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루이스(에이미 애덤스)와 이안(제레미 레너)이 처음 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탐사팀이 들고 들어간 새장 속의 새에게 유독 시선이 간다. 뭔가 대단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은 알겠는데 영화는 딱히 왜 새를 들고 들어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않는다. 돌고래를 연상 시키는 소리와 함께 외계인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만이 공간을 채울 뿐이다. 가능한 한 화면 안의 요소들을 단순화하려 애쓰는 드니 빌뇌브 감독이 이토록 눈에 띄는 장치를 그냥 배치했을 리 없다. 내 호기심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저 새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헵타포트라 불리는 외계인들이 인간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 안전한지 확인하는 장치라고 짐작 가능하다. 호흡하기 적당한 공기인지 치명적인 물질은 없는지를 확인하는 생체 지표라 할 수 있다. 둘째로 미장센 측면에서 보자면 사운드로 장면을 장악하는 이 영화에서 이색적인 음색을 제공한다. 방호복 속 인간의 숨소리, 트럼펫 울리듯 웅장한 외계인의 사운드와 대비되는 일종의 메트로놈이라고 해도 좋겠다. 새소리가 추가되는 것만으로 지루해질 수 있었던 사운드가 생각 이상으로 풍성해진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의미는 영화를 다 본 뒤라야 알 수 있다. 루이스의 딸 한나가 그린 엄마와 아빠, 그리고 새의 그림은 결국 엔딩을 장식하며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을 순서대로 배치하는 중요한 좌표 역할을 한다. 평범해 보이는 풍경이 이야기 전체를 알고 나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조각을 뜯어보는 것, 드니 빌뇌브에 대한 이해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드니 빌뇌브가 짜낸 크로스워드퍼즐
<컨택트>를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어떤 단어가 적절할까. 영리함? <컨택트>의 지적인 면모는 접근방식의 생소함에서 비롯된 착시에 가깝다. 문답무용 침략을 반복하는 스테레오타입의 외계인을 답습하지 않을 뿐 연출 방식, 메시지 등을 혁신적이라 보긴 어렵다. 난해함? 여느 대중 상업SF와 호흡이 조금 다르긴 해도 그리 어려운 영화는 아니다. 영화가 제시하는 것만 따라가도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컨택트>의 매력은 차라리 ‘재미’라는 단어가 적절할 것 같다. 물론 여타 SF영화가 제공하는 시각적이고 직관적인 재미와는 결이 다르다. 지적이다, 색다르다는 수사는 아마도 이런 지점을 강조한 칭찬일 테지만 본질적으로 <컨택트>의 전체 이야기는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천천히 스며드는 반전이 재밌게 느껴지는 건 조각의 정보를 토대로 전체를 추적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흥미롭기 때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크로스워드퍼즐을 푸는 즐거움 내지는 난센스 퀴즈의 답을 알았을 때의 쾌감을 닮았다. 개별 상황과 장면에 몰두할 땐 보이지 않던 것들도 다 맞춰진 그림을 보고 나면 그렇게 간단명료할 수가 없다.
나는 드니 빌뇌브가 익스트림 롱숏을 그토록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전체를 조망하는 특등석에 앉아 관객의 반응을 관찰하길 즐긴다. 대체로 정보를 차단해 궁금증을 자아내다가 결말에 이르렀을 때 예상 밖의 조감도를 보여주며 충격을 유도하는 것이다. 시점과 인식을 뒤집는 이러한 종류의 반전은 크고 작은 구멍과 오류들을 가리는 효과가 있다. 사실 그동안 드니 빌뇌브의 영화는 매번 멱살을 잡아끌듯 몰입감을 선사했음에도 한구석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관객의 시선을 고정(혹은 제한)시키는 뛰어난 기교야 두말할 것 없지만 중요한 지점에서 머뭇거리거나 은폐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얼핏 복잡해 보여도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선 실제 내용물이 앙상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컨택트>를 본 뒤 그의 진심을 믿고 싶어졌다. <컨택트>는 드니 빌뇌브의 솔직하고 순진한 고백이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한구석을 차지했던 마음의 얼룩이 이번 영화를 통해 어떻게 씻겨내려갔는지에 대해 말하려 한다.
이야기의 도착지는 어디인가
<컨택트>는 2가지 이야기 축을 가지고 진행된다. 하나는 외계인과 접촉하는 루이스의 행동, 다른 하나는 과거의 기억(혹은 그렇게 착각되는 정보)과 조우하는 루이스의 심리다. 루이스는 딸을 잃은 마음의 상처를 지닌 여성처럼 묘사되며, 영화의 플롯은 외계인과 접촉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딸과의 기억이 플래시백으로 교차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완성된 전체 그림의 시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으니 결론부터 말하겠다. 루이스가 기억하는 딸과의 추억은 그녀가 겪은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겪게 될 미래의 이미지다. <컨택트>는 크게 2가지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언어가 사고의 형태를 지배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시간의 흐름에 묶인 우리는 서사도 선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 외계인의 언어에는 원형의 형태를 띤 그들의 문자처럼 과거, 현재, 미래 등 시간 시제가 없고 그들의 사고도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언어가 사고와 인식을 지배한다는 전제에 따라 외계인의 언어를 배운 루이스는 외계인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의 미래의 기억을 목격한다. 플래시백으로 위장한 플래시 포워드인 것이다.
루이스가 외계인과의 소통을 위한 베이스캠프로 온 뒤 처음 딸과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이 외계인의 문자를 배워온 직후란 점은 의미심장하다. 베이스캠프에서 외계인의 문자를 분석하던 루이스의 모습과 루이스의 딸 한나가 물가에서 노는 장면이 교차편집되는 이 시퀀스는 재미있다. 우리는 기존 서사문법에 따라 당연히 이 교차편집을 루이스의 회상이라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실은 이 순간의 루이스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소녀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 이미지는 순간 번뜩인 미래의 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이때 감독은 관객이 이 장면을 루이스의 회상으로 오해하도록 ‘루이스가 자신도 모르는 소녀를 보고 있다’는 정보를 관객으로부터 차단시킨다. <컨택트>의 트릭은 대개 이런 식이다. 이 트릭이 성립하기 위해선 관객이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선형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선형적인 플롯인 양 가장했다가 나중에 시간 순서를 뒤바꾼 플롯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반전의 쾌감이 뒤따르고, 적지 않은 관객이 이를 지적 유희로 받아들인다.
진정 지적인 유희인가와는 별개로 여기선 루이스가 딸 한나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놀고 있는 강가의 물소리가 현재시점으로 재현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려 한다. 영화 속 사운드는 현재, 과거, 미래 어느 시점이건 상관없이 대체로 루이스의 현재시점으로 재현된다. 마치 시제가 없는 외계인의 사고처럼 말이다. 드니 빌뇌브 영화에서 사운드는 일종의 앵커와 유사한데, 통일감을 유지하는 사운드가 복잡하게 뒤엉킨 플롯에도 길을 헤매지 않도록 돕는다. 꽤 복잡해 보이는 이야기의 미로를 헤매지 않고 따라가는 비결은 그냥 루이스의 시점에 일치해서 몰입하는 것이다. 복잡한 플롯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들은 그 밖에도 꽤 많은 편인데, 미장센의 일치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루이스의 집 거실의 미장센은 외계인이 인간들과 소통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과 닮았다. 천장부터 공간을 훑어나가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유사하다. 유사한 미장센을 반복하여 점을 찍어주는 행위는 나중에 전체 그림이 파악되고 난 뒤를 위한 친절한 설계도나 마찬가지다. 하나의 조각이 전체 그림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감독만이 알고 있으며 드니 빌뇌브가 관객을 몰입시키는 추적의 쾌감은 차단된 정보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나는 이 방식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싶다. 이건 반전의 쾌감을 위한 반전이라기보다는 선형적인 사고를 어떻게 해체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래를 먼저 보여주는 설정은 사실 그리 참신한 편은 아니다. 이미 숱한 영화들이 플롯을 역배치해 반전을 선보였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드니 빌뇌브가 선형적인 서사를 해체하는 방식이다. 적지 않은 작가들이 우리가 시간의 순서에 따라 받아들이는 이야기의 해체를 시도했다. 가령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과거와 현재 등 다른 시간대의 사건들을 한 화면에 배치한다. 입체의 평면화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논리적인 설명을 통해 서사를 분해하고, 혹자는 시공간을 겹쳐놓음으로써 서사를 해체한다. 드니 빌뇌브의 선택은 단순하다. 플롯의 트릭이라는 가장 선형적인 틀을 빌려 선형적인 사고를 다른 관점에서 다시 한번 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오프닝에서 루이스의 내레이션을 빌려 “우리는 시간 순서에 묶여 있다”고 한탄한 감독은 이윽고 “처음과 끝이 의미 없는” 원형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결국 <컨택트>는 엔딩에서 오프닝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이며 이야기가 어디에 도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컨택트>에 대해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기교가 탁월하다는 표면적인 찬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분석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지(無地)의 선의를 긍정하며
드니 빌뇌브의 영화는 항상 무언가를 찾아가는 형식을 취한다.
<그을린 사랑>(2010)에서는 어머니의 죽음을 시작으로 캐나다 지역에서 쭉 살아왔던 남매가 중동 지역의 역사적 상흔과 이민자의 아픔을 더듬었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에서는 멕시코 국경 지역의 마약 밀수범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미국과 멕시코를 구분짓는 범죄 카르텔의 실체를 고발한다. <컨택트>는 크게 3가지 화면으로 구성되는데 첫째로 지도의 풍경을 보여주는 익스트림 롱숏, 두 번째로 리얼리티를 담당하는 뉴스 화면, 마지막으로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는 클로즈업이다. 카메라가 루이스를 잡을 땐 극단의 클로즈업이 아니라도 대부분 심도를 좁힌 채 루이스 이외의 대상을 포커스 아웃시킨다. 이건 온전히 루이스의 1인칭 시선을 따라가겠다는 의도이며 루이스가 감각하고 바라보는 세계를 재현한다는 감정적인 숏이다. 한편으론 시간과 인과를 뒤섞어 복잡해진 플롯을 위해 상대적으로 화면을 느리고 단순하게 구성한 미니멀리즘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크고 작은 연출의 결과 관객은 자연스레 인물의 감정에 초점을 맞춘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외의 정보들은 상당 부분 차단된다. 인물이 보고 느끼는 제한된 정보에 기반한 서스펜스 기법이야말로 드니 빌뇌브식 서사의 동력이다. 다양한 장르의 ‘드니 빌뇌브화(化)’라고 불러도 좋겠다.
‘드니 빌뇌브화’된 이야기가 추격하는 실체를 요약하면 ‘견고한 경계를 어떻게 녹이고 침투할 것인가’가 아닐까 싶다. 그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화두는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경계의 존재다. 이쪽에서 평온한 삶을 유지하던 사람이 어느 날 저쪽 세계로 넘어가서 그간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고 세계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이다. 때로 이 경계는 너무 허약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려지지만 때론 너무나 견고해서 도저히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실체로 드러난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가 그 장벽의 실체를 깨닫고 주저앉는 이야기라면 <컨택트>는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긍정에 관한 이야기다. 서로를 가로막는 장벽이 무너지는 판타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겠다. <컨택트>는 개방과 폐쇄로 대립 중인 현재의 세계 정세를 1차원적인 형태로 모사한다. 사람들은 공포를 기반으로 서로를 불신하고 외계인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차단한다. 여기까진 현실적인 인식이다. 드니 빌뇌브는 이 지점부터 초월적인 힘을 개입시킨다. 바로 미래를 목격하고 온 루이스의 존재다. 루이스가 미국과 갈등을 빚는 중국을 설득하는 방식은 실로 유아적이다. 미래를 보고 온 자, 모든 지도를 보고 온 자의 한마디에 모든 오해는 해소된다. 이 흐름만 놓고 보면 영화가 취하고 있는 설득 방식은 무척 단순하다. 실제로 드니 빌뇌브가 경계를 드러내는 방식은 매우 자의적이라 편협한 지점도 있고 놓치고 있는 것도 많다. 단순한 예로 중국과 러시아 등의 세력을 그려나가는 건 전형적인 북미권의 시선을 반영하고 있다. 어찌 보면 무지함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무지함은 끝내 대상과 소통하고픈 선의를 기반으로 하는 것 같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에서 엄연히 옆에 존재함에도 서로 격리된 세계를 살 수밖에 없는 암울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에 그쳤다. 그 결과 미국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의 구조적 문제는 생략된다. <컨택트>에서는 좀더 적극적인 상상을 끌어와 그것이 해결되는 방향까지 제시한다. 여전히 중국을 비롯한 제3세계 등 자신이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묘사는 무지하고 일방적이지만 그럼에도 온갖 판타지와 상상의 힘을 빌려서라도 끝내 소통하고자 하는 선의만큼은 한층 또렷해졌다. 어쩌면 드니 빌뇌브가 테드 창의 원작 소설에 매료된 건 외계인의 언어라는 소재의 독창성보다 소통의 지난함을 해결할 막연한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견고한 경계 내부로 어떻게 침투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드니 빌뇌브는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경험한 루이스의 선택을 제시한다. 루이스는 산스크리트어로 ‘전쟁’이란 단어를 ‘분쟁’ 대신 ‘더 많은 암소를 원하다’로 해석하는 인물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 새드엔딩으로 끝나고 말 이야기일지라도 기꺼이 펼쳐들 줄 아는 인물이기도 하다. 달콤한 부분만 골라내는 선택은 어렵고 불편한 것들을 배척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다. 한쪽의 이익이 한쪽의 손실로 이어지는 제로섬게임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취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장벽을 치고 누군가는 장벽 안쪽의 이익만을 도모한다. 물론 국제정세의 냉혹함을 고려했을 때 소통과 공유를 강조하는 루이스의 선택은 이상에 근거한 낙관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쓰여진 자신의 생을 목격하고 딸과 함께할 환희의 시간은 물론 괴로움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는 루이스의 선택이야말로 제로섬게임을 논제로섬게임으로 전환시킬 열쇠다.
충분히 알고 있을 때나 아무것도 알지 못할 때나 루이스가 마주하는 미래는 변하지 않는다. 다만 같은 결과처럼 보이더라도 양쪽의 마음가짐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 단호한 결의와 수용의 너른 품은 단지 ‘정해진 운명’이란 짧은 단어 안에 가둘 수 없다. 두터운 경계 너머를 어설프고 거칠게 더듬던 드니 빌뇌브는 <컨택트>를 통해 자신이 왜 경계와 소통이라는 화두에 집착했는지, 그 집착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슬며시 고백한다. 앞뒤가 고리로 이어지는 원형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남기고 간 흔적은 루이스의 결연한 의지다. 괴롭다고 밀어내는 대신 아파도 기꺼이 끌어안겠다는 전지(全知)의 결연함이 과히 나쁘지만은 않다. 기쁨부터 아픔까지 어느 것 하나 남기지 않고 끌어안는 삶의 논제로섬게임은 그제야 성립한다. 비록 <컨택트>가 여전히 많은 것을 간과하고 해결마저 손쉬운 무지의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끝내 상대와 소통하려는 선의의 방향만큼은, 그래서 긍정하고 싶다. 아마도 그것이 드니 빌뇌브가 그토록 더듬어 찾았던 장벽을 허무는 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