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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영화비평]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리고 <싱글라이더>와 <재심>

매혹의 덩어리들

<밤의 해변에서 혼자>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중심으로 한 한국영화 산책

홍상수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별것도 아닌 일을 담고 있거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을 보여줄 때다. 솔직히 이제 홍상수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장면은 너무 많이 봐와서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남녀가 유혹의 실마리를 교환하는 상황을 보거나 홍상수식 어법으로 인물들이 상처를 드러내고 감싸안는 상황을 볼 때 으레 그러려니 받아들이게 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연애의 전개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연애중에 있는 여배우 영희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혼자 시련을 견디는 모습을 담고 있는 영화이다. 영희(김민희)는 유부남 영화감독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눈치를 받는다. 영희를 아껴주고 위로하는 사람들조차 빨리 일을 다시 해야 한다는 투로 영희에게 눈치를 준다.

이런 상황에서 영희는 가끔 돌발행동을 한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벌어지는 1부의 중반부에 영희가 선배 지영(서영화)과 공원을 산책하다 어느 다리 앞에서 갑자기 혼자 떨어져 절을 한다. 지영은 다리 저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영희는 정성들여 절을 마친다. 지영이 왜 절을 했냐고 묻자 영희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걸 기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지영이 영희에게 뭘 원하느냐고 재차 묻자 “나답게 사는 거”라고 영희는 답한다.

영희의 말대로 그냥 해본 절이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고 유별나다면 유별날 수도 있지만 공원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해볼 수도 있는 행동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까닭 없이 관객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영희 역을 하는 김민희의 훌쩍 큰 자태가 주는 감흥도 있을 것이다. 지질하게 일상의 외로운 감정을 간신히 추스르며 비틀거리는 상황에서 갑자기 경건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제스처를 느닷없이 했을 때 화면 속의 인물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관객인 우리는 살짝 마음이 흔들린다.

2부에서 강릉을 방문한 영희가 선배 명수가 운영하는 카페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꽤 오래 기다렸는데도 명수(정재영)가 오지 않자 영희는 무료한 시간을 견디며 카페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 영희 자신도 무심코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영화는 영희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서사의 전개에 하등 보탬이 되지 않는 장면이지만 이 장면은 꽤 길게 담겨 있다. 그 직전에 강릉에서 영화관 프로그래머를 하는 선배를 만났을 때 영희는 선배로부터 염려 섞인, 동시에 오지랖 넓은 충고를 듣는데 다소곳이 듣기만 하던 영희는 때때로 선배의 사생활 침해에 가까운 공격적 발언에 반론의 토를 단다.

그럴 때마다 선배는 맥없이 자신의 발언의 공세를 누그러뜨리고 물러서지만 이런 식으로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충고를 들어야 하는 상황은 영희의 내면에 지속적인 주름을 낼 것이다. 1부에서 영희는 선배 지영과 함께 외로움을 나누고 외롭지 않은 상황을 바라지만 외로움은 그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도 전혀 달아나지 않는다. 영희가 노래를 부르는 이 장면 역시 외로움의 자장 안에 있지만 이상하게도 이 장면은 영희가 홀로 외로움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줌으로써 역시 앞서 말한 영희가 절하는 장면과 마찬가지로 관객의 마음이 흔들리게 만든다.

사건보다는 사건 전후의 짧은 막간에 잉여처럼 끼어들어가 있는 이런 장면들은, 사실 홍상수 영화에서 사건은 술자리나 카페에서의 인물들의 대화가 대부분이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주인공의 내면을 전혀 뜻밖의 상황으로 드러내며 관객을 동요시킨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주인공 영희를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영화 속 영희 주변의 몇몇 인물들처럼 영희를 위해준답시고 그녀를 수직적으로 내려다보면서 충고를 하는 입장을 가질 수 없다. 인간은 저마다의 이유로 가련할 수 있는데 가련한 자신을 동정하는 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그걸 아는 상태에서는 섣불리 남을 동정하거나 심지어 충고할 수도 없다. 영화에서 정재영이 연기하는 명수는 동거하는 젊은 여성으로부터 집착적인 사랑을 받고 아무 때나 면박을 당하는 남자인데 영화관 프로그래머 선배와는 달리 영희에게 함부로 충고하지 못한다. 남자들과 달리 영희 주변의 여자들은 영희에게 함부로 충고하지 않는데 많은 정보가 주어지지 않지만 슬쩍 화면에 흘리는 그들에 관한 정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세상에서 충분한 환멸을 겪었고 그것때문에 일상의 생활전선에서 슬쩍 물러선 채로 자신들을 관망하고 있다. 그런 자신들의 처지 때문에 영희의 여자 선배들은 영희에게 충고하는 대신 영희와 같이 있어준다.

홍상수의 카메라는 정확히 영희의 여자 선배들과 같은 위치에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2부의 한 장면에서 강릉의 어느 콘도에 묵는 영희가 선배들과 술을 마실 때 카메라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영희를 보여준다. 이 숏은 특이한데, 장면의 시간 경과를 보여주기 위한 최소한의 기능이 있긴 하지만, 덜어내도 별로 이상할 게 없는 숏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마치 몸이 불편한 애인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이 걱정돼서 거기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카메라는 영희라는 주인공을 배려하는 누군가의 시선을 대리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아는 듯 모르는 듯 현실인 듯 환상인 듯 미지의 무명씨(박홍열)를 화면에 등장시킨다. 처음에 그 남자는 1부에서 영희와 영희의 선배 지영 앞에 나타나 횡설수설하며 시간을 묻는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이 남자의 행색 때문에 나중에 다시 공원에서 이 남자를 먼발치에서 봤을 때 영희와 지영은 자리를 서둘러 피한다. 1부의 끝에서 영희는 지영이 외국 지인들과 해변을 산책하는데 영희가 잠시 일행과 떨어졌을 때 카메라가 영희를 다시 포착하면 미지의 무명씨는 영희를 들춰 업고 서둘러 자리를 뜨고 있다.

이 남자는 2부에서도 계속 나온다. 영희가 콘도에 선배들과 함께 도착했을 때 검은 옷을 입은 이 남자는 열심히 베란다 창문을 닦고 있다. 얼마 후에 영희가 선배들과 술을 마시고 있을 때는 베란다 바깥에서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무명씨 남자가 아무리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보는 사람 입장에선 슬쩍 웃음이 난다. 그는 영희 앞에서 최선을 다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데 영희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듯하기도 하고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쪽으로든 그는 영희에게 자신의 존재를 시위하며 누군가 함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기도 하다. 난폭하지만 간단한 방식으로 영화는 이 무명씨 남자의 존재를 통해 영희의 외로움을 보살펴준다. 영희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아무런 도움을 주진 못하지만 이 남자의 존재는 영희가 겪는 고독감에 대해 영화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알려준다. 불륜의 당사자라는 세속적 도덕의 위반자로서 영희가 겪는 심리적 고통은 영화 속의 상황이 가리키는 대로 쉽사리 종식될 것이 아니다. 영희는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선의로 포장된 충고와 비난을 들어야 한다. 자그마한 자기 주변의 사회로부터 영희는 전체 사회의 시선의 압력을 경험해야 한다. 영화는 이것에 대해 탈세속적 도덕을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위해 준비된 다른 시선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영희는 해변에 혼자 누워 잠을 잔다. 영희가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잠을 자는 장면은 두번 되풀이되는데 한번은 꿈으로, 한번은 현실로 재현된다. 처음에는 앞에서, 두 번째는 뒤에서 카메라는 영희가 해변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번 다 영희는 누군가가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일어난다. 그 상황들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영희가 해변에서 자고 있는, 꿈꾸고 있는 자태에 반응하게 된다. 앞에서의 절하는 장면처럼 그것은 영희가 시달리고 있는 절대 고독, 남이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근본적인 인생의 고독을 형상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딱히 뭔가를 표현하지 않아도 잠시 동안이지만 그것은 시간을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희원의 감정을 추측하게 만든다. 이 제스처는 서사에 부드럽게 침입하여 서사의 설명적 기능을 대체하고 이 영화를 나중에 떠올리게 될 때면 의당 먼저 나타날 이미지를 제시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서사에 침입하는 매혹의 덩어리들을 적절한 리듬으로 자연스럽게 배치한다. 가끔 난폭할 정도로 느닷없이 침입하기는 하지만 놀라는 것 이상으로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이 영화의 서사 바깥에서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원심력의 자장들을 만들어낸다. 서사에 속하면서도 서사의 필요기능은 아니었던 이 잉여의 덩어리들 덕분에 우리는 이 영화가 전해주는 사랑이라는 결핍에 시달리는 인간의 초상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것들은 홍상수 감독이 왜 여전히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영화계의 유일한 독립영화감독인지 새삼 수긍하게 만든다. 제작비의 규모와 연관지어 하는 말이 아니다. 홍상수는 영화라는 매체의 영향력을 서사의 관습, 장르 규범의 패턴 바깥에서 발휘할 수 있는 감독이며 표현의 관습 규범 내에서 변용을 꾀하는 것과도 거리가 먼 다른 유형의 표현법을 세련시키고 있다. 뛰어난 창작자들은 스토리의 전달 기능 충족 외에 스토리 전달 이상의 것을 화면에 남겨 놓을 줄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홍상수는 이것을 독립영화라는 범주에서 예술적인 성취로 남겨놓은 것이다.

<싱글라이더>

<재심>

<싱글라이더>와 <재심>, 결핍의 흔적들

이제 이 글을 쓰면서 뒤늦게 본 두편의 한국영화에 대해 간단히 첨언한다. 이 영화들이 한국영화의 전반적인 수준과 경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 지난해에 이어 평자로서는 계속 심드렁한 평가를 내놓을 수밖에 없는 영화에 대한 어떤 오해의 흔적들을 지적하려고 한다. 내가 본 영화는 <싱글라이더>와 <재심>인데, 특히 <싱글라이더>의 경우 주인공 강재훈(이병헌)이 유령처럼 아내(공효진)가 사는 호주의 어느 동네를 배회하는 것으로 스토리를 채운 상당히 야심적인 영화였다. 이상한 것은 순수영화의 한 경지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런 구성이 보는 사람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유령처럼 배회한다고 썼지만 실은 주인공이 유령이었던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주인공의 자기 연민 범위를 넘어서지 못해 안간힘을 쓰는 인상을 준다. 주인공은 증권회사 간부 출신으로 고객들에게 거짓으로 상품을 팔았다는 가책에 시달리는 인물인데 호주에서 아들과 함께 생활하는 아내와 아들이 예상 밖으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고 옆집 남자와 거의 가족처럼 친밀하게 지내는 걸 보고 충격을 받는다.

고객들을 배신했던 주인공이 자신을 배신한 아내에게 느끼는 충격은 주인공이 한국인 젊은이들에게 사기를 당한 젊은 여성을 도와주고 아내가 느끼는 삶의 행복감의 실체를 조금씩 알게 되면서 자기 삶에 대한 전면적 반성을 하게 되는 쪽으로 진화한다. 이 과정에서 필자가 서사에 침입하는 매혹덩어리라고 했던, 서사의 필요충분기능을 수행하면서 잉여로 남아 깊은 인상을 남기는 숏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고난은 그가 터벅터벅 걷는 걸음걸이 이상으로 표상되지 않는데 이병헌이라는 출중한 배우의 기량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이 남자의 내면에 있는 자기 연민의 허영이 산산이 부서지거나 그걸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카메라의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시선이 없기 때문에 이 영화는 지나치게 주인공에 밀착해서 그의 감정을 세세하게 이해시키기에 급급하다는 인상을 준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자신과 가족들이 다르게 보이는 순간들을, 더욱이 그가 유령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유령이라는 걸 나중에 알려줘야 한다는 서사의 기능을 생각하더라도 이 영화는 다른 시점의 안배에 지나치게 둔했다.

<재심>의 경우에는 더욱 심한데, 실화에 기초한 내용임에도 실화라고 느낄 수 없는 상투적인 인물과 서사로 분칠을 심하게 해 지속적으로 감동을 강요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법의 집행자들이 저지른 전횡의 결과로 고통을 겪는 인간을 담담하게 보여준다는 것은 매우 이뤄내기 힘든 과제였겠으나, 그걸 정의가 승리한다는 인과응보의 플로팅으로 꾸며내기 위해 이 영화는 너무 많은 진화의 흔적을 플로팅에 강제했다. 속물이었던 주인공(정우)은 그 자신에게 계속 가해지는 감동의 충격으로 무럭무럭 정의로운 인물로 진화하는데 그 과정에서 쓰이는 숱한 수식적인 화면들에게서 역설적으로 진심을 느낄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두 시간 내외의 상영시간과 기승전결의 플로팅 규범은 예술적 기율 위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상업적 제도의 제한 속에서 정해진 것이다. 두 시간 내외의 상영시간은 최고의 효율로 관객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스토리를 펼쳐낼 것을 요구한다. 이 제한 속에서 여하튼 남의 돈을 갖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스토리를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한편 영화적이라 할 수 있는 순간들을 화면에 구현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스토리와 미장센은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아니다. 대체로 상업적인 제한 내에서의 미장센은 스토리의 장식도구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한국영화의 평균적인 흐름 속에서 영화적인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경쾌한 재능의 흔적들을 발견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고 느낀다. 드물게 예외인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 결핍의 흔적들을 더 절실하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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