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이하 <시카리오>)는 드니 빌뇌브에게 세계적 명성을 선물했던 <그을린 사랑>(2011)을 넘어서는 작품이다. <그을린 사랑>은 플롯을 직조하는 그의 능력을 입증했지만 그러한 플롯 방식이 인물의 트라우마가 벌거벗는 순간의 쾌감을 기대하는 관객의 외설적 욕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으로 아슬아슬한 작품이기도 했다. <시카리오>는 관객에게 전달되는 서사적 정보를 조절하는 탁월한 능력을 확인시켜주면서도, 거기에 정확하게 구성된 숏의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그의 능력까지 더해진 작품이다. <히트>(감독 마이클 만, 1995)와 자웅을 겨룰 만한 백주의 도심 총격전과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일행이 후아레즈로 진입하는 일련의 장면이 대표적이다. 특히 총격 장면에서 총을 겨누는 자와 피살자의 매치컷이 이토록 정확하게 붙어서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영화는 드물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카메라 없이도, 그는 정확하게 붙어 있는 숏의 리듬감만으로 긴박감을 창출한다.
막다른 골목에 서다
드니 빌뇌브는 영화의 서사적 정보를 조절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감독이다. 전달해야 하는 정보와 감춰야 하는 정보의 배분, 그리고 숨겨진 정보의 공개 시점 등은 드니 빌뇌브 영화가 갖는 매력의 핵심이다. <그을린 사랑>과 <프리즈너스>(2013)의 성공과 <에너미>(2013)의 실패가 여실히 보여주듯, 그는 치밀한 심리묘사보다는 정교한 플롯에 의존할 때 더욱 폭발력 있는 서사를 완성한다. 가령 <프리즈너스>는 유괴사건을 해결하려는 두 인물에게 각기 다른 정보를 제공한다. 관객은 서로 보완관계에 있는 두 정보를 모두 전달받지만, 두 인물은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지 못한 채 반복적으로 엇갈리면서 사건은 미궁 속으로 미끄러진다. <프리즈너스>는 표면적으로 단조로운 플롯의 영화처럼 보이지만, 층층이 쌓여가는 관객의 긴장감은 꽤 정교하게 배분된 정보와 그 공개 시점의 조절 덕분이다.
<시카리오>는 <프리즈너스>의 반대 방식으로 관객을 다룬다. 맷(조시 브롤린)과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는 조금씩 정보를 흘리고, 서사적 지배감을 원하는 관객은 욕구 불만에 빠진 채 드니 빌뇌브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끌려가야 한다. 그것은 관객의 시선을 매개하는 케이트의 처지이기도 하다. 그녀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보여준 주도적 역할을 빼앗긴 채 사건 해결의 주변부를 맴돈다. 드니 빌뇌브가 그녀에게 부여한 유일한 역할은 ‘무력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드니 빌뇌브는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케이트를 후아레즈로 끌고 가 그곳의 처참한 광경을 눈앞에 갑작스레 들이민다. 비행기에서 SUV 차량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이미지 전개는, 천상의 천사가 지옥의 땅으로 끌려온 듯한 느낌을 준다.
후아레즈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서 알레한드로는 케이트에게 ‘시계의 작동 원리에 대해 물어보지 말고 시곗바늘을 잘 보라’고 충고한다. 얼핏 이 충고는 이면과 표면, 또는 원리와 현상, 더 나아가서는 이상과 현실의 대립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땅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파고들어간 땅의 표면을 살펴야 한다는 것, 달리 말해 현상을 제대로 바라볼 때 그 작동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드니 빌뇌브는 양자택일이 불가능한 세계를 즐겨 다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케이트는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수동적 관찰자의 임무에 불만스러워했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목격했던 것들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이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케이트가 중립적 시선의 관찰을 통해 궁극적으로 깨달은 것은, 추악한 사건 외부에 존재하는 줄 알았던 자신이 바로 그 사건의 일부였다는 사실이다
영화 도입부의 첫 급습 작전이 종료된 직후, 레지(다니엘 칼루야)가 상부에 어떻게 보고할지 케이트에게 묻는다. 이때 케이트는 단 한마디로 대답한다. “The truth!” <시카리오>는 자신 있게 진실을 이야기하던 그녀에게 진짜 진실의 가혹함을 선물하는 영화다. 우리는 드니 빌뇌브의 인물들이 ‘진실’과 조우하는 순간 행동의 의지를 잃고 얼어붙고 만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드니 빌뇌브가 관객에게 궁극적으로 질문을 건네는 방식임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그을린 사랑>에서부터 <프리즈너스> <에너미>에 이르기까지, 드니 빌뇌브의 영화는 진실과 조우하기 위한 여정이다. 하지만 그 여정의 끝은 행동의 좌표를 잃어버린 인물의 모습이다. <그을린 사랑>의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또다시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낳는’ 아이러니, <프리즈너스>의 ‘출구 없는 미로’, <에너미>의 ‘아직 해석되지 않은 질서로서의 혼돈’ 등은 인물이 진실과 마주할 때 겪게 되는 도덕적, 종교적,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각기 다른 표현일 뿐이다. 드니 빌뇌브 영화에서 진실은 조용히 찾아오는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인물이 버티고 서 있는 세계를 뒤흔드는 암살자다.
세번의 암살
영화 말미에 알레한드로가 케이트를 찾아와 자신들의 작전이 적법하게 이뤄졌다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고, 케이트는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 서명이 단지 ‘자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알레한드로의 위협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케이트에게 서명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깨달은 진실을 ‘인정’하는 행위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은 동일 장소에 존재하지만, 드니 빌뇌브는 이들을 각각 밝음과 어둠으로 시각화해서 이질적 장소에 위치한 것처럼 연출한다. 이 장면을 표준적인 방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두 사람이 표상하는 이상과 현실이라는 두 세계의 대립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카리오>는 이상과 현실의 대립을 다루는 것 이상으로 ‘하나의 현실’의 구성 원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달리 말해 현실은 자신과 대립하는 외부의 이상을 자신의 일부로 끌어들일 때만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맷과 알레한드로가 단지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케이트를 팀의 일원으로 끌어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현실이 제아무리 법과 정의를 무시하는 추악함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정의라는 이상적 명분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다. 결국 법과 정의라는 이상적 가치의 믿음만으로도, 케이트는 멕시코 카르텔 작전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이 시대의 ‘현실 원칙’이고, 케이트는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그 진실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과 현실의 관계는 미국과 후아레즈간의 지정학적 관계에도 적용 가능하다. (9•11 테러에 대한 지젝의 언급을 응용하자면) 미국은 마약 카르텔에 의해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두고 “어디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돼!”라고 외치지만, 그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여기(미국)서 일어나서는 안 돼!”이다. “어디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돼”라는 이상은 “여기서 일어나서는 안 돼”라는 현실적 행위를 추구하기 위한 명분일 뿐이다. 미국과 콜롬비아 카르텔의 밀약은 바로 이러한 논리를 증명한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암살자’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누가 누구를 죽이는가? 표면적으로 보자면, 이 영화의 암살자는 알레한드로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죽였던 멕시코 마약조직의 보스를 암살함으로써 사적 복수를 완성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면, <시카리오>는 그저 평범한 장르영화에 머물렀을 것이다. <시카리오>의 암살은 한발 더 나간다. 마약 카르텔에 얽힌 일련의 작전은 법과 정의에 대한 케이트의 신념을 암살한다. 알레한드로가 케이트에게 자신의 딸을 닮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녀가 알레한드로의 과거이거나 또는 알레한드로가 그녀의 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상실감에 빠진 케이트의 모습은 알레한드로가 가족을 잃었을 때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시카리오>의 암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올해 본 영화 중 (제임스 그레이의 <이민자>와 함께) 가장 군더더기 없는 영화인 <시카리오>에서 실비오 가족에 대한 에피소드는 불필요한 잉여처럼 보인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가 암살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하려는지 이해한다면, 이 에피소드는 <시카리오>에서 가장 암담하면서도 비판적인 결론과 맞닿는다. 실비오의 첫 등장 장면에서 침대에 누워 있는 실비오의 등이 한참 동안 비치는데, 이내 그 시선은 아들의 것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며칠 뒤 실비오는 알레한드로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는 마약 카르텔과 결부된 비리 경찰이지만, 그것이 그가 죽어 마땅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실비오는 그 죄에 비해 너무 가혹한 대가를 치른다. 실비오가 죽은 뒤, 아들은 다시 그 자리에 서서 텅 빈 침대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들의 축구 장면. 총성이 울리자 잠시 멈췄던 경기가 다시 이어진다. 총성과 죽음이 일상이 되어버린 후아레즈. 그렇다면 후아레즈의 평범한 삶을 암살한 자는 누구인가? 그것을 단지 알레한드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알레한드로의 말마따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누구에게 배웠을까?
보이지 않는 손
<시카리오>에는 로저 디킨스가 빚어낸 매력적인 장면들로 가득하다. 앞서 언급한 도심 총격전을 포함해 케이트 일행이 후아레즈로 들어서는 일련의 장면들, 그리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극부감 숏과 땅굴 장면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도 케이트 일행이 땅굴로 향하는 일련의 장면은 비평적으로 가장 흥미롭다. 드니 빌뇌브(와 로저 디킨스)는 멕시코와 미국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 장면을 야간 투시경과 열감지 투시경의 시점으로 담아낸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이 장면에서 공포에 온몸을 떠는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1인칭 슈팅게임’의 기계적 이미지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장면이 슈팅 게임처럼 보인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드니 빌뇌브에게 이러한 이미지가 필요했던 이유다. 이 장면은 우리가 지금까지 지켜봤던 <시카리오>의 모든 것을 압축한다. 마약 카르텔 사건에 참여한 대원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조정하는 게임의 캐릭터에 불과하다. 결국 땅굴 속에서 케이트가 목격한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슈팅 게임의 캐릭터를 바라보는 이러한 시선과 유사한 이미지는 영화 초반부에 등장한다. 드넓게 펼쳐진 황량한 황야 위로 케이트 일행이 탄 비행기가 날아간다. 드니 빌뇌브는 그것을 드넓은 황야 위에 새겨진 ‘아주 조그마한 그림자’로 시각화한다. 그렇게 그들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아마도 지젝이라면 그녀가 유일하게 투시경을 벗어던졌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덧붙이지 않았을까? 그녀는 실재의 공포(야시경으로 본 세상)를 피해 상상의 세계(맨눈으로 본 세상)로 도피한 것이라고. 케이트는 마치 <톰과 제리>에서 자신이 허공 속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곤두박질치는 제리와 같은 처지다. 그녀를 지탱해주던 환상의 지지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고, 우리는 드니 빌뇌브 최고의 작품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