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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2004)과 <타짜>(2006), <도둑들>(2012)은 프로페셔널 범죄자들이 모여 계획을 짜고 목표를 탈취하는 강탈영화(Caper Film)의 틀 안에서 인물간의 치정과 배신을 펼쳐놓은 작품들이다. 돌이켜보면 이점은 사뭇 의아함을 자아낸다. 능숙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기를 인정받아왔지만 정작 최동훈의 필모그래피 면면을 들여다보면 영화의 내러티브 자체는 고전적인 필름누아르, 하드보일드 문학의 자장을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 자체를 독창적으로 만들어내는 작가라기보다는 전통적인 틀 안에 머물면서 그 안의 인간 군상으로부터 재미를 이끌어내는 연출가에 가깝다.
관계-사이(間)의 영화 - 최동훈, 혹은 하워드 혹스
독립군 요원의 암약을 그린 <암살>(2015)에서도 이러한 최동훈 영화의 특징은 반복된다. 소집된 독립군 일원은 친일파 사업가 강인국(이경영)을 표적으로 삼아 연대하나, 내부 배신자에 의해 위기에 처한
[조재휘의 영화비평] 시대극으로서는 아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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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암살>은 1933년 경성을 배경으로 조선독립군의 암살 작전을 그린다. <범죄의 재구성>(2004), <타짜>(2006), <도둑들>(2012)에서 보았던 최동훈 감독의 실력 그대로, 놀라운 짜임새와 인물들간의 조화가 돋보인다. ‘케이퍼 필름’이 제작한 영화답게, <암살>은 케이퍼 무비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며 장르의 쾌감을 선사한다. 또한 몇몇 스타일리시한 장면이나 장중한 음악으로 고전영화의 풍미를 살려낸 호쾌한 액션물이다.
영화는 1930년대를 입체적으로 재현한다. 단지 상하이의 조차지나 경성의 미쓰코시 백화점을 그럴듯하게 그렸다는 뜻이 아니다. 1930년대 초 사정을 매우 정교하게 그려낸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만주국을 수립한다.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 이후 항저우로 옮긴 임시정부는 지도력
[황진미의 영화비평] 염석진의 최후가 의미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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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수사극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은 전문가 집단이다. 형사 외에도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인물들이 사건에 뛰어들어 범인을 밝혀낸다. 그런 점에서 <극비수사>는 유별난 영화다. <극비수사>(2015)의 이야기(혹은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실화) 중 흥미로운 부분은 점쟁이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 김중산이 유괴 사건의 해결에 개입한다는 것이다. 점쟁이는 분명 프로페셔널한 직업이다. 하지만 그가 범죄 및 수사의 영역 안으로 뛰어들다 보니 내 몸속 수용세포들이 난감함을 표하기 마련이다. <극비수사>보다 10여년 전에 만들어졌으나, 사건이 벌어진 시점으로 치면 10년 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살인의 추억>(2003)에서도 비슷한 장면 하나를 찾을 수 있다. 형사 박두만의 연인 설영(전미선)은 “정 답답하면 무당집 같은 데라도 가봐”라고 말한다. 다음날 두만은 진짜로 무당을 찾아가고, 무당은 이런저런 말을 내뱉던 끝에 묘책 하나를 제시한다. 부적 따위
[이용철의 영화비평] 현실 안에 신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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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마>는 미국의 목사이자 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에 대한 영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전기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는 마틴 루터 킹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까지를 순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1965년, 흑인 투표권 투쟁을 위해 벌어진 ‘셀마-몽고메리 행진’에 집중한다. 미국 인권운동사에서도, 마틴 루터 킹 개인의 삶에서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대해 다루는 것이다.
영화는 자극적이지 않다. 차분하되 밀도 있게 그려낸다. 하지만 그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지루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의 새로운 표적이 된다. 또 <셀마>는 비슷한 영화 몇몇을 떠올리게 한다. 흑인 인권을 다뤘다는 점에서 일단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2013)나 <노예 12년>(2013)을 논할 수 있다. 그러나 시기와 주제를 보다 정교하게 제한한다면 <미시시피 버닝>(1988)이 생각난다(이 영화는 1964년, 미시시피주의 흑인 투표권 등록을 돕
[김봉현의 영화비평] 힙합이 품은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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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주부였던 리카(미야자와 리에)는 은행에서 일을 시작한 뒤 우연한 계기로 고객의 돈을 횡령하기 시작한다.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은 리카의 범행 방법을 보여주는 데 무게를 두는 대신 그녀가 왜 수천만엔을 횡령하게 되었는지 그 내면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종이 달>에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이다. 감독은 여기에 답하기 위해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는 리카의 현재 서사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 시절 리카가 기부금을 내기 위해 돈을 훔친 일화를 다룬 과거 서사다. 영화를 보고난 뒤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과거 서사는 왜 필요한가. 과거 서사를 통해 리카가 어렸을 때부터 돈을 훔치는 데 스스럼이 없었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리카의 범행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 같다. 가장 손쉬운 이 답변은 현재 서사의 존재 이유와 상충한다. 한쪽에서 “리카는 왜 그랬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 “리카는
[박소미의 영화비평] 그녀는 왜 훔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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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 라일리의 전전두엽 컨트롤타워 근무자는 논리•합리•윤리의 이성 3형제가 아니다. 지식•지성•지혜의 지능 3종 세트도 아니다. ‘기쁨’(joy), ‘슬픔’(sadness), ‘까칠’(disgust), ‘버럭’(anger), ‘소심’(fear)이라는 이름의 감정 5남매다. 성인인 라일리 부모의 뇌 속 통제본부도 이성이 아닌 감정이 제어장치를 책임지기는 마찬가지다. <인사이드 아웃>의 이와 같은 설정이 나오기까지는, 최근 30여년 사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신경과학, 진화학 등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의 공이 컸을 터다. 인류가 이성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인간의 의사결정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개입하는지 알게 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간 이성이 애써 내린 판단이라고 알아온 것들도 이기적 유전자들이 본성에 충실한 결과였다는 사실도 속속 밝혀지는 참이다. 그런 의미에서 픽사는, 있지도 않은 공포를 조장해 콩고물을 취하려는 에너지 기업과 여기에 공생하는 정치권력을 대놓고 지
[송형국의 영화비평] 인간의 본질이 감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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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주 에머리빌에 위치한 픽사 본사에는 ‘픽사 대학’(Pixar University)이 있다. 픽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이곳에서 수업을 듣기도 하고, 가끔 가르치기도 한다. 데생이나 머신 러닝 같은 테크니컬한 수업에서부터 창의적인 사고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업들이 열린다. 픽사 본사를 방문했을 때, 가장 인기 있는 수업이 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신경과학!” 인간의 인지사고과정과 행동에 대한 과학적인 토대에 다들 관심이 많단다. 나도 그들과 함께 ‘신경과학의 최신 연구 성과’에 대해 2시간이나 떠들기도 했다. 그들은 이미 신경과학도들이었다.
아마 <인사이드 아웃>을 만든 피트 닥터 감독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흔히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을 보면 “도대체 저 사람 머릿속엔 뭐가 들어 있을까?”라고 혼잣말을 하는데, 이 영화는 그걸 고스란히 화면에 옮겨놓았다. 오랫동안 폐기되지 않고 살아남았던 ‘호문쿨루스 가설’(Homunculus
[정재승의 영화비평] 세상 밖으로 나온 감정들, 삶의 통찰을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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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카메론은 <터미네이터2>(1991)에서 묵시록적 SF의 서사를 종결지었지만 제작사는 시리즈를 더 이어나가길 바랐다. 그러나 카메론의 손을 떠나서 만들어진 두번의 속편은 비평적 뭇매를 맞았으며 흥행 또한 성공적이지 못했다.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2003)은 예정된 디스토피아적 미래상과 시간여행, 암살자의 출현 등 전편들과 동일한 서사 구조를 공유했지만 차별되는 지점 없이 답습하는 데 지나지 않았고,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2009)은 전쟁영화로서 장르의 면모와 스케일을 일신하고자 했지만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다. 전편과의 연관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와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처해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길을 잃었던 것이다.
<터미네이터>(1984)와 <터미네이터2>만으로도 이미 타임 패러독스를 완결하는 설정과 구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새로운 실마리를
[조재휘의 영화비평] 존경으로 만든 리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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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서술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여자, 마돈나를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하는 이야기다. 자연히 영화의 초점은 마돈나는 누구인가에 맞춰진다. 마돈나가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출 때 영화는 ‘마돈나는 왜 타락할 수밖에 없었나’를 보여주는 이야기에 그친다. 마돈나는 불쌍한 타자로 고립되거나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여성으로 해체된다. 이 둘을 피하기 위해 이 영화가 누군가의 시선에 비친 마돈나를 그릴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여성들의 타락사
혼수상태에 빠진 마돈나를 재구성하는 인물은 해림(서영희)이다. 해림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거의 없으므로 해림이 누구인가에 대해 몇 가지 가설이 필요하다. 해림이 마돈나를 찾도록 의뢰를 받았다는 점, 주변 인물을 탐색한다는 점 등에서 그녀의 특수한 위치는 사립 탐정과 비슷하다. 사립 탐정이라고 칭한 이유에는 탐정이 남성적 캐릭터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한 것이다. 의뢰인 상우(김
[김소희의 영화비평] 마돈나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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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은 잘 만든 법정 드라마로 손색이 없지만 픽션보다 더 개연성이 없는 현실을 의식한 탓인지 매듭이 불완전한 방식으로 봉합된다. 사건의 실체는 끝내 명확히 해명되지 않는다. 대신 사건 당사자들의 감정이 극적으로 부각되는데 나는 그게 좀 이상해 보였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던 주인공 변호사들의 노력은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법정의 판결은 두루뭉술하며 변호사들이 구출하려 했던 피해자들은 깊은 절망과 회한에 빠진다. 사건의 실체를 가림막했던 국가기관의 당사자들은 어느 누구도 징벌받지 않고 그들 모두 앞으로도 무탈하게 살아갈 것이 암시된다. 이것은 감독 김성제의 정직한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이 영화가 지금보다는 더 주목받기를 원했던 평자로서 약간의 이의를 제기하려고 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변호사 윤진원(윤계상)과 장대석(유해진), 기자 공수경(김옥빈)이지만 정작 말미에 정서적 초점을 맞추는 인물은 피고인 박재호(이경영)다. 박재호
[김영진의 영화비평] 여백으로 남은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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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 포위된 풍경들
형사가 차에서 내려 걸어가면, 영화가 시작된다. 강력계 형사 정재곤의 눈앞에서는 거대한 타워크레인들이 아파트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중이다. 이 아파트들은 재개발 열풍이 도시에게 안겨준 뜻밖의 선물이었다. 노년기에 접어든 도시는 고도성장기의 기억을 떠올리며 회춘을 꿈꿨고, 아등바등 살던 사람들은 아파트 한채 면적만큼의 행복을 상상하며 중산층의 삶을 꿈꿨다. 물론 밀려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에 밝지 못한 이들은 어디에나 넘쳐나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에게 ‘기회’란 상승을 위한 도약대가 아니라 삶의 예측 불가능성만 증가시킬 뿐인 선택의 기로였다.
정재곤은 아파트 건설 현장에 눈길을 주지 않고, 무심히 주차장을 걷는다. 그 역시 남들처럼 부동산 열풍에 기대어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만들어보려고 했던 적이 있지 않았을까? 아마 그 시도는 실패했을 것이고, 가정은 파탄 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범인을 쫓되 돈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박해천의 영화비평] 아파트, 마카오, 컨테이너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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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프 티셔츠, 차도르, 스케이트보드, 고양이, 이 네 가지는 ‘악의 도시’에 살고 있는 뱀파이어 소녀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조건들이다. 애나 릴리 아미푸르 감독의 데뷔작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의 참신함은 스토리가 아니라 강렬한 이미지들을 결합하는 스타일에 있다. 스트라이프 티셔츠 위에 차도르를 뒤집어쓴 뱀파이어 소녀가 인적 없는 밤거리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달리는 모습은 현대적인 경쾌함과 고전적인 그로테스크의 경이로운 조합이다. 고전 설화부터 근대의 고딕소설로 이어지던 뱀파이어 이야기는 영화의 등장 이후 호러 장르의 가장 매혹적인 소재가 되었다. 인간의 피를 먹고 영원히 죽지 않는 뱀파이어는 두렵고 낯선 존재이기에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TV드라마의 주요 캐릭터로 뱀파이어가 나올 만큼 친숙해졌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는 본디 낯설었던 것이 마치 일상의 존재처럼 가까워져버렸을 때 그것을 다시 비일상적인 존재로 환원시키는 하나의 해법을 제시
[이현경의 영화비평] 소녀의 흡혈이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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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영 감독의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하 <경성학교>)을 보고 나서 뭔가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리뷰가 아닌 아주 ‘조심스런’ 단상을 적고 싶다. 영화 전체를 설명할 생각은 없고, 내가 눌려버린 어떤 이미지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건 이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것으로, 아니 사실 말을 꺼내기도 힘들고 정확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이미지에 놀란 피할 수 없는 ‘나-관객’의 경험에 속한다. <경성학교>에서 내게 그것은 과다한 물의 이미지이며, 물에 잠긴 소녀들의 끔찍한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들은 놀라울 정도로 영화의 홍보성 자료들, 사진들에서는 결코 보이거나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영화의 초반부터 끝까지 나를 공포에, 때로는 격한 슬픔에 잠기게 한 것들이다. 영화의 초반부 주란(박보영)과 연덕(박소담)이 호수에 빠져들게 될 때. 이미 그 순간부터 물(속에 잠긴 소녀들)의 이미지는
[김성욱의 영화비평]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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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조폭과 함께 한국 상업영화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직업 중 하나다. 수많은 영화들이 경찰을 원한다. 폭력에 대한 명분 있는 이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충무로에서는 격투와 추격, 스릴과 서스펜스를 좇는 데 경찰만 한 직업을 찾기 쉽지 않다. 할리우드에서 심심하면 등판시키는 로봇이며 공룡들에 비해 한국의 경찰관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는 간판급 선수다. 현실도 경찰을 원한다. 2012년 현재 국내 살인 발생 건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멕시코, 에스토니아, 미국 등에 이어 6위다. 더 암울한 사실은 2001년 이후 10년 동안 대다수 유럽 국가들에서 5대 강력범죄 발생이 꾸준히 줄어드는 사이 우리나라는 되레 84.5%가 늘었다는 점이다(한국경찰연구학회). 이 가운데 강간범죄는 1.8배나 늘었다. 한국영화에 경찰이 안 나올 이유보다 나올 이유가 더 많다고 봐도 될 정도다.
아이살리기 vs 실적올리기
역설적이지만 현실적-영화적 이유로
[송형국의 영화비평] 영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