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씽: 사라진 여자>(이하 <미씽>)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지지자는 서사가 촘촘히 짜여 있다고 평하는 반면, 반대자는 서사적 허점들을 끝없이 짚어낸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틀에서 영화의 논리를 따질 때, <미씽>은 종종 이야기 전개를 위해 상황이나 단서를 작위적으로 배치한 허술한 스릴러, 혹은 전반적으로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평평한 스릴러라는 인상을 남긴다. 반대자들에게는 이런 단점이 배우의 연기나 감정만으로는 메우기 힘든 것이고, 지지자들은 이 영화가 스릴러라는 장르의 틀을 서서히 벗어던지는 순간에 그대로 몸을 맡긴다.
나는 반대쪽 입장에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도, 이 영화를 장르적 리얼리즘이 아닌 다른 방식의 리얼리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일단 환각의 리얼리즘이라 칭해두자. 영화는 실종 당일인 목요일부터 사건이 마무리되는 월요일까지 5일간 하루하루를 손꼽아 세면서 전개된다. 그런데 자막으로 친절하게 제시하는 하루하루의 시간이 영화에서 단일하게 구획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고 착각한 목요일과 금요일 사이의 시간은 계획에 맞춰 오차 없이 처리되지만, 아이의 실종을 알고 난 뒤의 시간은 무한대로 확장하기 시작한다.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면 이로 인해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은 당연 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가 심리적 시간을 드러내는 방식에는 독특한 지점이 있다.
심리적 시간과 꿈, 판타지
5일의 시간 중 가장 이상한 시간은 금요일과 토요일 사이의 시간이다. 밤이 되어서야 귀가한 지선(엄지원)은 보모 한매(공효진)와 딸 다은의 부재를 뒤늦게 알고 집 근처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다음날이 되자 지선은 한매의 외국인 등록증을 들고 경찰서를 방문한다. 이때 그녀는 변호사로부터 ‘지금 상황에서 아이가 실종되면 양육권은 물론 성인이 될 때까지 접견권도 빼앗길 수 있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은 뒤 그대로 경찰서를 나온다. 그녀가 외국인 등록증에 적힌 주소를 찾아갔을 때 날은 이미 어둑하다. 그곳에 살던 중국 여성은 지선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쫓아버린다. 이상한 점은 다음 컷에서 지선이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다. 뒤이어 본격적인 토요일 아침이 시작되므로 경찰서 장면을 낮이라 여긴 건 필자의 착각이라는 전제하에, 앞선 장면은 금요일 밤에서 토요일 새벽에 실제로 일어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앞선 장면이 그저 지선이 꾼 꿈처럼도 보인다. 중요한건 이 장면이 잘 구획된 영화의 시간에 심리적인 틈을 내며 어디에도 없는 하루를 만들어낸다고 여겨지는 점이다. 이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세밀하게 조율된 시간의 분기를 예고하는 하나의 지표로 읽힌다.
경찰서 장면을 꿈으로 볼 하나의 근거는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지점에도 또 다른 꿈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꿈은 앞선 장면과는 달리 실제와 괴리된 명백한 환상의 공간에서 펼쳐진다. 이번에도 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현실과 아무런 이질감이 없다. 한매의 사진 뒤편에 적힌 정보를 근거로 밤새 충청도로 차를 달린 지선은 이제는 이름이 바뀐 사진관을 바라보고 서 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자욱한 안개 속으로 뛰어드는데, 안개 속에는 다른 차원의 공간이 펼쳐진다. 그 속에는 아기를 안은 여자가 뒤돌아 서 있다. 한매일까? 하지만 여자가 뒤를 돌아봤을 때는 한매가 아닌 피 흘리는 지선의 얼굴이 거기 있다. 다음 장면에서 지선은 차 안에서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깬다. 궁금한 건 왜 한매의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 지선의 얼굴이 놓였는가다. 이런 장면은 영화 속에서 대개 암시적으로 쓰이게 마련인데 이 장면이 암시했다고 할 만한 사건은 딱히 발생하지 않는다.
이언희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에 대한 단서가 될 만한 이야기를 했다. 한매의 투신 장면에 관한 질문에 감독은 ‘이 장면은 기본적으로 판타지’이며 ‘한매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말한 뒤, ‘지선의 얼굴이 한매의 얼굴을 흡수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수많은 환상과 환각으로 점철된 영화에서 이 장면에 관해서만 굳이 ‘판타지’라고 말한 것은 다소 방어적이라고 여겨지지만 지선의 얼굴이 한매의 얼굴을 흡수한다는 표현은 곱씹어볼 만하다. 감독의 표현을 참고하면 앞서 지선이 자신의 얼굴과 대면하는 장면은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한매가 지선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여겨졌지만 결과적으로 지선이 한매의 자리에 앉아보는 영화의 여정을 압축한 장면처럼 보인다.
영화는 서사적으로 사건의 전개보다 한매와 지선의 연결성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인다. 두 사람의 친연성은 단지 아이를 잃은 경험의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초조하면 소파를 뜯는 사소한 행동처럼 시간차를 둔 같은 공간 속 같은 행동에서 드러난다. 한매가 일하던 안마시술소 한쪽에 놓인 소파에 초조하게 앉아있던 지선에게 업소 주인(김선영)은 목련(한매의 다른 이름) 역시 거기 앉아서 소파를 뜯었다고 일러준다. 그녀의 설명에 따라 지선의 손을 클로즈업한 카메라가 다시 앉은 사람을 비췄을 때 그 곳에는 지선이 아닌 한매가 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한매의 과거로 이어진다. 영화는 과거 한매가 공간에서 빠져나가는 순간을 소파에 앉은 현재 지선의 시간과 스치는 것처럼 표현한다. 지선이 한매의 사연을 접하며 그녀와 심리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영화는 시각적으로 구축한다.
지선은 한매의 행방을 찾아 서울과 지방을 오간다. 이런 지선의 여정은 장르적 목적에서 살짝 비켜나 마치 공간에 새겨진 한매의 시간을, 그녀 주변인들의 진술을 빌려 일깨우는 여정처럼 그려진다. 지선이 사진관에서 발견한 한매와 아기의 사진을 자세히 보려고 확대경에 눈을 대는 순간, 사진이 동영상처럼 재생되면서 과거 장면으로 연결된다. 이는 지선의 시선과 눈길이 한매의 잠든 시간을 깨워가는 영화의 여정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지선이 한매와 같은 공간에 있었으나 그녀를 전혀 보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보상 행위이기도 하다.
한매와 지선의 목소리, 여성의 목소리
모든 여정을 끝낸 지선은 브로커 박현익에게 “(다은이를) 살려만주시면 뭐든지 하겠다”라고 울며 빈다. 박현익은 지선에게 “정말 뭐든지요?”라고 되묻는다. 다음 컷에는 아기의 입원비 마련을 위해 그야말로 ‘뭐든지’ 했던 한매의 삶이 인서트된다. 딸을 향한 지선의 강렬한 절규는 그녀가 강렬한 모성을 뒤늦게 깨달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매의 삶을 간접 체험한 지선의 목을 통해 한매가 함께 내뱉는 절규로 이해해야 한다. 목소리와 관련해 아직 말해야 할 것이 남았다. 결말부 수중 신에서 삽입된 한매의 자장가 소리는 한매가 원래 부르던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로 불린다. 한매가 실제로 불렀을 리 만무한 한국어 노래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편견으로 한국어를 배울 수 없었던 한매의 환상을 풀어주는 것이자, 아이를 다루는 데 서툴렀던 지선이 한매의 목소리를 빌려 부르는 노래다. 절규와 자장가. <미씽>은 여성의 목소리가 여전히 이 둘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이를 잃은 지선과 한매의 절규는 예전에도 지금도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으며, 한매의 자장가에는 몇몇 사람들만이 귀 기울였다. 이제 여성은 겨우 누군가에게 들릴 수 있는 음조에 자신의 언어를 섞어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냐고 영화는 마지막 자장가를 빌려 말한다. 그 노래는 아직 물속에 잠겨 있다. 그 목소리가 물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과 힘이 조금 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