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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나의 영화비평] <비밀은 없다>가 중학생 여자아이들의 세계로 돌아가 그곳에 머무는 이유

<비밀은 없다>

이경미의 여자주인공들은 창피함을 모른다. 왜일까? 아마도 낯이 두꺼워서, 머리가 나빠서, 눈치가 없어서가 아닐까. 또는 그 모두여서.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이들의 돌진은 희귀한 구경거리이다. 보통 한국에서 이런 허구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여자들은 이야기꾼의 보호를 받기 마련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기준보다 아름답거나 현명하거나 선량하다. 이중 어느 것이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 행동의 방어막이 되어주어야 한다.

<갈증>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이경미의 여자들에겐 그런 보호 따위는 없다. 아마 그들도 그런 것 따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내려오는 습관과 전통을 때려부수며 전진하는 둔탁하고 못생긴 장갑차와 같다. 공효진, 서우, 황우슬혜, 손예진, 신지훈과 같은 배우들에게 ‘못생긴’이란 말을 쓰는 건 얼핏 이상한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면 그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못생긴. 아무리 손예진이 화면에서 조각 같은 미모를 뽐내고 있어 도 그렇다. 많은 관객이 <비밀은 없다>에 당황하는 것도 이들의 존재방식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어떤 종류의 난장판도 허용되는 코미디 장르에 속해 있는 <미쓰 홍당무>(2008) 때와 달리 <비밀은 없다>가 속해 있는 스릴러/추리/정치물에 대한 관객의 기대는 보다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를 보자.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인 정치가가 경북 대산(글자 하나 바꾼 대구다)의 여당(색깔 바꾼 새누리당이다)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다. 여당 텃밭이지만 4선 의원인 무소속 후보 때문에 경쟁이 만만치 않다. 그리고 선거 15일 전 그의 중학생 딸이 사라진다. 정치가의 아내는 딸을 찾아나선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추리물의 도입부다. 이 장르에 속한 영화나 소설의 절반은 실종된 부잣집 딸을 찾아나서는 주인공의 여정을 담고 있지 않던가. 대부분 사소한 가정사처럼 여겨졌던 사건은 보다 큰 음모의 일부임이 드러나고 주인공은 그 속에서 개고생을 한다.

<비밀은 없다>의 배배 꼬인 플롯은 그중에서도 로스 맥도널드쪽에 가깝다. 실종된 딸의 가족이 루 아처를 고용하지 않고 직접 나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리고 그 딸과 엄마와 기타 주변 모든 여자들이 모두 이경미 캐릭터라면. 개봉 이후 종종 언급되는 나카시마 데쓰야의 <갈증>(2014)과는 많이 다른 영화이다. 유사성을 읽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성격이 다르다. 일단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딸을 찾으러 나서는 아버지’란 설정은 <갈증>이라는 영화의 개성이 아니라 그냥 장르 관습에 불과하다고 앞에서 말했다. <갈증>은 이성적인 영화가 아니며 탐문수사의 과정은 일단의 폭력적인 상황들을 엮기 위한 핑계에 가깝다. 그리고 관객은 영화 속 파괴천사인 딸 카나코의 내면엔 끝까지 들어가지 못한다. 그 캐릭터에게 내면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는 의외로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첫 번째 감상 때 당황한 관객에겐 재감상을 권한다. 복선은 충분하다. 대부분의 떡밥들은 회수된다.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의 설득력도 상당한 편이다. 단서들은 있을 법한 곳에 숨어 있다. 결말은 의외성과 논리를 모두 놓치지 않는다. 원래 하드보일드 추리물이 작가도 매듭을 제대로 맺지 못하는 복잡한 미로를 장르 개성으로 갖고 있는 걸 생각해보라. 이 정도면 영화는 장르 기준을 대부분 넘어선다. 무엇보다 사건과 관련된 모든 인물에게 완벽한 설명을 내놓고 있으며 관객은 이들의 내면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플롯의 구조만 본다면 <비밀은 없다>는 그냥 잘 만들어진 멀쩡한 추리물이다.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그런데도 수많은 관객은 이 영화가 이상한 장르물이라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보이는건 역시 딸을 찾는 어머니인 연홍(손예진)의 캐릭터이다. 사라진 딸을 찾는 엄마, 선거를 치르는 남편을 돕는 아내 캐릭터에겐 사람들이 기대하는 어떤 퀄리티가 있다. 그 캐릭터가 꼭 긍정적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기준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어렸을 때 가수한다고 가출한 적이 있고 공부 머리가 없는 이 집요한 광주 출신 여자는 그 기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으며 알고 있다고 해도 관심이 없다. 관객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애교를 떨 생각이 없는 이 인물은 끝까지 장르의 틀과 충돌한다. 죽었을지도 모르는 딸을 찾는 상황에서도 연홍은 신경질적이고 불편하고 어리석고 우스꽝스럽다. 탐정으로서 믿음이 가지 않는다. 관객이 불편한건 당연하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서면 연홍이야말로 이 이야기에 맞는 유일한 탐정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영화에 나오는 경찰들은 모두 유능한 전문가들이고 중반까지는 당연히 연홍을 앞서간다. 하지만 결국 진상에 도달하는 것은 경찰이 아니라 연홍이다. 그건 경찰이 갖고 있지 않은 정보를 연홍이 갖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연홍이야 말로 사건 당사자인 중학생 소녀들과 의미 있는 교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 곳곳에서 관객은 보고 있으면 어이가 없어서 싱거운 웃음이 나오지만 연홍과 상대방 아이들만은 진지하기 짝이 없는 상황과 계속 마주치는데, 탐정으로서 연홍이 우위를 보이는건 바로 이 부분에서다. 연홍은 사건 표면의 미성숙한 우스꽝스러움에 교란되지 않는다. 스스로가 제대로 된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보이는 건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앞에서 말한 하드보일드 추리물 공식으로 돌아가보자. 이 장르에서 사라진 소녀의 실종사건은 일종의 열쇠이다. 그 뒤에는 살인과 정치적 음모와 같은 더 큰일들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대부분 남자들의 힘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다. 진상 끝에 ‘하드보일드 팜므 파탈’ 캐릭터가 숨어 있다고 해도 그 폭력적인 세계의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에서 소녀의 실종은 그 세계를 폭로하고 그 세계에 도전하기 때문에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비밀은 없다>에서 그 가치의 우선순위는 역전된다. 소녀의 실종은 처음엔 큰 음모의 일부처럼 보인다. 계속 파다보면 남편과 상대 후보를 둘러싼 정치적 암투와 연결될 것 같다. 뭔가 더 크고 거창한 세계가 열릴 것 같다. 하지만 수사가 진척될수록 영화는 정치암투에서 벗어나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두 중학생 소녀의 내밀한 삶 속으로 들어간다. 뭔가 큰일을 저지를 것 같았던 남자어른들의 사정은 배경으로 밀려나고 도구화된다. 영화가 끝날 무렵엔 누가 선거에서 이기는가, 누가 처벌받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당연히 관객은 영화가 게임의 규칙을 위반했다고, 영화의 무게중심이 엉뚱한 곳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정치하는 남자어른들이 중학생 여자애들 이야기의 배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차라리 어른들의 이야기를 잘라내고 아이들만 등장시켰다면 그나마 이해가 쉬웠을 것이다.

그건 그들 사정이고, 이경미 세계에서 그런 우선순위는 그냥 당연한 것이다. <비밀은 없다>는 귀소본능에 끌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중학생 여자아이들의 세계로 돌아가고 그곳에 머문다. 그곳은 아직 ‘여자어른’이 되는 사회화의 과정을 온전히 거치지 못한 아이들이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며 덜 자란 발톱을 휘두르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중2병’이라는 생기 없는 단어 밑에 은폐되는 이 세계의 멘털리티를 이경미처럼 겁없고 염치없고 난폭하고 뻔뻔스럽게 그려낸 예가 있었던가? 관객이 낯설어하고 불편해하는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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