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가씨>는 내가 늘 보고 싶었던 유형의 박찬욱 영화였다. <복수는 나의 것>(2002) 이후 박찬욱의 모든 영화는 서사가 비틀리거나 왜곡된 서사의 틈에 자기 스타일을 밀어넣었다. 원작이 있었던 <올드보이>(2003)와 <박쥐>(2009)의 경우에도 서사는 기승전결로 치고 올라가 예측할 수 있는 지점에 만족스럽게 도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영화는 처음부터 뭔가 과잉결정된 지점들이 있어서 클라이맥스로 올라가야 할 곳에서 그것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안티클라이맥스로 방향을 트는 인상을 주는데, 이 방면으로 최고작은 <친절한 금자씨>(2005)다. 이 방식이 내게는 좀 어색했던 영화 <박쥐>에서는 박찬욱의 예술가로서의 초자아가 유희적이고 전복적인 그의 스타일을 결박하고 있어서, 인간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에밀 졸라의 원작을 신부의 존재론적 고뇌와 결합시키려 한 서사의 이질적 요소들이 끝까지 붙지 않고 아우성치는 가운데 그것이 박찬욱식 인장이라고 선포하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그가 기승전결이 정연한 서사구조 안에서 자기식으로 틈을 내는 게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지 않을까 내심 궁금했다. <아가씨>가 바로 그런 영화였다.
<아가씨>는 아주 잘 만든 강탈 범죄영화로 손색이 없으며 여자들의 욕망을 전면에 내세워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를 지질하게 만든다. 여성들의 성욕(이라고 하지만 성적 판타지)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면서 정치적 올바름을 선전하는, 한국적 상황에선 더이상 경계를 더 헤집고 나갈 영역이 없어 보이는 대중영화다. 성공한 감독의 권력으로만 할 수 있는, 박찬욱 그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을 거대한 세트를 장난감으로 갖고 놀면서 영화 작업 그 자체를 즐기는 가운데 대중의 기호를 충족시킬 지점을 찾아 적당히 놀래키고 여성들이 자기들끼리 즐기면서 이기는 판타지를 여성혐오가 만연하는 사회를 향해 제공한다는 대단한 미션을 박찬욱은 성취했다. 여자들의 동성애 오르가슴을 자랑스럽게 화면에 전시한 후에 달이 예쁘게 뜬 바다를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에게 이래도 만족하지 않겠느냐고 짓궂게 묻는 듯 끝나는데 이상하게도 나는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원작의 통속한 리얼리즘을, 성적 판타지 인장을 세게 집어넣은 명랑한 강탈 장르영화 플롯으로 바꾼 결과물로 이 이상의 해피엔딩은 없을 것이며, 관객이 원할 것 같은 결말이라서 내가 허전했던 건 아닐 것이다.
가짜 몸짓과 진짜 감정
<아가씨>의 1부와 2부는 각각 하녀 숙희와 여주인 히데코의 내레이션으로 전개된다. 1부와 2부는 그에 따라 숙희와 히데코가 각자 보고 경험하는 것에 따라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같은 상황을 재연하고 부연한다. 이야기가 두터워지면서 반전이 가능한 복선을 예비하는 강도가 세지며 이 때문에 모든 게 갈무리되는 3부는 리듬과 톤이 흔들리지 않은 채 달려간다. 여기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숙희와 히데코, 그녀들의 목소리다. 그녀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시나리오대로 사태를 예측하고 있으며 관객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알려준다. 동시에 그녀들은 상대방을 향해 각자 시나리오대로 맡은 역할을 들키지 않도록 연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녀들의 연기는 곧잘 ‘진짜’ 감정을 그러내며 그 감정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아니면 연기임을 잊고 내뱉는 무의식중의 대사로 드러난다. 숙희가 처음 히데코를 만났을 때 자기 연기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한 듯 혼란스런 마음을 내레이션으로 내뱉는다. “염병. 이쁘면 이쁘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사람 당황스럽게스리….” 히데코도 마찬가지다. 덫에 걸린 숙희를 요리할 줄 알았던 히데코는 숙희에게 가닿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속마음을 드러낸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1부와 2부에서 가짜/연기와 진짜/속내의 파열은 관객을 흥미진진한 관람석에 위치하게 만든다. 자신도 연기하는 주제에 숙희는 백작의 유혹에 넘어가는 듯 구는 히데코를 보며 “가엽고도 가엽고나…. 가짜한테 맘을 뺏기다니”라고 생각한다. 히데코도 마찬가지로 연기자로서는 치밀하지 못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숙희에게 마음을 빼앗겨 “니 얼굴, 자려고 누우면 꼭 생각나더라 난”이라고 숙희에게 털어놓는다. 관객은 이미 그녀들의 말과 행동이 그녀들의 마음과 어긋나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대사들은 친절한 지시 기능과 함께 통쾌감과 유머를 전해주는데 특히 숙희 역의 김태리가 툭툭 던지는 대사의 질감은 압도적이다. 히데코가 변태 삼촌 코우즈키에게 훈련된 말과 언어로 유체이탈된 인형 같은 존재감을 지닌 여자라면 숙희는 위장막을 칠 만한 언어의 무기 없이(그녀는 배우지 못했고 글자를 읽을 줄 모른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며 정제되지 않은 몸짓과 말을 그대로 토해내는 박력 있는 여자다. 프로답지 못하게 감정을 드러낸다고 자신을 책망하며 성적 위협을 가하는 백작에게 숙희는 ‘좆대가리’를 치우라고 또렷하게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와 위장하는 데 서툰 그녀의 모습은 연기자로서 부적절한 그녀의 자질을 드러내는 동시에 진짜/가짜의 대립항 속에 구축된 이 영화의 1, 2부 서사에서 잉어처럼 팔팔 뛰는 그녀가 서사를 추동할 수 있는 진정한 주인공임을 증명한다.
남자들의 억눌린 욕망의 수동태로서 행위하는 것에 익숙한 히데코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숙희의 자질은 유혹자로서의 자질이 아니라 보살피는 자로서의 자질에 가깝다. 그녀가 처음 소개될 때 버려진 아이들을 키워 내다 파는 빈민굴의 소굴에서 그녀는 갓난아기들을 보며 자신에게 젖이 나오지 않는 걸 안타까워한다. 치통에 시달리는 히데코를 위해 숙희가 골무를 손가락에 끼워 입속을 안마해주는 장면은 이 영화를 통틀어 (섹스 장면보다 더) 관능적인데, 넣고 앞뒤로 문지르는 것이 함의하는 동작이 노골적으로 섹스를 가리키면서도 보는 이에게 어떤 섹스 묘사보다 훨씬 공감각적인 희열을 준다. 2부에서 밝혀지는 대로 히데코가 음란한 서적들을 보관해놓은 삼촌 코우즈키의 거대한 도서관에서 일인 외설극을 공연하는 인형 같은 존재이며 미친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미치기 직전인 희생자였다면 숙희는 남자들이 지배하는 말과 상상의 세계에서 자유롭고 무식한 하녀이자 그 때문에 지식으로 왜곡되지 않은 본능의 담지자로서 히데코를 구원한다.
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숙희는 김기영의 <하녀>(1960)에서 이은심이 연기한 하녀 주인공을 박찬욱식으로 업그레이드해 재창조한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발기불능일 것 같은 주인 남자를 유혹해 쓰러트린 후 정부인 행세를 하려드는 <하녀>의 주인공은 아무 때나 미닫이문을 열고 주인들의 경계를 침범하고 2층에 한정돼 있는 자기 영역을 무시하고 1층으로 왔다 갔다 하는 계단의 지배자였다. <아가씨>에서 숙희는 처음 히데코의 작업실인 도서관에 갔던 날 방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코우즈키의 제지를 받으며 바닥에 만들어져 있는 뱀의 형상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하녀>에서 이제 막 중산층으로 발돋움하는 처지였던 피아니스트인 주인 남자가 안방이 있는 거실과 피아노 작업실과 하녀의 방이 있는 2층 양옥건물에 살며 생활고에 치여 억눌린 발기불능자였다면, <아가씨>에서 역시 발기불능자인 코우즈키는 친일행각으로 모은 재산으로 음란서책을 수집해 그것들의 복사본을 팔아 재산을 불리고 그의 발기하지 않는 성기의 보완물로서 끝이 없이 펼쳐질 것 같은 거대한 음란도서관을 갖춘다. 숙희는 성기가 서지 않는 남자들의 장난감 인형이었던 히데코에게 섹슈얼리티를 각성시키는 존재로서 나중에는 코우즈키의 거대한 도서관에 진열된 온갖 책들을 파손하고 불태운다. 이때 도서관의 다다미방 중앙에 있던 틈새 물구덩이에 책들을 집어던지고 거기에 빨간 물감을 들이붓는 숙희의 행동은 더할 수 없이 자극적이면서 비유적인 외설로 (그때까지 자행된 남자들의) 변태적인 외설을 응징하는 이 영화의 상징적인 몸짓을 보여준다.
판타지가 구현한 현실로부터의 탈출
히데코가 머무는 공간의 지배자 코우즈키는 양관과 화관이 동시에 있는 대저택을 소유한 친일 귀족이며 그가 소유한, 겉으로 압도적인 건물과 그 건물 내의 온갖 호사스런 장식들은 역설적으로 그의 결핍된 관능의 표식들이다. 물건들은 가질 수 없는 것들의 영원한 대체물이며 그것들의 화려함은 가질 수 없는 것의 초조한 징표들이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후기영화에서 퇴락한 생명과 관능의 대체물로서 높이 매달린 샹들리에와 우아한 복식들이 화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듯한 느낌을 줬던 것을 상기하면 이 영화에서의 유사 귀족적 장식물들이 함의하는, 특히 히데코의 화려하지만 어두운 기색을 떨쳐내지 못하는 듯한 의상 같은 것은 코우즈키가 창조하고 조종하는 억압적인 변태적 세계의 반영물로 보인다. 이 세계에서 남자들은 실제로 서지 않는 자신들의 성기를 위무하는 행위로 음란서적과 화첩에 빠져 그들끼리 은밀한 거래를 트며, 그것은 코우즈키의 부를 연장하는 수단이기도 한데, 가능하다면 코우즈키는 그의 거대한 도서관을 영원히 넓히고 싶을 것이다.
<아가씨>의 3부에서 코우즈키는 히데코와 도망친 백작을 잡아와 도서관 지하실에서 백작을 고문한다. 코우즈키는 백작의 손가락을 자르며 백작에게 히데코와의 성교가 어땠는지 상세히 설명하라고 다그친다. 손가락은 자지의 대체물이다. 코우즈키는 백작의 자지 대신 백작의 손가락을 자른다. 아마 계속 했다면 결국 백작의 자지를 잘랐을 것이다. 꼼수를 부려 코우즈키가 먼저 죽게 만든 후 백작은 “그래도 자지는 지키고 죽을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중얼거린다. 그런 백작도 그 자신이 그리 귀하게 여기는 자지를 잘 다루는 기능의 소유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그의 자지를 갖고 할 수 있는 것은 겨우 히데코를 강간하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이제부터 속옷을 찢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남녀 성기를 간접적으로 지칭하는 데 익숙한 문화권에서 너무나 직접적인 표현으로 자지, 보지를 언급하는 이 영화는 그 때문에 웃음을 주며 남자들의 남근 우월의식에 대해 숙희의 대사를 빌려 “좆대가리를 치우라”고 직접 언명한다.
남자들의 삽입성교에 대한 과시적인 판타지는 정복, 지배, 소유 등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연관된다. 남자들은 자지를 갖고 있으므로 삽입성교를 통해 여자를 복종시킬 수 있다고 과시하지만 실제로 남자들 모두가 그 자지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거대하고 튼튼한 남근을 선망하면서도 그것들을 가질 수 없는 남자들이 대신 선택하는 것은 코우즈키와 그의 손님들이 행하는 대로 지배 복종의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지식의 확대 유지이며 그것들을 지속시킬 수 있는 언어와 행위 놀이다. 이것은 영화 속 코우즈키가 주관하는 낭독회에서 히데코의 몸과 목소리를 통해 대리 실연되는데 이 미친 남자들의 역할 놀이에 봉사하지 않는 여자들은 히데코의 이모처럼 남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자지가 제대로 서지 않는 남자들의 역할 놀이에 동원되던 히데코를 글을 모르는 숙희가 구원하는 것은, 거대한 도서관이 온통 남자들의 음란 판타지에 소용됐던 것처럼, 남자들의 판타지를 전파하는 남자들의 지식에 숙희가 전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숙희의 의도하지 않은 능동적 역할에 따라 숙희와 히데코는 코우즈키가 지휘하던 역할 놀이에서 빠져나오고 백작이 짜놓은 각본에서도 빠져나온다.
아름다운 섹스의 실연이 아쉬운 이유
이제 서두에서 얘기했던 허전함의 이유를 말해야겠다. 남자들의 남근적 지식에 감염되지 않았던 숙희는 히데코에게 진정한 관능의 불꽃을 점화시킨다. (“대단하세요 아가씨…. 어쩜 이렇게 하나도 모르시면서… 타고나셨나 봐요.”) 그녀들은 난생처음 맹렬하게 섹스하는데 우아하게 안무된 카메라의 동선을 타고 아름답게 섹스를 실연한다. 실연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제국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계급과 성차를 두고 펼친 이 영화의 플롯의 핵심은 결국 병든 남자들의 가짜 세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는 여자들의 승리담에 놓여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그녀들이 주고받는 섹슈얼리티의 영화 속 전시가 내게는 한없이 어색해 보였다. 이것이 어차피 연출된 것이고 대립항들의 충돌 속에서 우리가 응원하는 주인공들의 해피엔딩을 전시하는 연기라는 것도 알겠는데 어쩐지 영화가 근원적으로 제기한 진짜/가짜의 대립항의 전제와는 충돌하는 것으로 보였다. 섹슈얼리티는 그들에게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일지라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묘사될 때 정직해지고 오히려 더욱 관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들의 육체를 온전히 다 담아낼 수 없는 카메라가 아름답고 우아하게 안무된 형태로 아무리 접근하더라도 특정 부분을 담아내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려 찍는다면 필연적으로 엿보는 앵글이라는, 미학적으로 진부한 상태로 퇴화하고 그건 아무리 여성들의 섹스를 있는 그대로 찬양한다고 선언하더라도 외설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성의 육체를 풍경처럼 찍었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구름 저편에>(1995) 같은 방식이 아니라면, 검열에 가까운 심의제도가 남아 있는 한국에서 이런 시도의 가림막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보여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보여주지 않는 것이 훨씬 나았다고 본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히데코의 장갑을 대치한 숙희의 골무가 관능을 표현하는 매개로 충격적이었듯이.
<아가씨>는 히치콕의 <레베카>(1940)처럼 거대한 광기에 사로잡힌 대저택에 하녀가 들어가는 도입부로 시작한다. 비스콘티의 시대극에서처럼 그곳에는 화려한 의상을 입은 아가씨가 자리한 대저택의 퇴폐적인 내부 장식물들로 도배돼 있다. 이곳에서 남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여성상을 가상으로 설정해놓고 낭송극을 즐기며 성에 차지 않으면 시체처럼 연기하는 여자와 인형극 놀이도 마다하지 않는데, 이것과 견줄 만한 것은 시체애호증과 같은 남자들의 도착을 우아하게 다룬 히치콕의 <현기증>(1958)이다. 김기영의 <하녀>에서처럼 마침내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하녀 여주인공은 주인 아가씨와의 연정을 기화로 그 집안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히치콕과 비스콘티를 경유하면서 김기영이 1960년대 한국 사회에 가한 미적 충격과 맞먹는 것을 현재 버전으로 시도했다는 점에서, 계급과 성차를 한번에 묶어 영화언어의 펀치로 내밀었다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미적 혁신가다. 장르의 관습을 테크닉만으로 돌파할 수 없다는 한계도 있으나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대비를 통해 가짜와 진짜/남근적 판타지와 여성적 욕망 등의 대립항을 세우고 부수려 한 영화언어의 격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