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홧발에 짓밟히는 순수한 소녀, 악마와도 같은 일본놈들, 그리고 무기력한 조선의 아버지와 오빠. <귀향>은 염려했던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다. 개봉 전부터 SNS를 통해 논란이 되었던 위안소에서의 집단 강간 장면을 비롯한 일본군과 ‘위안부’에 대한 전형적인 묘사는 “폭력을, 그리고 그 역사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라는 진부한 질문을 다시 논의의 장에 올려놓았다. 일본인 개개인을 괴물화하지 않는다면, 조선인 개개인을 무기력한 소녀로 그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역사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일까. <귀향>은 폭력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 폭력이 된다. 그리고 그 폭력에 대한 논의는 피해자 재현 윤리뿐 아니라 ‘우리’를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 그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중요한 질문들로 이어진다.
폭력, 매혹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것이어야
첫 질문을 던져보자. <귀향>의 선정적인 재현은 ‘피해자 여성’에 대한 또 다른 폭력 아닌가? 물론 영화는 스스로 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 할머니의 증언에 바탕하고 있으므로 ‘사실적 묘사’에 충실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방대한 양의 증언에서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는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성 노예화 과정을 그리기 위해서 강간 장면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심지어 그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무조건적으로 대표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은 이 사회가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이 직접적인 성폭력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제로 ‘위안부’로 끌려간 두 소녀. 한명은 그곳에서 죽고 한명은 귀향했지만, 죽음은 둘 사이를 갈라놓지 못한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할머니’와 ‘소녀’의 만남을 그리는 <귀향>의 ‘위안부’ 서사는 2015년에 방영된 KBS 창사 70주년 특집 드라마 <눈길>의 서사와 닮았다. <귀향>이 강일출 할머니의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을 모티브로 하듯이 <눈길>은 꽃할머니 심달연의 꽃그림으로 시작되고, 두 작품 다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눈길>은 같은 증언, 다른 재현을 선보인다.
드라마는 발가벗겨진 채로 두드려맞는 여성의 몸을 날것으로 우리 앞에 던져놓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그렇게 한낱 ‘몸뚱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하루하루와 그 일상을 버텨내는 마음이다. 예컨대 <귀향>이 강간당하는 ‘처녀’의 비명을 담아낼 때, <눈길>은 매일 반복해야 했던 콘돔 세탁의 비루함을 보여준다. <눈길>에서 여성은 그저 ‘유린당한 몸’으로 이미지화되지 않는다. 주인공 스스로가 자신을 ‘짓밟힌 짐승’으로 여길 때에도, 카메라는 그를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
폭력을 스펙터클로 만드는 것이 피해자의 고통을 묘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폭력을 볼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 굳이 우회로를 택하는 것이 피해자를 또다시 대상화하고 물신화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미하엘 하네케의 말처럼, 폭력의 재현은 폭력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굿, 귀신, 영매의 서사
<귀향>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국가의 완전한 부재’다. 그렇게 사라진 일본과 조선/한국은 사악한 ‘일본인’과 무능한 ‘조선/한국 남자’라는 정형으로 개인화된다. 오빠는 동생을 구하지 못하고, 아버지는 딸을 지키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무능은 현재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여자들은 미친년이 되거나 불귀의 객이 되고, 접신을 통해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영매가 된다. 물론 국가의 부재야말로 이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도 ‘위안부’ 문제에 책임감을 가지고 대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영화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굿이라는 민중의 문화적 형식에 기대는 것이 서사적 힘을 가지고 대중을 매혹시킨다.
무엇보다 굿이라는 서사적 장치는 일본 정부가 치워버리려고 하는 ‘평화의 소녀상’의 상징적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는다. 소녀상에서 단단하게 주먹을 쥔 소녀의 그림자는 할머니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그림자의 가슴에는, 희생자의 혼을 기리는 것이자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고통의 제도적 해소를 상징하는 희망의 나비가 난다. 소녀상 자체가 과거와 현재를 잇고, 생존자와 희생자를 연결하며, 그 역사를 잊지 않음으로써 해원(解寃)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귀향>이 그리는 떠난 자 정민(강하나)과 살아남은 자 영옥(손숙)의 만남, 그리고 그 위를 나는 나비의 형상은 소녀상의 전치(轉置)다. 여기서는 할머니가 물질성을 띤 육체로 그려지고 소녀가 할머니의 영혼의 그림자로 존재한다.
특히 정민의 혼을 ‘귀향’할 수 있도록 이끄는 영매 은경(최리)은 ‘위안부’ 여성들이 겪었던 그 성/폭력의 역사가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에 머물지 않으며 가부장제의 보편적인 폭력으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폭로한다. 은경이 영매가 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그래서 중요했을 것이다. 은경은 성폭행을 당하고 그 가해자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까지 목격하면서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 이성의 언어를 넘어서는 자, 그 제도의 틈새에 존재하는 자, 영매가 된다.
그러나 궁금해진다. 과연 생존자에게 세상을 떠난 동무와 그로 상징되는 고통의 기억은 영매를 통해서만 불러올 수 있는 타자였을까. “몸은 돌아왔지만 마음만은 그곳에 있었다”는 영옥의 말은 생존자들이 삶 속에서 언제나 죽은 자들의 혼과 함께였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니 도대체 왜 영매여야 하는가? 다시 <눈길>을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생존자 할머니 종분(김영옥)은 돌아오지 못한 소녀 영애(김새론)의 영혼과 일상적으로 만나고 대화한다. 종분은 귀향 후 영애의 이름으로 살아왔는데, 그것은 종분에게 그 과거가 ‘귀신의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것’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랜 침묵을 깨고 이 사회에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리게 한 것은 ‘진혼’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할머니들의 용기와 결기였다. 그리고 그 옆을 지켜온 살아 있는 운동들이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했던 재판에 지고서도 자신의 싸움을 계속했던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9, 감독 안해룡)의 ‘위안부’ 피해 생존자 송신도 할머니와 그의 동지들을 떠올려보자. “재판에서는 졌지만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 단단함을 기억해보자. 그를 움직였던 힘은 전쟁 그 자체와 성 노예화라는 폭력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그러므로 접신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시간을 공유할 수 없고, 기억/기록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화해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다는 상상력이야말로 사유의 지체와 정치적 퇴행을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다.
12•28 ‘불가역적 합의’와 계속되는 제국주의
물론 ‘기적의 흥행’이라고 평가되는 대중의 열광 이면에는 12•28 ‘불가역적 합의’가 놓여 있고, 이는 텍스트를 초과한 논의를 요청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의미에서도 비판적인 논의는 계속되어야 한다. <귀향>이 선보이는 서사와 이미지, 그리고 그를 둘러싼 정치적 맥락의 결합이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한-미-일 안보체제’라는 이름의 제국주의가 내셔널리즘이라는 배타적 공동체 감각을 통해서 어떻게 영속되는가이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은 ‘미-일 안보체제’ 위에 성립했고, 2015년 미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강행된 일본의 집단자위권 법안 표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체제는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 공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중국을 견제하고 동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독도를 둘러싼 영토권 분쟁으로 악화된 한-일 관계의 회복이었다. 12•28 ‘불가역적 합의’는 양국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정치적 제스처였으며, 한-미-일 안보 및 경제체제의 새로운 구축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했다. 불가역적 합의가 발표되자마자 미국이 동아시아 평화 운운하며 반색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양국은 까다로운 독도 문제를 제쳐두고 ‘위안부’ 문제를 쉬운 해결책으로 내던진 셈이다. ‘위안부’ 피해자는 또다시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
<귀향>의 놀라운 흥행은 이 12•28 합의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자 항의의 표시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 일본인 개개인은 괴물이 되어버렸고, 한국인은 그 이미지를 경유해 분노하고 역사에 대한 기억을 만들며, 다시 ‘우리’라는 정체성을 형성한다. 영화의 역사 재현이 일종의 보철 기억으로서 공적 기억의 누락된 부분을 채워가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서로 영혼 없는 ‘평화로운 화해’를 말하면서 전 지구적 군사주의를 지속하고, 바로 그 때문에 한국의 대중은 ‘사악한 일본인’이라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소화하면서 ‘일본인’에 대한 혐오를 키운다. 그리고 이런 혐오는 일본 우익들의 존재양식이기도 하다. 이미 <귀향>의 제작에 참여한 재일조선인 배우들은 극우단체의 보복 가능성 때문에 공개적인 홍보 활동도 못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한•일 양국의 대중 안에서 펼쳐질 혐오의 다음 단계, 즉 ‘우세종’이 되어 지배하고 군림하고자 하는 열망일지도 모른다. 이야말로 제국주의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것이다. 제국주의는 증오와 차별, 배제의 정치를 통해 내셔널리즘을 넘어서는 세계 시민의 연대를 파괴하면서 영속된다.
해원이 아닌 해결, 그리고 ‘시민’에 대한 새로운 상상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해원이 아니라 제도적 해결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혼을 말하는 이 진부한 상상력으로 몰려가는 것이 정부에 제도적 해결을 요구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극장에 걸린 영화의 관객수가 정부에 대한 경고이자 메시지가 되기를 희망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참으로 ‘우리-관객’은 정치적으로 무기력하다.
우리의 논의는 진부한 재현에 대한 비판 그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귀향>이라는 텍스트를 경유해서 도달해야 할 곳은 어떻게 새로운 ‘우리’를 상상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많은 관객이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이 영화의 가장 위대한 순간은 엔딩 크레딧일 터다. 7만5천명의 ‘시민’들의 동참으로 만들어진 엔딩 크레딧. 그렇다면 이 ‘시민’은 어떤 공통 감각을 공유하고 있어야 할까. 한•일 양국 정부에 제도적 해결을 요구하는 동시에, 전 지구적 군사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이 지배체제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민이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귀향>을 보지 않으면 매국노”라거나, “<귀향>을 볼 때는 팝콘도 먹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시민은 아니어야 한다. 그렇게 역사의 폭력을 비판하면서 또다시 폭력과 배제의 이야기로 포섭되어 들어가는 시민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배제와 포함의 동학 속에서 형성되는 배타적 공동체 감각을 넘어서는 새로운 연대를 조직해가는 것이야말로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에 다다르는 길이며, 이 배반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하나의 방법이다. 이제 이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