리 모두가 아는 <삼국지>에서 제갈량에게 희롱당하고 분을 못 이겨 죽는 오나라의 영웅 주유의 탄식이 아니더라도(물론 2인자도 못되는 거개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불평도 사치스러운 것이겠지만) 2인자의 지위만큼 안타까운 경우도 없을 것이다. 비치 보이스는, 아무리 이 밴드의 광팬이라고 하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대중음악사상 가장 많은 군웅들이 할거한 1960년대 서구 록음악계의 어쩔 수 없는 2인자다. 바로 비틀스
[강헌의 영화비평] 2인자의 위대한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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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료타로의 소설 <신센구미 혈풍록>에 실린 ‘산조 강변의 난투’ 에피소드에는 이노우에 겐자부로라는 이름의 나이 든 무사가 나온다. 퍽 인자하고 지혜로운 인상을 풍기는 이 무사는 검술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 그를 따르는 무사 고쿠기의 시점으로 신센구미의 우두머리였던 곤도를 비롯해 이 조직의 리더들이 왜 검술 실력도 별 볼일 없는 그를 모시는지를 동정을 담아 묘사하고 있는 이 에피소드는 그가 조장으로 이끄는 6번대가 어느 여관에 숨어 있는 로닌들을 처치하려다 낭패를 보는 것으로 끝난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 <고하토>(2000)에도 이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이노우에를 묘사하는 관점에서 온도 차이가 꽤 난다. 혈기왕성한 젊은 무사들 사이에서 이 나이 든 무사는 첫 등장부터 지혜로운 고수의 느낌을 풍기지만 실은 지략도, 용기도, 실력도 없는 그저 그런 늙은이일 뿐이었다. 그의 무능으로 인해 그가 이끄는 신센구미의 6번대는 하마터면
[김영진의 영화비평] 자의식 없는 메타포의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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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종이 달>을 본 뒤, 원작인 가쿠타 미쓰요의 <종이달>을 읽었다.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을 두고 원작과 비교해 따져 묻는 건 사실 좀 허무한 일이다. 연출자의 목표가 ‘소설의 빈틈없는 재현’일 리 없을뿐더러, 설사 데칼코마니 하듯 소설을 영화로 찍어내려 했다고 해도 쓰인 ‘글’을 ‘(움직이는) 이미지’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생겨난 ‘얼룩’들은 차라리 필연에 가깝다.
<종이 달>을 만든 요시다 다이하치는 이 ‘얼룩’을 즐길 줄 아는 감독이다. 이 영화 전까지 그는 총 네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모두 원작 소설(혹은 만화(<퍼머넌트 노바라>))을 출발점으로 하는 작품으로, 그 각색 방식이 무척 흥미롭다. 실제로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에서 그가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는’ (작은) 사건이 불러일으킨 동요를 높낮이가 서로 다른 네 등장인물의 ‘시점-감정’과 정교하게 분할된 ‘시간’이라는 두개의 축 위에 정신없이
[우혜경의 영화비평] ‘있어야 할 곳’은 어떤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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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미션 임파서블>에서 가면이 빠지면 <미션 임파서블>이 아닌 거 같아.”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이 끝난 영화관 관객석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 세대가 바뀌었다는 소리다. <미션 임파서블> 하면 자동적으로 떠올라야 하는 것이 두개 있다. 랄로 쉬프린의 음악과 라텍스 가면이다. 롤린 핸드가 공들여 만든 석고틀에 라텍스를 부어 변장 대상과 똑같은 가면을 만들어 뒤집어쓰는 장면이야말로 <미션 임파서블> TV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가 아니었는가. 물론 실제로 그런 가면을 쓴다면 <할로윈>(1978)의 마이크 마이어스처럼 보일 가능성이 100%였겠지만 <미션 임파서블>의 세계는 사정이 달랐다. 그런데 그런 결정적인 장면이 이제 ‘안 나오면 아쉬운’ 카메오 취급을 받는다.
영화만 본 관객에겐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은 <미션 임파서블> TV시리즈의 리메이크지만 원작
[듀나의 영화비평] 오리지널의 정체성은 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