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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필립 가렐의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을 보며 제목 그대로 한 ‘여인의 그림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이는 가렐과 동세대 작가인 샹탈 애커만이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주인공 피에르를 연기한 스타니슬라 메하르는 샹탈 애커만의 두편의 영화, <갇힌 여인>(2000)과 <알마이에르가의 광기>(2011)에 출연한 배우다. 그가 조연으로 잠깐 출연한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의 <편지>(1999)를 제외하면 나는 그를 애커만의 영화 속 음울한 표정의 배우로만 기억한다. 그가 벽에 기대어 바게트를 씹으며 종이에 적힌 무언가를 읽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첫 장면에서도 그의 특유의 연악함과 우울함의 검은 흔적이 묻어나고 있었다. 우연이 아니었나 보다. 그 무렵 샹탈 애커만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가렐은 지난해 12월, 서울에서의 강연에서 애커만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김성욱의 영화비평] 삶을 살아가는 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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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그의 현란한 기교에 매료됐다. 의심은 <바벨> 때부터 싹텄고, <버드맨>을 보고 불안해졌다. 그리고 <레버넌트>를 통해 확신했다. 이제 다음이 궁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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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무덤에서 일어난 순간 헛된 기대인걸 알면서도 그의 걸음이 복수를 향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피츠제럴드(톰 하디)에게 살해당하는 아들 호크의 참상을 목격한 장면부터 이미 내정된 걸음이었지만 그럼에도, 글래스의 처절한 걸음이 종국에는 복수 이외의 다른 곳에 안착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 같다. 복수극이 끔찍하다거나 식상해서가 아니다. 영화 중간 어떤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어느 지점부터 주의가 흩어졌다고 해도 좋겠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한 줄로 정리한다면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복수에 도달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서사를 추동하는 게 정말 복수심일까. 그 계기가 되는 사건, 아들의 죽
[송경원의 영화비평] 서사를 잃고 헛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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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트풀8>는 대살육이 벌어지는 클라이맥스 직전, 영화의 주무대인 잡화점에서 그날 아침 일어난 일들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혐오스런 주인공들이 서로 죽고 죽임을 당하는 결말은 얼마간 예상할 수 있었지만 주요 인물들 외에, 이 회상 장면에서 잡화점 주인과 종업원들이 나올 때 나는 당황했다. 영화의 상당 부분이 지날 때까지 그들은 서사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고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관객인 나는 그들이 죽을 것을 알고 어떻게 죽는지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괴로웠다. 가벼운 인사치레와 무의미한 취향 테스트 같은 사소한 대화들이 오가는 가운데 나는 그들이 언제 죽임을 당할지 신경이 곤두섰다. 그들은 이 영화의 혐오스런 주인공들과 다르게 무구하고 명랑한 인물들이었다. 음식 솜씨 좋은 잡화점 주인 미니 아줌마와 종업원 젬마, 그리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마차 조수 주디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인간들의 하염없이 즐거운 행동을 보여
[김영진의 영화비평] 야만적인 죽음의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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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미국 미네소타에서 고니시 다카코라는 이름의 일본 여성이 숲속 눈밭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죽기 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던 경관의 오해로 당시 모든 뉴스에서는 그녀가 코언 형제의 영화 <파고>(1996) 속 숨겨진 돈가방을 찾기 위해 미국에 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라고 소란스레 보도했다. 이후 조사를 거듭한 끝에 그녀의 죽음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밝혀졌지만 <파고>의 돈가방을 찾아 미국의 소도시 ‘파고’에 도착한 일본 여성의 죽음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종의 ‘도시 전설’(urban legend)로 번져나갔다. 데이비드 젤너 감독은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쿠미코, 더 트레져 헌터>(이하 <쿠미코>)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이때 “바탕으로 했다”라는 말은 어쩐지 난처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바탕으로 한 출발점이 현실도 허구도 아닌 ‘(도시) 전설’이기 때문이다.
‘다카코 전설’에서 무
[우혜경의 영화비평] 폴 버니언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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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웨스턴은 무정부적이다. 첫 번째 웨스턴의 주인공은 강도였다. 수정주의 웨스턴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아니, 수정주의쪽으로 오면서 더 무정부적으로 변했다. 그렇다고 해서 웨스턴이 정치적 아나키즘에 딱 들어맞는다는 뜻은 아니다. 아나키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권력과의 관계’에서 그러하다는 말이다. 웨스턴의 주인공은 권력에서 벗어나 자유를 좇는 자들이다. 그들이 말을 타고 어디로 달려가는지 바라볼 필요가 있다. 간혹 그것이 <헤이트풀8>(2015)처럼 지옥으로 판명날 때도 있지만, 웨스턴은 무법자가 찾아가는 공동체의 이상향에 관한 영화다. 기억하라, 웨스턴은 19세기에 관한 이야기다. 이상하게도 관객은 무법자들의 세계를 동경한다. 당신은 언젠가 <내일을 향해 쏴라>(1969)의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를 사랑한 적이 있다. 혹은 <와일드 번치>(1969)의 불한당들은 어떤가. 그런데 또 이상한
[이용철의 영화비평] 이상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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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라면, 반대로 인간은 신의 형상을 만들어왔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2015)는 신을 인간에 가까운 존재로 그리는 정도가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 끌어내린다. 그런데 그 수단이 첨단의 장비(컴퓨터)를 신에게 선사하면서 이뤄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에서는 장비는 업그레이드됐지만 위엄은 다운그레이드되는 난감한 상황이 펼쳐진다. 베냐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물을 가장 가까이 끌어오려는 대중의 욕망이, 거리감을 전제하는 아우라와 대치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는데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그에 대한 하나의 증거물이다. 수많은 재현물에서 인간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신비화된 신의 창조과정을, 자코 반 도마엘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간단하게 누설해버린다.
감각의 언어를 긍정하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의 신에 대한 재현방식 자체는 따지고 보면 그리 도발적인 것은 아니다. 리처드 도킨
[김소희의 영화비평] 디지털 유토피아의 가능성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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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 영화 <캐리>(1976), <쇼생크 탈출>(1994) 등의 원작 소설가 스티븐 킹은 부사를 많이 쓰는 작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곤 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그는 [“내려놔요!” 하고 그녀가 소리쳤다. “돌려줘.” 그는 애원했다]와 [“내려놔요!” 하고 그녀가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돌려줘.” 그는 비굴하게 애원했다]를 비교하며 각각의 문장이 전보다 약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약해진 것은 우리가 문장을 읽고 상상할 수 있는 인물의 감정, 톤과 뉘앙스 같은 것들일 터다. 후자에서 문장이 허용하는 상상의 두께는 얄팍해졌고 표현은 납작해졌다. 독자의 상상을 제한하는 화려한 사족에 그칠 때 수사는 표현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악화시키는 셈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미지의 수사학에도 해당하는 지적이 아닐까.
이미지를 향한 소렌티노의 열망
파올로 소렌티노의 영화는 과잉된 스타일 때문에 비판
[박소미의 영화비평] 아름다움의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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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 프리퀄을 싫어하지 않는다. 오리지널 3부작만큼 재미있지는 않지만 자기만의 이야기도 있고 자기만의 아름다움도 있는 작품들이다. 다들 죽이고 싶어 하는 자자 빙크스도 굳이 싫어할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이 캐릭터에 반영된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매력 없고 짜증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집중적인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시된다면 우리 중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헤이든 크리스텐슨? 로렌스 올리비에의 재림은 아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구박은 좀 심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프리퀄을 옹호하려고 해도 이 세 영화가 그렇게 매력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번에 새로 나온 J. J. 에이브럼즈의 속편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이하 <깨어난 포스>)가 이들 세편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재미있고 더 <스타워즈>스러운 영화라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크리에이터인 조지
[듀나의 영화비평] 보수적이고 완벽한 자기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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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호랑이 사냥의 의미
<대호>(2015)는 1925년 일제의 호랑이 수렵을 소재로 한다. 실제로 일제의 수렵에 의해 한반도의 맹수들이 멸종되었다. 이는 물론 제국의 식민지배의 일환이자 자연에 대한 지배를 과시하려는 근대인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1907년 조선 군대를 해산한 일본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제정하여 조선인의 총기소지를 금했다. 그러나 1913년 총독부는 호랑이처럼 해로운 짐승을 제거하는 데 협력하는 조선인에게 총포류를 빌려주라는 지침을 내린다. 엔도 기미오의 책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에는 “호랑이를 산신으로 숭배해온 조선에 많은 일본인이 신식의 연발총과 군총을 들고 밀어닥쳐 1897년부터 1926년에 걸쳐 호랑이를 멸종시켜버렸다”는 기술이 나온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인간을 해치는 호랑이를 잡아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일본인들에게는 조선의 전 지역에 이동과 정착이 가능하도록 안전을 확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표면
[황진미의 영화비평] 인간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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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당할 수도 있어.”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에서 절정을 찍는 오싹함은 이 무미건조한 대사 한줄에 실려 있다. 영화 말미, 암살자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는 케이트(에밀리 블런트)를 찾아와 자신들의 작전이 적법하게 이루어졌다고 위증하도록 강요한다. 케이트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자 알레한드로는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진정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건넨다. 이 대사는 이상하다. 자살이라는 능동적 행위에 ‘당한다’는 피동사는 붙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반면 이 상황은 적절하다. 우리는 알레한드로의 표현이 케이트를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하겠단 협박임을 안다. 인상적인 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이 순간을 굳이 ‘자살’로 꾸미겠다는 알레한드로의 표현이다. 이를 단지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라 말하는 건 케이트가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린다고
[송경원의 영화비평] 영화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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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는 드니 빌뇌브에게 세계적 명성을 선물했던 <그을린 사랑>(2011)을 넘어서는 작품이다. <그을린 사랑>은 플롯을 직조하는 그의 능력을 입증했지만 그러한 플롯 방식이 인물의 트라우마가 벌거벗는 순간의 쾌감을 기대하는 관객의 외설적 욕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으로 아슬아슬한 작품이기도 했다. <시카리오>는 관객에게 전달되는 서사적 정보를 조절하는 탁월한 능력을 확인시켜주면서도, 거기에 정확하게 구성된 숏의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까지 더해진 작품이다. <히트>(감독 마이클 만, 1995)와 자웅을 겨룰 만한 백주의 도심 총격전과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일행이 후아레즈로 진입하는 일련의 장면이 대표적이다. 특히 총격 장면에서 총을 겨누는 자와 피살자의 매치컷이 이토록 정확하게 붙어서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영화는 드물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카메라 없
[안시환의 영화비평] 진실의 가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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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지>는 ‘예술가의 탄생’이라는 서사를 통해 전체주의 사회에서 자란 탈북자의 ‘개인 되기’를 그린다. 김수는 <씨네21> 1031호에 실린 리뷰와 20자평을 통해 “탈북자의 고난을 피상적으로 그렸고, 반전도 쉽게 예측되며, 그림들도 현역 작가들의 작품을 짜깁기한 티가 많이 난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부당하다. <설지>가 걸작은 아닐지라도, 그리 형편없는 작품은 아니며, 특히 탈북자의 고통을 피상적으로 그렸다거나 영화 속 그림들이 짜깁기에 불과하다는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다.
탈북자는 어떤 존재인가?
현재 한국의 탈북자 수는 약 2만8천명을 헤아리며, 한해에 2천~3천명씩 늘고 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탈북자들이 중국, 몽골, 러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유럽, 북남미 등에 존재한다. 일단 북한을 이탈한 이들이 중국 등 제3국에 머물다가 일부가 한국에 입국하기도 하고, 북한으로 재입국하는 경우도 있으며, 한국을 경유해 유
[황진미의 영화비평] 탈북자의 ‘개인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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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감독에게 ‘계륵’이다. 그 어떤 원작보다 강렬하게 권위의 무게로 짓누르지만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강렬한 드라마의 유혹은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특히 <맥베스>는 감독들이 가장 탐내는 원작 중 하나이고, 맥베스의 욕망과 불안은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스크린 위를 비틀거리며 거닐었다. 저스틴 커젤의 <맥베스>는 동일한 원작을 둔 다른 영화들과 서두부터 그 차이가 확연하다. 로만 폴란스키, 오슨 웰스의 <맥베스>가 모두 원작처럼 세 마녀들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의 성>이 신비로운 ‘성’(城)에서 시작하여 일단 신비감과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세팅에서 출발했던 것과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이 설정은 맥베스가 자신의 부인과 공모하여 덩컨 왕을 암살하고, 그렇게 획득한 왕권의 안위에 대해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게 되는 모든 욕망의 근간이 된다.
채워지지 않는 결핍-죽은 아이
[김지미의 영화비평] 권력의 화염, 영원회귀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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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신문과 종편 채널을 보유한 모 미디어그룹의 한 고위 ‘내부자’는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 시장이 두개잖아요. 진보 보수, 양쪽 다 잡자는 거죠.” JTBC의 정치적 성향이 <중앙일보>와 차이를 보이는 데 대한 언급이었다. 손석희 사장이 진행하는 뉴스나 드라마 <송곳>이 방영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JTBC는 이념보다 시장논리를 우선시하는, 한국에선 이례적인 종편 채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요즘 같은 세상에 시장논리가 아닌 다른 걸 중시하는 상업방송이 많다는 게 희한한 노릇이지만). 먼저 전제할 것은, 이 글은 JTBC 뉴스나 <송곳>, 영화 <베테랑>이나 <내부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들 작품이 공감받고 흥행하는 환경, 정의란 눈 씻고 찾아봐야 없다는 인식이 하나의 시장을 형성했다는 점만큼은 엄연하다. 좀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선, 사회 불만 고조→고발성 작품 투
[송형국의 영화비평] 두개의 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