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죽여주는 여자>를 보고 극장을 나서는 길에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이하 ‘판도라’)는 ‘막달레나 공동체’와 ‘용감한 여성연구소’의 제안으로 시작된 용산 성매매집결지 여성들의 사진 모임이자 이들의 작업을 일컫는 타이틀이다. 나는 그들을 <판도라 사진 프로젝트>(봄날의박씨 펴냄, 2016)라는 책을 통해 알았는데, 이 책에는 살면서 카메라를 든 경험이 없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용산 성매매집결지를 수천장의 사진으로 기록한 작업의 의의가 실려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소영(윤여정)은 ‘판도라’ 여성들과는 달리 카메라 앞에 서 있지만, 이들은 성매매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상태로 보이는’ 구조에서 삶을 이어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례로 ‘판도라’ 팀이 해외에서 전시 초청을 받았을 때, 피츠버그대학의 한 한국인 학자는 이 전시가 “‘한국인 사창가 사진전’으로 보일 것”(앞의 책, 196면)이라 말하면서 성매매 여성의 삶이 드러나는 순간이 마치 전적인 ‘성노동 찬성’ 표명의 자리로 여겨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내비쳤다. 이는 성매매에 대한 입장이 대개 ‘필요악’ 혹은 ‘여성에 대한 착취’라는 이분법적인 형태로만 이루어져 있어 빚어지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성매매 여성의 삶이 “가시적 비가시성의 공간”(같은 책, 262면)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엄연히 있지만, 당연히 없어 보이기를 강요받는 자리. 바로 거기에서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드러나기를 요구받는 방식. <죽여주는 여자>는 ‘판도라’와 마찬가지로 난감함 자체를 삶의 형식으로 삼킨 이들을 담는다.
필요 이상의 눈치 보기
그런데 석연치 않았다. 나는 자꾸 이 영화가 그 난감함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만 같았다. 소영이라는 인물이 오랫동안 지탱해온 삶의 근육이 난감함의 형식을 관통한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카메라의 시선 자체가 소영이 난감해하기만을 강제한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 타이틀을 띄우면서 시작하는 영화의 첫 장면은 소영의 시선으로 짜인 프레임이 이 영화가 중요하게 다룰 윤리의 척도임을 암시하지만(첫 장면으로 등장했던 하늘은 후에 소영이 일하는 도중에 바라보는 이미지로 다시 나타남으로써 이 영화가 어느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출발했는지 넌지시 알려준다), 영화가 진행되면서부터 카메라는 자주 위에서 소영을 내려다본다. 소영이 오갈 데 없어진 민호(최현준)의 손을 잡고 자신의 집에 들어설 때나 탑골공원 근처에서 서성이는 젊은이에게 먼저 다가가 ‘연애’를 제안할 때, 재우(전무송)를 따라 종수(조상건)네 집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를 때 카메라는 어깨를 움츠리고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소영의 삶을 위에서 그리고 멀리서 조망함으로써 그녀에게 주어진 세계가 그 바깥을 상정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거기에 갇힌 소영은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아래에서 위로 눈을 치켜뜨며 저 자신이 사방의 눈치를 보고 있음을 내내 표시한다.
어쩌면 그녀의 노동이 행해지는 정황상 그와 같은 표정은 당연할 수도 있다. 소영은 손님을 유치하기 위해 매일 발로 뛰어야 하고, 애써 손님을 ‘모시고’ 들어간 여관에서는 단속에 걸리지 않는 방편을 늘 마련해두어야 한다. 어떤 손님은 소영이 ‘정중하게’ 준비한 서비스 이상을 폭력적으로 요구하기도 하는데, 소영은 그러한 손님을 100% 받아들여야 한다. 손님과 단둘이 있는 방에서 소영의 역할은 ‘접대’하는 위치에 고정되어 있으므로 언제든 위험에 노출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소영이 성병 치료를 위해 들른 약국에서 박카스를 구매하는 동료를 마주치는 장면은, 소영과 같은 일을 하는 이들이 손님 유치를 위해 서로 치열히 경쟁함을 설명하기 위해 삽입된 것이기도 하지만 박카스를 제공하는 서비스나 일 때문에 발생한 질병 치료 모두 어쩔 수 없이 이들이 ‘스스로’, ‘알아서’ 감당해야만 하는 현실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소영은 일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나. 게다가 소영은 ‘박카스 할머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 청년에게 ‘누가 진실을 보고 싶어 하겠느냐,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본다’는 성찰적 목소리를 불쑥 들려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인물이 이주민센터를 찾아갈 때 도훈(윤계상)에게 동반을 요청하는 모습이나 과거의 동료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황급히 돌아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소영이 필요 이상으로 주위의 눈치를 살피느라 잔뜩 움츠러들어 있다는 혐의를 남긴다.
삶을 앞지르는 힘을 내재한 캐릭터
카메라가 소영의 눈치 보는 표정을 강제하는 것과 더불어, 영화는 자꾸 설명을 하려 든다. 예를 들어, 소영과 미군의 대화 장면을 통해 관객은 소영의 과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영화는 굳이 소영이 오랫동안 비밀로 품어왔을 자신의 역사를 재우 앞에 털어놓는 장면을 덧붙인다. 뿐인가. 도훈의 신체적 조건이나 티나(안아주)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도 기어이 인물들에게 설명조의 대사를 부여해 관객의 이해를 요청한다. 이 넘치는 설명들의 이면에는, 지금 사회의 분명한 구성원이지만 현실의 가시권 내로 잘 포섭되지 않는 삶들이 어떻게든 보이게끔 애써야 한다는 고민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관객을 오롯이 설득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카메라의 불안이 고민의 과정에서 발현되어, 과도한 설명의 톤이 영화에 얹어진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다른 삶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 태도가 만연한 우리 사회에서 영화가 내놓을 수 있는 리얼리티의 형상이라면, 어쩌면 소영이 최종적으로 눈치를 살핀 대상은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관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관객의 맞은편에, 소영은 그 주변 삶의 요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위치에 선다. 그녀가 눈치를 살피고 주변 삶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대가는 참혹하다. ‘죽여주는 여자’라는 제목이 섹슈얼한 뉘앙스의 은유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지시성을 획득하는 상황이 발발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죽음의 책임까지 전가시킨 남성인물들은 그녀의 최후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다. 마치 내정된 운명을 따르는 사람처럼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뤄주고, 교도소에서 국가가 호명하는 ‘미숙’이란 이름으로 생을 마무리한다. 소영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소영’이라는 이름으로 바꿨을 때 국가는 그녀가 불법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인물로 간주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삶에서 달갑지 않다고 여기는 ‘미숙’이란 이름으로 생을 마감할 때 국가는 ‘무연고’란 명목으로 그녀의 삶을 용인하는 것이다.
죽어서야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인증이 가능한 ‘소영/미숙’의 아이러니한 처지를 영화가 인물에게 과도히 덧씌운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난감함을 가로질러 툭 튀어나오는 소영의 웅얼거림은 따라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계산을 도와드리겠다’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도와주긴 뭘 도와준다는 것이냐, 돈을 대신 내주는 것도 아니면서”라고 소영 혼자 웅얼거리는 장면이 여기에 해당한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소영의 목소리가 명료하게 들리지 않도록 처리한다. 하지만 자발적이면서도 고갈되지 않은 솔직함이 스크린을 찢고 나올 때, 소영은 일말의 속사정으로 갈음되어버린 자신의 전체 삶을 앞지르는 힘을 분명히 내재하고 있는 캐릭터임을 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비친다.
하지만 이 웅얼거림을 몸 안에 가두고 사는 이가 어디 카메라 앞에서 눈치를 살피는 인물 하나일까. 나는 자꾸 우리 삶의 태도가 누추한 까닭에 어떤 난감함 앞에서 쩔쩔매는 상황의 탓을 영화적 문법의 빈곤으로 돌리는 건 아닌가 싶어진다. 현실로부터 몇 발짝 떨어진 자리에 있는 건 카메라가 아니라 구경꾼인 우리, ‘소영/미숙’의 삶과 분리하려는 ‘우리’가 아닌가. 영화가,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자는 여기에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있나. 그에 관해서는 안간힘을 다해 오래 생각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