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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랑의 영화비평] <우리들> 연출가의 눈으로 바라본 ‘섬세함’의 정체
이미랑(영화감독) 2016-06-21

<우리들>

이 지면이 비평을 위해 마련된 자리임을 알고 있다. 작품과 거리를 유지하며 분석과 논리를 바탕으로 차분한 글쓰기가 요구된다는 것을 숙지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감흥을 앞서 드러내는 것으로 이 거리를 뭉개려 한다. 그래서 이 지면이 개인적인 감흥에 골몰한, 순진하고 무지한 모양새일지라도 이것이 이 영화를 대하는 가장 솔직한 방법이라 믿는다.

<우리들>을 보고 아이처럼 신이 났다. 영화의 메인 포스터를 첨부하여 “강추!”라고 이곳저곳에 문자를 보냈다. 도통 무심하던 이가 여러 통의 문자를 보내는 건 수신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무엇보다 당황한 건 발신자인 나였다. 열성으로 들떠 기분까지 좋아지는 이 ‘신남’, 정말 오랜만이었다. 단명하게 <우리들>이 좋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를 보았다는 것만으로 관객으로서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좋다’라는 형용사가 묘연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를 감각하는 다른 단어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좋다. 무엇보다 거의 모든 숏이 이 자리밖에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제자리를 잡고 있다는 인상 때문이다. 조르조 모란디의 그림이 병과 컵, 상자 따위의 진열이어도, 그 사물들이 그 시공간에 적확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도 좋은 것처럼.

오프닝 시퀀스에 없는 것

검은 화면 위로 아이들의 ‘가위바위보’ 소리가 들려온다. 이긴 아이가 곧장 환호하며 친구 하나를 호명한다. 이어서 진 아이가 또 다른 친구를 호명하고, 다시 들려오는 가위바위보. 이어지는 탄식과 환호, 주고받는 호명의 사운드로 관객은 두 아이가 우두머리가 되어 편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영화의 첫 숏이 불이 켜지듯 불현듯 뜬다. 단정하게 단발머리를 한, 열살 남짓의 선(최수인)의 얼굴이다. 좀처럼 특징 없는 말간 얼굴은 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짐작할 수 없게 한다. 카메라는 선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고, 편을 가르는 중심 상황은 화면 밖 사운드로만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편이 짜일수록 애써 웃음을 짓고 있는 선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관객은 아직 선을 모르지만, 이 아이가 내몰리는 상황을 조금씩 인지한다. 마지막 두명만이 남은 상황. 선은 끝내 호명되지 않고, 얼굴에서는 억지웃음마저 사라졌다. 관객은 선을 둘러싼 상황을 파악하고 불편함을 동반한 긴장감을 느끼기 시작하는데, 보라(이서연)는 상대 우두머리에게 네가 잘하는 친구들을 전부 데려갔으니, 선을 다른 아이로 바꿔주면 안 되냐고 묻기까지 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컷 역시 첫 번째 컷과 동일하게 화면 밖 사운드와 선의 얼굴에 머물러 있다. 피구를 시작한 아이들의 흥분이 화면을 메우고, 관객은 아이들의 상기된 분위기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선을 따라간다. 이때, 상대편의 아이가 선에게 금을 밟았다고 소리친다. 또래보다 몸집이 작은 선의 주변으로 아이들의 얼굴 없는 상체가 둘러싸인다. 금을 밟지 않았다는 선의 주장에도 아이들은 선을 금 밖으로 떠민다. 선의 존재감뿐 아니라 물리적인 육체까지 멀리 내몰린다. 다음 컷, 금 밖으로 떠밀린 선을 카메라는 역시나 바라보고 있다. 선의 말갛던 얼굴이 차갑게 경직되어 있다. 관객은 선에게 동화되어 있다.

길게 묘사된 위의 장면들은 3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여섯개의 숏으로 구성된 <우리들>의 오프닝 시퀀스다. 관객은 초등학교 체육시간이라는 일상적인 상황에서 선을 바라보는 단일한 시선만으로 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정보를 제공받는다. 더불어 선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불편함과 함께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에 조바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오프닝 시퀀스에는 없는 것이 많다. 운동장 상황을 조망하는 설정숏도, 선을 둘러싼 아이들의 반응숏도 없다. 단지 선만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숏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숏의 진행은 오프닝 시퀀스뿐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철시키는 형식으로 기능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해묵은 형식의 반복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선을 비롯한 모든 아이들의 비어 있는 얼굴 때문이다. 어른의 얼굴이라면 불가능했을, 아이들의 말간 얼굴 위로 고였다가 금세 빠져나가는 정서의 조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관객은 충분한 감흥을 받는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의 얼굴은 물리적인 주인공이자 미장센이며 몽타주 자체가 된다. 이 영화가 반응숏이 부재하면서도 그것의 부재를 관객이 느끼지 못하는 것 역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풍요로운 단순함이다.

이 영화를 상찬하는 가장 주된 이유가 ‘아이의 시선’을 ‘섬세하게’ 드러냈다는 것일진대, 이러한 반응 역시 오프닝 시퀀스처럼 단순한 숏을 단계적으로 차곡차곡 쌓아가는 방식과 그 효과에서 비롯된다. ‘섬세함’의 정체는 숏을 쌓아가는 층위와 그 폭을 가늠하는 연출자의 사려 깊음에서 비롯된다. 모든 숏들은 영화의 중심에 놓인 아이들이 감내할 수 있을 만한, 건너가거나 오를 수 있을 만한 위치와 폭 안에서 조절된다. 아이들의 물리적인 걸음걸이의 폭이라고 불려도 좋을, 딱 그만큼의 폭으로 모든 숏들이 순차적으로 나열되고 있는 것이다. 단명한 예로 이 영화에선 숏의 비약이 없다. 시공간을 변주하고 뛰어넘는 점프컷도, 그 흔한 교차편집도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가 섬세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느끼는 까닭은 위의 숏들이 적확한 장소에 적확한 폭으로 쌓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행여 어른들의 시선이 침투할까, 끊임없이 단속하고 반추하는 윤가은 감독의 엄격한 연출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만난 것이 이렇게까지 신났던 이유는 한국영화에 대한 불안과 염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개인적인 신변에서 시작되었다고 고백해야겠다. 기형적인 한국영화의 지형도에서 <우리들>은 다른 등고선을 남길 수 있다고 믿기에 영화와 멀리 있는 이야기 역시 꺼내도 괜찮을 것이다.

거대 예산과 일등감 배우들은 천만이라는 관객석을 덜컥덜컥 내어주고, 그 많은 관객석에 내 자리 하나 없다는 게 외로웠다. 소외감에 고개를 돌리면, 이름은 가물해도 얼굴은 알고 있는 배우를 내세운 저예산영화에 금세 둘러싸인다. 예산이든, 영화의 컨셉에서 비롯된 프로덕션의 형태든 중간 층위의 영화는 없다. 천만을 담보하거나 저예산이거나 둘 중 하나다. 관객수 역시 이를 닮아 극다수이거나 극소수이다. 이러한 한국영화의 지형은 오랫동안 얘기되어왔고, 혹자는 좀더 기다려보자고 다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올해 초까지 ‘독립영화비행’을 연재하면서 피부로 와닿는 위기감은 실로 더했다. 간헐적이긴 하지만 혜성처럼 나타나 독립영화의 터를 돈독히 다져주던 건실한 영화도 보이지 않은지 여러 해이고, 영화 밖으로는 저예산이라기도 민망한 그보다 더 적은, 최소 예산의 프로덕션이 일반화되는 모양새로 굳어가고 있다. 숙련된 배우와 스탭들의 재능 기부가 미덕으로 가림막을 쳐도, 부족한 예산이 작품의 완성도에 끼치는 영향은 결정적인 것이고,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최소 예산이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지워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1억원 남짓의 최소 예산의 기저에는 극장 수익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극장 수익은 무시한 채 VOD로 팔렸을 때의 수익과 해외 판권 정도를 덧셈하여 남게 되는 잠정 이익이 최소 예산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영화’라는 단어에는 ‘영화관’ 역시 속해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영화관에 머물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파일로 변환되기 바쁜 영화들을 보면서, 이 영화들은 누굴 향한 영화들일까 자문하게 된다. 관객을 만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영화는, 만든 이의 존재증명만으로 그 유효성을 획득하는 것일까.

이 작품은 알려진 대로 두 기관의 협력 지원 작품으로 1억원이 넘는 예산으로 제작되었다. 이 영화의 프로덕션 예산만 놓고 보자면 이 역시 최소 예산이다. 하지만 다른 저예산•독립영화와 달리, 이 영화의 예산이 영화의 완성도를 담보하는 데 있어 장애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관객 입장에서 예산 부족으로 불거지는 숏 안의 공백과 기술적인 결함 등의 어떠한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몸에 꼭 맞는 옷처럼 내용과 형식이 어우러진

<우리들>을 보며 영화가 제 몸에 꼭 맞는 옷을 지어 입었다는 느낌을 받은 건, 앞서 묘사한 영화의 내연을 담당하는 내용과 형식의 조화로움뿐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방식, 그 자체에 대한 올바름에서 나왔다고 믿는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 제가 가진 몸의 크기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더불어 맞춰 입을 옷감의 폭과 질감, 가장 효율적인 마름질 방식까지 한땀 한땀 적확하게 구사한다. <우리들>은 초등학교 4학년 선과 지아, 보라라는 여자아이들을 중심에 두고 그들이 가까워졌다 멀어지며,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다시 서로에게 시선을 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필요한 것은 이제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핫한 배우의 기용도 아니고, 숏을 유려하게 만들 카메라 및 조명 등에 딸린 고가 장비도 아니다. 이 영화가 이 모든 것을 수용할 만큼의 여유도 없었을 테지만, 이 모든 것이 필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태도로서 영화가 가진 내연의 부피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것의 외연을 정직하게 구사하는 윤가은 감독의 태도는 지금, 여기서 저예산영화를 만들고 있는 창작자들의 거울이 될 만하다.

한국영화의 기형적인 지형 안에서 가장 건강하고 옳은 방식으로 ‘적응하고’ 있는 이 영화마저 영화관에, 그것도 넉넉하게 머물 수 없다면, 우리의 미래를 낙담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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