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감독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숨겨진 부분들에 대해 짐작할 수는 있다. <아버지의 초상>(2015)은 다만 대부분 영화에서 ‘시네마틱한 말하기’라 믿는 ‘시점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해서만 거부한다. 이 점이 이 작품을 독특한 위치로 끌어올린다. 과거 다큐멘터리영화의 감독들이 선호하던 사실적 화면의 취향과 함께, 스테판 브리제는 자신의 영화를 더 미니멀한 것으로 세공해낸다. 이 미니멀한 미장센에 대한 의지는 그의 이전 작품들에서도 찾을 수 있는 특징이다. <마드무아젤 샹봉>(2009)이나 <어 퓨 아워스 오브 스프링>(2012) 등 이전의 연출작들은 주인공의 심리를 3인칭 관점에서 최대한 간소화해 풀어낸다는 점에서 흡사한 리듬감을 지녔다. 하지만 이 전략은 인공적 절제미를 더 강조해 보여준다. 간소화되고, 그래서 아름답다. 사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다큐멘터리의 전통을 찾기는 어렵다. 첫 장편영화 이후 세간에 발표되지 않은 다큐멘터리 한편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가 <아버지의 초상>을 만들기 전 작업했던 다섯편의 장편영화들은 대개 감상적 드라마풍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르덴 형제를 떠올려야 한다. 그들이 퍼트린 사실주의 영화미학은 여전히 몇몇 연출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으며 변형되고 발전하고 있다.
작은 사무실에서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실업’ 상태에 대해 고용지원센터 직원에게 높은 톤의 목소리로 항의한다. 티에리(뱅상 랭동)는 2년 동안 실직 상태다. 그사이 저축은 바닥났고, 재정적 어려움이 그를 극심하게 압박하고 있다. 특수한 비극이 아니다. 누구나 적당히 공감이 가는 상황이다. 그러던 중 갑자기 화면이 끝나고 검은색의 제목이 등장한다. 원제 ‘시장의 법칙’은 주인공보다 그가 처한 ‘상황’을 더 고려한 듯 보인다.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상품 가치는 이득의 많고 적음에 따라 달라진다. 이익이 곧 행복인 세상이다. 그런 면에서 티에리는 오디세우스와 닮았다. 매혹적인 신도 저돌적인 영웅도 아니지만, 그는 하나의 시련을 넘은 후 또 다른 고뇌에 시달리는 인간 중 한명으로 그려진다.
유독 길게 찍기 장면을 자주 발견하게 되는 영화다. 그렇다고 몽타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적 화면의 재현을 위해 스테판 브리제는 더 많은 파노라마 화면을 쓰고 있다. 대신 자주 커팅한다. 그의 사실적 화면 연출 방법은 로랑 캉테보다는 다르덴 형제와 더 닮았다. 주제 면에서도 유럽 프롤레타리아를 관찰하겠다는 의식과 더불어 소속감이 발탁된 개인, 말 그대로 동맹에서 탈퇴한 개인의 상태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로제타가 겪는 우연한 불행의 연속이 여기에는 없다. 주인공 티에리는 로제타보다 혹은 로나보다 덜 불우해 보인다. 이 때문에 우리는 티에리에게 광범위한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난다. 그에 반해 다르덴의 인물들은 좀더 성스럽고 미스터리하다. <로제타>의 주인공이 목수의 양아들로 ‘묘사’된 점, <로나의 침묵>(2008)에서 로나가 숨진 마약중독자의 아이를 임신하기로 ‘결심’한 일, <자전거 탄 소년>(2011)에서 사만다가 잘 알지 못하는 잔인한 아이에게 자신을 바친 것은 전부 성경을 모티브로 했다. 모든 픽션의 상황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좀더 숭고한 주제와 연결된다. 한편 <아버지의 초상>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둘러싼 고통의 벽을 ‘자본주의의 구조’라고 명명한다. 이 사회의 법칙을 스테판 브리제는 거칠거칠한 리얼리즘의 질감으로 구현한다. 다르덴 형제 역시 사회의 디자인을 끔찍한 자본의 힘으로 채웠지만, 그곳에는 ‘나쁘고 우연한 만남’이 있었다. 그런데 다르덴이 가지는 환상적 동화의 요소가 여기에는 없다. 브리제의 사회는 ‘이미 결정된 것들’로 가득하다. <아버지의 초상>이 마침내 도달하는 리얼리즘 미학의 정점에 개연성 있는 사회적 결말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해 보인다.
바닷가의 트레일러 주택을 처분하기로 마음먹은 상황을 예로 들자. 그곳에서 누구도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티에리의 적들은 비단 거대 자본만이 아니다. 소시민들 역시 서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가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물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얽혀 있다. 이 시퀀스에서 바닷가로 향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오직 한 가지 시점에서만 관찰된다. 운전하는 뒷모습, 이 숏에 이후 다른 시선의 방향은 첨가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영화 전체에 매치컷이나 설정숏이 없다. 리액션숏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을 압축한 몽타주 혹은 카메라 트래킹을 통한 시선의 이동이 있을 뿐이다. 굳이 더 불편한 방식을 감수하며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할 차례다. 1903년작 <미국인 소방수의 생활>을 통해 시네마는 ‘한 가지의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위치에서 잡아낼 수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초상>은 이토록 기본적인 시선의 교차조차 거부한다. 주택 매매 장면에서 티에리가 경험하는 일은 서민들끼리의 대립이지만, 우리는 그 사실과 더불어 시선의 중심축에 대한 명료함을 깨닫는다. 최소한의 시점 교차도 없는 영화에서 관객은 마치 추격영화를 보듯 이후의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최소한의 움직임을 지닌 긴 호흡의 카메라가 특수효과가 배제된 리얼한 화면을 그들에게 내놓는다. 이를 강압적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전거 탄 소년>에서 낙상한 주인공 소년이 벌떡 일어나던 것을 지켜보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사건의 경과를, 혹은 그 사건 자체를 감독이 알려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때 짐작이나 추측은 무효하다.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리티”의 문제(<씨네21> 852호 신전영객잔 ‘무엇이 영화입니까?’), 혹은 도상학적 모티브의 차이와 관련된 관찰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초상> 역시 비슷한 길을 걷는다. 다르덴 형제보다는 사실은 모리스 피알라가 먼저 취득했던 ‘시선의 강압’에 대한 확신이 여기에도 담겼다. 후반부의 충격적인 전개를 통해 영화가 제시하는 사회적 메시지의 알레고리는 다큐멘터리적 특성을 통해 완성된다. 치열하게 얻은 직장에서, 주인공의 역할은 고객과 동료들을 감시하는 일이다. 그래야 도둑을 잡고 직원을 해고할 수 있으며, 회사는 더 많은 영업 이익을 남긴다. 전반부의 세밀한 전개 이후 후반부에 영화는 진짜 미학을 드러낸다. ‘생략’에 관해서다. 티에리가 얻은 슈퍼마켓 경비 역은 끔찍한 먹이사슬의 도덕적 딜레마로 그를 내팽개친다. 또 다른 약자의 탄생, 그의 활약으로 제2의 티에리는 생산될 것이다. 어쩌면 이전보다 그는 더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다.
이제 막 시시포스의 언덕을 정복한 남자는 또 다른 언덕에 도달한다. 급작스레 새로운 산을 오르게 된 인물의 뒷모습이 보인다. 건조한 방식으로, 메시지가 전달된다. 여기에는 <로제타>가 전했던 흑백논리의 무서움이나 긴박한 긴장감이 없다. 대신 의도가 숨어 있다. 아마도 티에리는 한때 거부했던 노동조합의 동료들에게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비슷한 접근 방식과 작은 태도의 차이, 이 둘의 간극이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가 다르덴 형제나 피알라처럼 구원의 고통을 무겁게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책망할 필요는 없다. 스테판 브리제의 방식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더라도, 너무나 또렷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목소리가 절실한 순간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우아하고 숭고한 고통의 발현만이 아니다. 단순한 확신의 실천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