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시공(時空)이 있다. 하나는 시간이 정지된 곳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처럼 시간이 흐르는 곳이다. 시간의 정지와 흐름은 각 공간에서만큼은 절대적이다. 동시에 두 시간성은 서로에게 상대적이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겠다. 시간은 여기서든, 거기서든, 어디서든 흐른다. 다만 그 시간이 다르게 흐를 뿐이다. <가려진 시간>에는 이런 두개의 시공이 존재한다. 시간을 잡아먹는다는 전설 속 요괴 알이 깨진 이후, 시공은 두개로 쪼개졌다. 현실 속 시간의 흐름과는 다른, 모든 게 정지된 시공으로 몇몇의 아이들이 건너가버렸다. 그곳에선 이 아이들만이 살아 움직인다. 아이들만 사라졌을 뿐 현실의 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로 흐른다. 이 격심한 시차 때문에 두 시공간은 맞물릴 수가 없다. 그러니 ‘시간이 정지됐다’는 말로는 <가려진 시간>의 한쪽만을 말하는 게 된다. ‘가려진 시간’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생각해봤다. 무엇이 이 두 시공을 가리고 있는 걸까. 그 가림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간의 격차를 비집고 들어찬 것. 그것은 애석하게도 죽음, 또 죽음이었다. 얼핏 ‘시간이 멈춰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동화적 상상에서 출발한 듯 보이는 이 판타지물에는 서늘한 비감(悲感)이 어른거리다 못해 넘실댄다. 나아가 영화는 환상의 상상으로 죽음의 제의(祭儀)를 치러내고 있는 듯하다.
‘고립’에 대한 비유
초등학교 6학년생인 수린(신은수), 성민(이효제), 태식(김단율), 재욱(정우진). 이 아이들은 아이는 어른이, 어른은 노인이 되게 만든다는 전설 속 요괴 알로 추정되는 물체를 건드리고 만다. 그 알이 깨지는 순간, 잠시 자리를 비운 수린만 제외하고 성민, 태식, 재욱은 시간이 멈춘 ‘다른 세계’로 건너간다. 다른 세계는 현실의 시간을 기준으로 보자면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가버린다. 하지만 그 흐름은 오직 아이들에게만 적용될 뿐 그곳의 나머지 모든 생명체들은 정지해 있다. 숨을 쉬지 않는다. 마치 커다란 진공관 안에 모든 게 얼음이 돼 박제된 것 같다. 그곳에는 ‘흐른다’는 개념이 없다. 그러니 당연히 리듬도 없다(리듬의 그리스어적 어원이 ‘흐른다’가 아니던가). 굴곡 없는 곳에 생기가 있을 리도 만무하다. 죽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곳에 아이들만이 살아 있다는 건 또 얼마나 끔찍한가. 아이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삶에서 아마도 처음으로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재욱이 죽은 것이다. 재욱은 두손을 무릎에 깍지 낀 채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죽어버렸다. 그 모습은 시체가 사후 경직돼 있는 모습을 곧바로 떠올리게 한다. 아이들이 건너간 그 세계의 정지된 시간은 모든 걸 시체처럼 보이게 하기 충분하다. 죽음이 도처에 있다. 한번도 친구들 앞에서 운 적이 없다던 태식은 재욱의 죽음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죽음의 세계에 압도당한 것이다. 성민과 태식이 재욱을 끈에 묶어 재욱의 몸을 풍선처럼 띄운 채 백사장으로 향하는, 이후 재욱을 모래사장에 묻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순간이다. 죽음의 진공관에는 죽음조차 부패될 수가 없다. 그때 성민과 태식은 직감했을 것이다. 이 정지된 시간에서 나갈 수 없다면, 자신은 친구의 죽음을 또 한번 목격해야 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먼저 죽는 수밖에 없음을. 아이들의 즐거운 상상과 호기심이 일군 신세계일 수도 있었던 ‘정지된 시공’은 그렇게 죽음의 진공관이 됐다. 엄태화 감독은 <가려진 시간>의 시나리오를 쓰던 당시가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던 시기임을 말하며 참사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지 않았겠느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세월호 참사는 현실 정치의 심정지 상태이자 죽음이 수장돼 진공 상태로 버려진 참혹한 역사다. 세월호를 곧바로 끌어오지 않더라도, <가려진 시간>의 이 시공간은 한시적으로만 유효한 생(生)의 공간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가려진 시간>의 시공간은 여러모로 ‘고립’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 있겠다. 영화의 배경이 상대적으로 고립성이 강한 섬이라는 점, 성민과 아이들이 있던 밀폐된 세계며 성민과 태식이 빠져 침잠해가던 출구 없는 깊고 검은 바닷속이며 성민과 수린이 함께 시간을 보내던 숲속의 집까지. 수린의 말대로 “다른 세계로 가는 차원의 문 같은 게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다른 세계는 고립무원의 공간들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아이들이 꿈꾼 ‘다른 세계’
영화는 시작부터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었다. 수린은 재혼한 엄마가 갑작스레 죽자 새아빠와 함께 영화의 배경인 화노도로 온다. 수린은 영화의 도입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도망가고 싶어졌어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수린은 인터넷으로 유체이탈 자료를 모으며 이미 다른 세계로 가 있는 엄마의 소식을 들을 수도 있다는 기대로 (아마도 사령과의 접신일) ‘손님대접’을 마스터해간다. 성민도 부모가 없다. 성민은 다섯살 난 자신을 보육원에 버리며 아버지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넌 어디 내놔도 잘살 아이니까 걱정하지 마라.” 버림받은 아이는 버린 이의 말을 삶의 지표삼아 마음에 새긴다. “믿는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주문을 외는 성민은 자신에게도 수린에게도 이 말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뿌리 내릴 곳을 상실한 수린과 성민의 깊은 상실감이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꿈꾸게 한다. 감독의 전작에서도 현실의 안티테제로서 다른 세계를 바라던 이들의 분투를 읽을 수 있다. 사회에서는 ‘잉여’ 취급을 받지만 스스로는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을 외쳐야만 했던 이들의 이야기 <잉투기>(2013)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칡콩팥’으로 알려진 태식(엄태구, <가려진 시간>에서도 엄태구는 태식으로 등장한다)과 전국아마추어 킥복싱 대회 준우승자이자 인터넷 먹방계의 스타인 영자(류혜영)는 각자의 방식대로 ‘잉투’(ing+鬪, 싸우는 중이다)한다. 태식은 엄마와 한집에 살고 있지만 둘은 동거인 수준의 서먹한 관계이고 영자는 부모에 대해 입 밖에 내지 않으며 커다란 집에 덩그러니 혼자 산다. 영자의 담임 역시 영자와 친구들의 갈등을 두고 “너희들 문제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위선의 친절만 보인다. 태식이 “누군가에게 챙김 받고 싶었다.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같다”며 흐느낄 때 마지막까지 옆에 있어주는 건 가족도 어른도 아닌 또래의 영자였다. 태식과 영자 모두 혼자였고 그들 나름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했고 그 시도를 알아봐준 것도 이들 둘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가려진 시간>의 수린, 성민과도 무척 닮았다. 하지만 <가려진 시간>은 아이들이 꿈꾼 다른 세계가 죽음의 세계와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전작보다 훨씬 더 서늘하고 차가운 비감을 느끼게 한다. <가려진 시간>의 시공간의 격차에서 비롯된 두려움은 이제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와 ‘돌아간 그 세계에서 자신을 알아봐줄 이가 있을까’에 가 있다. 돌아갈 수 있다는 성민의 자기 확신이 마법처럼 현실이 됐을 때, 훌쩍 자란 성민(강동원)의 존재를 증명해줄 사람은 성민과 마찬가지로 ‘믿는다는 게 중요했던’ 수린뿐이다. 현실의 사람들이 모두 성민의 존재를 부정해도 수린은 그를 저버리지 않는다. 수린과 성민은 ‘손님대접’을 위해 익혀둔 그들만의 약속의 그림 언어를 통해, 그들만이 아는 장소와 표식을 통해 서로를 알아본다.
죽음은 힘이 없다. 수린은 친구에게 성민이 돌아왔음을 증명해보이겠다며 “우리 엄마 걸게”라고 말한다. 수린에게 엄마는 죽어서도 절대적인 자기 보증의 증표였다. 하지만 친구는 매정히 말하지 않는가. “죽은 사람 걸어서 뭐 어쩌려고!” 죽음보다 힘이 센 것, 설득력이 있는 건 결국 살아 있는 것, 사는 것이다. 성민은 수린에게 “혼자 있기 싫”다고 말하면서도 “나만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냐고 묻는다. 그때 ‘살아도 된다’고 말하며 성민을 현실로 이끄는 건 수린이다. 영화의 후반, 수린이 자신도 만약 요괴 알을 깨뜨려 성민과 같은 처지가 된다 해도 그땐 성민이 자신을 알아봐줄 거라는 말을 한다.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고, 서로의 증인이 돼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이 아이들에게 계속 살아갈 이유로 충분했던 것이다. 시공의 격차를 채운 숨막히는 죽음들을 비켜서서 말이다. 그럼에도 오직 이 무구한 아이들, 수린과 성민만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건 너무도 고적한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