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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연의 영화비평] 저항의 멜로드라마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는 많은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의 전통은 ‘저항의 영화’, 강력한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해를 담아내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에 이어 <나, 다니엘 블레이크>로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의 수상 소감은 흡사 정치연설에 가까웠다. 심사위원장인 조지 밀러의 발표와 함께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무대에 오른 켄 로치는 “이 상을 받는 게 이상합니다. 우리에게 이 영화의 영감을 준 이들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그는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경제정책이 세상을 위험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잔혹한 빈곤과 내핍에 시달리게 되었음을 피력하며 영화예술의 책무가 무엇인지 상기시킨 것이다.

올해로 81살이 된 켄 로치 감독은 지난 2014년에 연출한 <지미스 홀>이 자신의 마지막 극영화라고 이미 선언한 바 있다. 일종의 은퇴 선언처럼 받아들여졌고, 왜 그의 마지막 메시지가 <지미스 홀>인지 처음엔 다소 의아했다. <지미스 홀>은 아일랜드 전쟁을 다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부터 정확히 10년 후를 다룬 작품이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역사적 실패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반성적으로 사유하길 촉구했으며(켄 로치는 혁명가 제임스 코널리의 말을 인용하며 현재의 정치국면을 은유했다. “만약 영국군을 철수시킨다 해도 사회주의 공화국을 조직하지 않는다면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영국은 지주와 상업 기관들을 통해 아일랜드를 계속 통치할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가장 이상적인 캐릭터를 구축했다. <지미스 홀>의 주인공 지미 그랄튼. 켄 로치는 그에게 급진적 사회주의자, 문학과 음악을 사랑했던 예술가, 가난한 민중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숭고한 실천을 보여준 혁명가, 그리고 자유롭고 사색적인 인간의 면모를 부여했다. 그런 면에서 지미 그랄튼은 켄 로치가 이룬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을 대변하는 이상적 캐릭터이다. 게다가 그가 존재했던 시간은 영국 노동계급에겐 가장 잔혹한 시간으로 간주되는 1930년대였다. 부르주아들과 상업 자본가들의 수탈이 극에 달하고, 노동계급은 붕괴했다. 켄 로치는 여러 인터뷰에서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부활시키는 사회는 흡사 30년대 영국 사회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결코 돌이켜서는 안 되는 시간. 그래서 그의 마지막 영화에서 그 시대에 저항한 사회주의 혁명가를 다시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켄 로치는 은퇴 선언 이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정치투쟁에 가담했다. 좌파연합 ‘레스펙트’(Respect)의 전국위원이었으며, 사회주의자와 생태주의자, 페미니스트 등이 연대한 정당 ‘레프트 유니티’의 건설을 주도했다. 최근 레프트 유니티는 노동당의 보수화를 견제하며 제레미 코빈에게 힘을 실어줬고, 무엇보다도 ‘수 많은 민중이 성취한 사회·경제적 이익을 파괴하기 위한 긴축재정’ 반대투쟁에 앞장섰다. <1945년의 시대정신>(2012)이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했던 1945년, 영국 사회의 놀라운 성취들(의료, 주거, 교육, 철도, 전기 등의 공공화)을 상기하며 신자유주의로 파괴된 현재의 영국 사회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과 논쟁을 제기하는 다큐멘터리였다면, 그가 은퇴 선언까지 번복하며 만들어야만 했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긴축정책과 복지체제의 후퇴가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삶을 파괴하는지를 피력하는 비극의 드라마이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착한 자본주의(Caring Capitalism)요? 사회적으로 책임지고 보살피는 자본주의란 ‘불사조’와 같은 겁니다. 누구나 들어는 봤지만 아무도 본 적은 없거든요.”

<1945년의 시대정신>에서 영국 사회의 희망과 좌절을 모두 경험했던 한 노인은 그렇게 말한다. 1945년 사회주의적 이념을 내세운 노동당 정권이 들어서고, 사회적 부는 노동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한 정책으로 분배됐다. 그러나 1979년 영국의 악몽, 보수당의 대처가 집권했다. 신자유주의는 대처리즘으로도 호명되면서 영국 경제의 위기를 복지정책과 노동자계급의 책임으로 전가했다. 그리고 2016년, 영국 뉴캐슬에서 살고 있는 59살의 노동자 다니엘 블레이크. 이제 그가 직면하게 될 삶은 은퇴 후 편안한 노후와 여가가 아니라 경제 시스템과 복지제도의 모순, 위압적 관료제에 의한 생존권의 위협과 모멸, 불안이 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암흑 화면 속에서 들려오는 다니엘 블레이크와 의료수당 지급 담당자와의 길고도 답답한 대화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한번의 심장 쇼크로 인해 주치의로부터 업무 불가 판정을 받은 그에게 담당자는 다니엘의 건강 상태와는 하등 상관없는 형식적인 질문들로 심사를 끌고 나간다. 어이없는 심사에 화가 난 다니엘이 유머 섞인 항변을 하곤 하지만, 그 결과는 잔인했다. 마치 괘씸죄인 양 그에게 심사 탈락을 결정한 것이다. 의료수당 심사에서 탈락하게 되면 그는 다시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주치의는 그의 건강 상태가 일을 할 수 없는 정도라며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심사 결과에 항소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항소절차가 복잡하다. 어이없는 심사결과 통보순서를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관과 통화하기 위해선 두 시간의 연결대기음을 들으며 마냥 기다려야 한다. 그 힘든 시간을 버텨 통화를 하게 되면 또다시 불합리한 절차상의 순서가 통보된다. 전화로 해결하지 못한 그가 구직센터(Job Center)를 찾아가지만 그곳은 그의 마지막 자존감마저 앗아간다.

정확히 50년 만이다. 켄 로치는 이미 1966년, 영국 노동계급의 주거 문제와 복지제도의 모순을 다룬 ‘<BBC> 수요 드라마 극장’ <캐시 컴 홈>을 연출한 바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영국 인구의 23%에 해당하는 1200만명 이상이 시청했고,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 켄 로치를 연구한 영국의 미디어 연구자 존 힐은 이 영화가 ‘국가적 양심’을 건드리는 데 성공했고, <BBC>는 방영 한달여 만에 재방송을 전격적으로 내보내기도 했다고 기록한다. 당연히 논란도 뒤따랐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영화에서 공무원과 센터 직원들이 여성의 가슴이나 훔쳐보는 무뢰한으로 묘사됐다고 분개했다. 그러나 존 힐은 켄 로치 영화를 평가하면서, “켄 로치 영화의 가장 큰 힘은 그의 작품을 둘러싼 논쟁 그 자체”라고 단언한다(<켄 로치: 영화와 텔레비전의 정치학>(존 힐 지음)).

그로부터 50년 후. “세상은 진보하고 발전해나가는 것이다”라는 한때의 역사적 낙관주의자들을 비웃듯 세상은 나쁜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 심지어 <캐시 컴 홈>이 만들어졌던 66년보다 더 나빠졌는지도 모른다. 영국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개봉되자 보수당 의원 데미언 그린은 의회에서 이 영화를 혹독하게 비난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 복지제도를 왜곡했으며, 구직센터의 직원들을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이야기는 완전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켄 로치는 “우리가 이 이야기를 취재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들의 상당수는 더 끔찍했다. 그러나 영화에 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라고 항변했다. 시나리오작가 폴 래버티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직접 데미언 그린에게 이 영화의 스크립트 책을 보냈다. 책 첫장에 그는 이렇게 썼다. “당신이 얘기하는 걸 보니 아마 영화를 보지 않은 게 틀림없군요.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파악하라고 이 책을 보냅니다. 그런데 너무 바빠서 책조차 읽을 시간이 없다면 아무 푸드뱅크라도 방문해보세요.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들려줬던 비참한 이야기들을 당신에게도 들려줄 테니까요.”

존 힐은 켄 로치의 많은 영화들이 ‘저항의 멜로드라마’를 구성한다고 본다. 제임스 스미스의 연구서 <멜로드라마>에서 가져온 이 개념은 “무고한 영웅”을 시스템의 피해자로 그려내는 방식을 취한다. 1966년작 <캐시 컴 홈>은 영국 노동계급의 한 젊은 여성이 세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에서 그녀가 어떻게 노동에서 배제 되는지, 어떻게 건물주에 의해 일방적으로 쫓겨나는지, 사회복지 시스템은 왜 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관료적이고 모순적인 방식으로 더 공격적이고 심지어 아이들을 엄마에게서 빼앗는지를 묘사한다. 확실히 초창기의 켄 로치는 형식적 자의식과 실험의식이 강했다.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방식과 다큐멘터리적 사실성을 추구하기 위해 그는 실제 공간과 사람들을 작품에 담아냈으며, 주인공의 극적인 이야기보다는 그녀가 삶의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폭력과 모순을 포착하는 데 더 집중했다. 전지적 시점의 내레이션은 흡사 이 작품을 르포 형식의 다큐멘터리처럼도 보이게 한다. 그러나 가장 큰 핵심은 ‘무고한 영웅’, 즉 영화 속 캐시가 결코 그녀의 무능과 잘못으로 인해 그러한 삶으로 내몰리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016년,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우리는 다시금 현재적 의미의 ‘무고한 영웅’을 마주하게 된다. 59살의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와 20대 후반의 아이 엄마 케이티.

저항의 멜로드라마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딱히 언어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작품이다. 전문가적 시선이 개입된 분석적 글도 어쩌면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다니엘이라는 사람과, 그 사람에 대한 시선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가 단순화된 카메라앵글 안에 미니멀한 방식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담담히 담겨 있다. 그냥 가슴 먹먹한 상태로 들여다보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중에서도 몇몇 장면들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내내 마음을 붙든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심사과정의 암전이 끝나면 우리는 처음으로 다니엘 블레이크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는 몹시 상기되어 있으며 항변하고 싶으나 뭔가 설명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켄 로치는 이 영화에서 유달리 주인공의 클로즈업을 중요한 감정의 수사학으로 제시한다. 복지체제의 부조리함과 구직센터의 위악스러운 관료주의 앞에 당혹해질 수밖에 없는 늙은 노동자의 절박함. 자신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이를 바라보는 미안함, 채용 전화를 걸어온 사장에게 뭐라 거짓 핑계조차 대지 못하는 솔직함과 자괴감, 아이들을 위해 매춘 행위로 내몰리는 케이티를 향한 슬픔과 비탄. 그리고 컴퓨터를 쓸 줄 몰라 손으로 써온 이력서를 비웃고 제재를 가하는 구직센터 직원 앞에서 느끼는 모멸감과 수치심. 그리고 더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망의 표정.

켄 로치 영화의 힘은 계몽주의에 가까우리만치 날카롭고 정확한 사회적 메시지에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모든 영화에서 드러나는 휴머니티와 연민의 시선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단순한 조연, 엑스트라 혹은 군중을 향한다. 물론 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모든 주된 시선은 데이브 존스가 연기하는 다니엘 블레이크에 집중된다(그만큼 이 영화는 켄 로치의 이전작들에 비해 인물들과 사건이 미니멀하게 압축된다). 위에서 언급한 그의 클로즈업숏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니엘이 도서관 컴퓨터를 이용하기 전, 빈 시간을 메우기 위해 서늘한 도심에서 비를 맞으며 배회하는 장면들이 그러하다. 내러티브의 경제라는 측면에서 판단한다면 이 장면들은 삭제돼도 무방하다. 서사적으로는 그 장면들이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켄 로치는 그 순간들을 매우 공들여 연출했다. 추운 거리의 건물 처마 밑에서 언 손을 부비며 서 있는 모습,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자리를 옮기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초라한 순간들. 지금 다니엘 블레이크는 가난하고 지쳤으며 절박하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장면. 푸드뱅크에서 허기를 못 이기고 음식을 삼키다 울어버리는 케이티를 향해 그는 “이 모든 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켄 로치의 ‘무고한 영웅’들이 직면한 빈곤과 실업의 문제가 결코 그들의 품성과 능력 문제로 전가될 수 없음을 피력한다(가령 이력서 작성 교육 장면에서 강사는 노동자들에게 취업을 하고 성공을 하려면 “똑똑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 모순을 개인의 역량 문제로 치환하고 왜곡하는 자본의 이데올로기).

연민과 시선 그리고 비극

종종 비전문 배우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서 “정말로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을 캐스팅하면 카메라 앞에서라도 부지불식간에 삶의 체취가 묻어난다”라고 켄 로치는 말하곤 한다. 그건 켄 로치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켄 로치 영화에서 보여지는 인간적인 연민과 시선의 따스함은 그 자신의 품성과 현장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관한 다큐멘터리 <하우 투 메이크 어 켄 로치 필름>에서 시나리오작가 폴 래버티는 “나는 켄 로치와 20년 동안 12편의 영화를 같이 했지만 그동안 현장에서 그가 소리지르는 것을 한번도 본 적 없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켄 로치는 영화의 모든 것을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하고 있었다. 푸드뱅크 신을 찍는 날, 오전 10시에 모인 수십명의 엑스트라들 앞에서 그는 직접 푸드뱅크가 어떤 곳이고 영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 그날의 촬영은 어떻게 언제까지 진행될지, 그들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참여해주길 설명하고 부탁한다. 푸드뱅크 외부에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을 찍기 전, 그는 직접 그 모든 엑스트라들의 위치를 설정하고 친절하게 그들의 이름을 물어주고, 아이를 업은 이에겐 힘들지 않느냐는 인사까지 건넨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아침마다 거대한 산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라는 그가 현장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중압감에 짓눌린 예민한 예술가도, 날카로운 정치적 선동가도 아니다. 이것은 흡사 <지미스 홀>에서 묘사했던 자신의 이상적 캐릭터와도 닮아 있다. 실천적 좌파 사회주의자이자 시와 노래, 춤과 음악을 사랑했던 예술가, 사람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아끼지 않았던 선하고 예의바른 인간 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2000년대 이후 켄 로치가 만들어낸 가장 비극적인 영화 중 한편이다. 생존을 위해 동료의 죽음을 방치 할 수밖에 없었던 <내비게이터>(2001)의 참담한 결말이나, 결국 자살로 치달은 이라크 참전 용사에 관한 <루트 아이리시>(2010)의 참담함처럼 이 영화는 과연 어디서 희망을 발견해야 할지 암담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켄 로치의 오래된 응답(<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이후의 인터뷰), “희망은 없다. 정치가와 경제인은 대개 남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한다. 고용주는 고용인의 일자리를 뺏고, 헐값으로 대체 노동력을 산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다.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경제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소수의 탐욕에 봉사하는 경제가 아니라 다수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그런 구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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