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등장한 가장 주목할 만한 미국 감독 중 하나인 데이비드 O. 러셀은 처음부터 일관된 세계관을 보여주는 감독이었다. 데뷔작 <스팽킹 더 몽키>(1994)에서 <디제스터>(1996)를 거쳐 <쓰리 킹즈>(1999)와 <아이 하트 허커비스>(2004)에 이르기까지, 열혈 인권운동가 출신의 그는 자본주의가 잠식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을 ‘웃픈’ 코미디로 둔갑시켜 조롱과 연민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그의 영화관이 일종의 방향 전환을 이룬 영화는 2010년작 영화 <파이터>이다. 때로 과격하고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화려한 허상에 반기를 들었던 그의 급진주의는 이 영화에 이르러 자취를 감춘다. 보다 세련되고 진중한 방식의 드라마로 구성된 <파이터>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하층민의 이야기는 훌륭한 배우들의 앙상블에 힘입어 밀도 있게 그려진다.
아카데미영화제에서 환대를 받고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휩쓴 <파이터>가 가져다준 명성은 이후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행보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은 그의 괴짜 기질을 말랑말랑한 로맨스로 포장한 작품이며, <아메리칸 허슬>(2013)은 타인을 속이다 스스로 공허해져가는 인간적 사기꾼들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시니컬한 세계관이 <파이터>에서 보여주었던 연출의 정교함과 결합한, 그의 본령과 이후의 변화를 통틀어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속작 <엑시덴탈 러브>(2015)는 제작사의 파산으로 인한 우여곡절로 <파이터> 이전에 제작되었으나 지난해에 개봉한 영화로, <파이터> 이전의 그의 작품들이 보여주었던 난장판 코미디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메리칸 허슬>의 진정한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조이>는 대중성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진화하는 듯 보였던 그의 영화세계가 부닥친 어떤 벽처럼 느껴지는 작품이다.
<조이>의 조이와 <파이터> 미키의 차이점
가난한 싱글맘 조이 망가노(제니퍼 로렌스)가 자신의 발명품으로 홈쇼핑에서 소위 대박을 터뜨리고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CEO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보여주는 이 영화는, 제목부터 명백히 주인공 조이에게 모든 것이 할애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구심점인 조이는 영화 속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는 대신 모든 이야기를 자신의 입장으로 흡수시킨다. 조이의 감정 이외에 다른 것들이 끼어들 틈이 없는 영화 <조이>의 세계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단순하고 투박해진다. <헝거게임> 시리즈의 캣니스로 대중에게 각인된 여배우 제니퍼 로렌스가 영화의 중심이며,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 조이는 영화 속 세계를 주재하는 유일한 우주처럼 보인다. 비참한 현실과 싸워나가는 맹렬 여성 조이의 아우라와 집념 아래, 그녀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그녀가 그려낸 우주 속에서 존재하는 희미한 캐리커처에 불과할 따름이다. 가족과 친구들은 그녀의 삶을 망가뜨리는 존재로서 기능하거나, 아니면 그녀의 성공을 지켜보며 적절한 순간에 도움을 주는 존재로 그 기능을 다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조이의 주변 인물들이 희미해질수록 주인공 조이의 감정에 이입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데이비드 O. 러셀의 영화 중 <조이>와 가장 비슷한 주제와 전개방식을 갖고 있는 영화는 아카데미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파이터>일 것이다. 밑바닥 인생의 성공 실화,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정상에 선 이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조이>와 일맥상통한다. 다만 이 영화가 <조이>와 갈라서는 지점은 영화의 주인공인 두 형제, 그리고 마크 월버그가 연기한 미키 워드의 여자친구 샬린이 주고받는 긴장관계에 있다. 디키는 미키에게 있어서 어린 시절의 우상이자 자신에게 권투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쳐줄 수 있는 스승이지만, 마약 중독으로 인해 미키의 커리어를 망치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디키를 편애하는 그들의 어머니 또한 미키의 열등감의 근원이다. 나락에 떨어진 현실과 대면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기대며 마약 중독에 빠져 있는 디키, 그리고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내고 있는 미키의 삶의 악순환을 끊는 최초의 고리는 샬린이다. 샬린은 미키로 하여금 무의미한 애착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돌볼 것을 제안하고, 샬린을 만난 후 미키의 삶은 변화하며, 이는 디키와 다른 가족들에게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픽션으로서의 역동성을 담보하게 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똑같이 실화를 다루고 있는 영화 <조이>에는 이러한 인물들이 주고받는 상호관계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조이는 <파이터>의 주인공들과 달리, 자기 앞에 존재하는 장애물들을 계속해서 처치하고 목표를 향해 달리는 여전사와 같다. 그녀는 방해가 되는 모든 존재들을 뛰어넘고, 때로는 처단하며 마침내 정상에 오른다.
이 모두는 결국 가짜 세계에 대한 매혹 그 자체인가?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은 그의 존재를 알린 기상천외한 걸프전 영화 <쓰리 킹즈>에서부터 다수의 주인공을 출연시켜 서로 갈등을 주고받으며 이합집산하는 과정을 그리는 데 능숙한 감독이었다. 그의 영화들에서 불완전한 상태의 주인공들은 갈등과 모험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진실에 자신도 모르게 다가간다. 걸프전 종전 후 무료하게 집에 갈 날만 기다리던 군인들을 매혹시킨 후세인이 숨겨둔 보물지도는, 결국 그들에게 화려한 미국의 승전보 아래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난민들에게로 그들을 인도한다. <아메리칸 허슬>은 또 어떤가. 사기꾼 어빙과 그의 파트너 시드니, 어빙의 아내 로잘린, FBI 수사관 리치와 카마인 시장은 끊임없이 영향관계를 주고받으며 각자 깨달음을 얻는다. 데이비드 O. 러셀이 자신의 관심사와 취향을 끝까지 밀어붙인 괴작 <아이 하트 허커비스>에서 환경운동가 앨버트와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인물들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에 이른다. 안타깝게도, <조이>에는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하는 과정에서 조이의 적과 동료들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거나 그녀의 인생에서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조이>가 가진 가장 큰 맹점은 어쩌면 소재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본에 대한 날선 비판, 몰개성과 권력욕으로 점철된 현대사회에 대한 염증을 신경질적인 유머로 보여주었던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려보면, 홈쇼핑으로 사상 최고의 판매고를 올리며 자본주의의 첨병으로 우뚝 선 여성의 이야기는 확실히 이질적인 구석이 있다. TV드라마에 중독된 조이의 엄마가 시청하는 기괴한 치정극으로 시작되는 <조이>의 첫 장면은 그래서 아이러니한 느낌을 전해준다. 홈쇼핑에 출연한 조이가 비록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 있을지라도, 그녀는 자신의 성공을 둘러싼 자본의 호화로운 허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TV에 갇혀 사는 엄마를 공포와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가난한 싱글맘은, 스스로 TV 속으로 걸어들어가 여전사가 되었다. 시종일관 기계적으로 성공 스토리를 좇는 이 영화의 전개는, 이 모든 기적 같은 일들이 TV드라마처럼 진부한 통속극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져다준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모든 것은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이며, 가짜 세계에 대한 매혹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종의 맥거핀일 수도 있다는 허무맹랑한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다. 그러나 차라리 그 편이 데이비드 O. 러셀의 반골 기질에 더 맞는 결론일 것이며, 내게 있어 <조이>는 당분간 데이비드 O. 러셀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영화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