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눈의 초점이 맥없이 흐려졌다. 2004년 말 동남아 쓰나미 때의 일이다. 당시 4년차 사건기자였던 나는 현지 사정을 알아볼 겨를도 없이 타이 푸껫으로 날아가야 했다. 현장에 도착하니 천혜의 에메랄드빛 바다와 수백구의 익사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눈앞이 뿌예지고 시야가 좁아졌다. 무의식에 이끌리듯 시신 옆 땅바닥 같은 곳에 시선을 두며 취재를 계속했다. 부패가 시작된 익사체는 초록색으로 변하며 부푼다. 체내가스 탓이다. 고온다습한 곳에서 빠른 속도로 빛깔과 부피가 변하면서 심한 악취를 낸다. 사찰마다 임시로 마련된 시신 집합소에는 도리 없이 썩어가는 시체 더미 옆에 새로 들어온 희생자의 몸들이 쌓여갔다. 유족의 신원 확인 전까지는 매장이나 화장을 할 수 없다. 생존자들은 이미 형체를 분간할 수 없게 된 시신들을 하나하나 들춰보며 가족의 생사 여부만이라도 알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 당시 쓰나미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23만명이 넘는다.
어떤 여인은 시댁에 알리지 않은 채 친정 부모와 남편, 자녀와 함께 연말 여행을 왔다가 가족을 전부 잃고 자신만 살아남은 뒤 시부모와 마주해야 했다. 어떤 신혼부부는 여행사 사정 때문에 바다 풍경이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업그레이드된 숙소를 배정받았다가 변을 당했다. 신혼여행을 떠나 연락이 끊긴 자식을 찾으러온 어떤 부모는 바닷가에서 발견한 여행가방만 올려놓고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아들딸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산 자의 지옥을 독자의 일상으로 전해야 했던 나는 그 수많은 지옥 대부분을 기사화하지 못했다. 기자로서는 0점짜리지만 의도한 게 아니었다. 어떤 자율신경계의 명령이라고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일을 마치고 안락한 숙소로 돌아오면 눈물이 나거나 속이 메슥거리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숨쉴 수 있는 것에 안도하며 공항에서 챙겨간 초코바를 꺼내 우걱우걱 씹곤 했다.
구원을 섣불리 단언하지 않는
나는 지금 <사울의 아들>의 영화언어가 윤리적 선택이라기보다 과학적 선택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보이는 것을 안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안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예컨대 동남아 쓰나미를 다룬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의 영화 <더 임파서블>(2012)은 놀랄 만큼 사실적으로 현장을 재현하고도 끔찍한 장면들은 프레임 밖으로 뺐다. 윤리적 선택이다. <사울의 아들>은 얕은 피사계심도, 잦은 초점거리 이동, 좁은 화각과 화면비, 선별적으로 편집된 사운드 모두가 극한상황 속 인간의 감각기관을 과학적인 태도로 옮겨온 것이다. 이 영화의 형식은 곧 지옥에 처한 한 인간의 생물학적 실체다.
<사울의 아들>은 지옥 속에 강제 동원된 한 경계인의 이야기다. 사울(게자 뢰리히)은 가스실에서 스러져간 유대인들의 사체를 옮기고 태우고 치우는 ‘존더코도’(Sonderkommando, 시체 처리반)다. 존더코만도 대원들은 음식과 술, 몇 개월의 생존을 제공받는 대신 야만적 노역에 시달린 뒤 처형당했다. 동족을 가스실에 몰아넣고 그 시신을 소각 처리하면서 그들의 영혼은 진작에 살해당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존더코만도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았고 그들 자신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자신들의 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형상화하기란 어렵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사울의 아들>은 보지 못한 것을 상상으로 메우는 대신 인물 곁에 바짝 달라붙어 영화가 볼 수 있는 것과 희미하게 보이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단호하게 가른다. 이는 프리모 레비의 “(존더코만도들에 대해) 연민과 준엄함을 동시에 가지고 성찰해보기를 요청한다”는 주문에 답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울은 어느 날 가스실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한 소년을 발견하고 눈에 초점이 잡힌다. 나치 친위대 장교가 끝내 소년을 죽이는 모습을 두눈 똑똑히 뜨고 바라본다. 이후 짐승 혹은 기계로 생존하던 그가 인간의 행위, 즉 절차를 갖춘 장례를 도모한다. 히브리어로 ‘(신께) 구한다’ 또는 ‘희망’이라는 뜻의 ‘사울’이라는 명명은 충분히 직접적이다. 영화의 1차 목표는 수시로 틈입하는 발생 상황들을 관객 앞에 직접 제시한 다음 주인공의 지근거리에 데려다놓는 것이다. 종종 1인칭 시점숏인 줄 알았던 프레임 안에 사울이 들어오면서 포커스가 그의 뒤통수에 맞춰질 때, 우리는 인간의 인지 능력에 대한 한계를 직시하며 그저 사울을 따라다니게 된다. 거듭 말하지만 안 보이는 것을 안 보인다고 하는 것은 비관주의나 패배의식이 아니라 철저한 현실주의다. 대책 없는 낭만이나 근거 없는 기대에 구원이란 없다고, 이 직접적인 영화는 말하는 중이다. 헝가리 출신의 라슬로 네메시 감독은 프랑스에서 역사와 국제관계 및 정치를 전공한 사회과학도였다.
그런 차원에서 나는 문제의 소년이 사울의 아들이 맞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전리품 창고에서 일하는 여인 엘라가 사울을 대할 때 보이는 눈빛과 손짓, 그리고 이를 외면하는 사울의 태도가 그 근거다. 소년의 시신을 수습해놓고 “이번 물량은 어디서 왔는지” 동료에게 묻는 것으로 미뤄볼 때 “본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아닌” 아들이 훌쩍 커버려 사울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임을 추정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금발 소년을 포함해, <사울의 아들>에는 판타지가 개입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편이 단도직입적 현실주의를 지속하는 이 영화의 태도와 어울린다. 프리모 레비의 책에는 실제로 가스실에서 숨이 붙은 채 나왔다가 친위대 장교의 지시에 의해 죽임을 당한 16살 유대인 소녀와 존더코만도 대원들의 증언이 나온다. 레비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책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챕터도 ‘회색지대’라는 소제목을 단 이 대목이다. 이 이야기는 2001년 <그레이 존>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본 것’만을 보여주는 선택의 의미
<사울의 아들>(2016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이 경계에 내몰린 자의 도리 없는 몸부림이라면, <카운터페이터>(2008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는 경계인을 자처한 자의 타협적이지만 현실적인 아우슈비츠 생존기다. 극중 살로몬(칼 마르코빅스)은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으며 나치의 위폐 제조 계획에 투입된다. 영화는 종반까지 다른 유대인들이 겪고 있을 수용소의 참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독일군이 패망해 달아난 이후 살로몬 일행과 생존 유대인들을 맞닥뜨리게 함으로써 역시 ‘본 것’만을 보여준다. 경계인들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지 못했던, 다른 유대인 포로들의 참담한 몰골을 목도하는 장면은 충격이 크다. 본 것과 보지 못한 것, 그리고 외면한 것과 엄존한 것의 몽타주가 충돌을 낳는다.
21세기 들어 역사 속 경계인을 다룬 수많은 문학과 영화를 마주하며 우리가 질문할 것은, 가해자들이 얼마나 악독했고 희생자들은 얼마나 선량했는가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선과 악으로 편가른 다음 나 자신을 이분법 속 편리한 위치에 가져다놓는 태도가 얼마나 손쉽고도 도움되지 않는 일인지를 따지는 일이다. 결론을 예정해놓고 그에 맞는 화면과 말들만을 골라 편집한 뒤 같은 편에게만 박수받는 영상물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다. 정확해서 가치 있는 작품들은 지레짐작을 동원해 패거리를 이루는 대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과학으로 구분함으로써 심연에 가라앉은 것에 손길을 뻗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