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안 전문가 남궁민수(송강호)와 반란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마침내 설국열차의 지배자 윌포드(에드 해리스)와 기차의 엔진이 거처한 최전방 칸의 문 앞에 이르렀다. 커티스는 자신의 치욕스런 과거를 고백하고 참회한 뒤, 남궁민수에게 빨리 마지막 문을 열라고 재촉한다. 남궁민수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다른) 문을 열고 싶어. (열차의 벽면에 난 문을 가리키며) 워낙 오래 갇혀 살아서 저걸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좆도 문이란 말이지.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잔 말이지….”
이 대목에서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건 봉준호의 대사가 아니다. 물론 이 대사는, 그 서민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지적이며 급진적이다. 그는 지금 하층민의 봉기에 의한 권력 교체만을 생각해온 커티스에게 체제의 변혁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체제의 바깥을 꿈꾸는 형이상학적 결단을 제안하고 있는 중이다. 마침내 그의 딸 요나(고아성)에 의해 기차의 벽은 폭파되고 연이어 기차 전체가 붕괴된다.
[신 전영객잔] 봉준호 바깥의 봉준호?
-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를 보고 굉장하다는 생각이 든 건 미국 현대사의 이면을 자기만의 독법으로 파고드는 이 내공 깊은 감독이 내리는 결론이 내게는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와킨 피닉스가 연기한 주인공 프레디, 누가 봐도 정신병자이거나 정신병자가 될 가능성이 짙은 남자를 감독이 긍정하는 것으로 봤다. 이는 프레디의 마스터였던 랭카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입을 빌려 그를 ‘마스터가 필요없는 남자’로 찬양하는 대사로도 드러나지만 이미지로도 느낄 수 있다. 영화 초반,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해군 갑판병인 프레디가 무료하게 배와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이 이어질 때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이것저것 재료를 섞어 술을 만든 프레디가 만취해 배 꼭대기 어딘가에 누워 있을 때 저쪽 아래 갑판 위의 다른 병사들이 먹을 것 등을 던지며 야유하는 광경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 시점 아래 프레디는 순교자처럼 보인다.
프레디는 자신이 조정할 수 없는 운명으로부터
[신 전영객잔] 실패자들 그래서 더 긍정할 수 있는
-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석유 시추업자 대니얼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인생 노년은 아수라장이다. 그는 대저택을 지녔지만 그 안에서 외롭고 포악한 늙은이로 살고 있으며 오랫동안 키워온 양아들과도 방금 악담을 퍼부으며 서로 돌아섰다. 때마침 영화 내내 경쟁자였고 눈엣가시였던 젊은 사이비 기독교 교주 일라이(폴 다노)가 그를 찾아와 돈을 요구하자 대니얼은 오래전에 그가 일라이에게 당했던 방식 그대로 모욕감을 갚아준다. 그러고도 끝내 분을 이기지 못해 일라이의 머리를 볼링 핀으로 두들겨 살해하고는 “내가 다 이루었다”(I am finished)고 읊조린다. 본론에서 펼쳐졌던 미치광이 사업가와 야욕에 찬 교주의 터질 것처럼 팽팽했던 대결은 그렇게 대단원에 이르러 전자가 후자를 해치우고는 상대방의 대표적인 교리 한 구절(“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을 마음대로 착취하며 끝나게 된다. 장대한 이 영화의 끝도 여기다.
이 라스트신은 벼락
[신 전영객잔] 이건 영화인가? 아니 이건 영화라네
-
<코스모폴리스>에 대한 꼼꼼한 통찰이 담긴 글들(김효선 “지금 여기는 지옥입니다”, 허문영 “한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 김지미 “구원은 없어라”)을 읽었다. 그 통찰들을 능가하는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할 자신은 없지만, 하나의 질문만은 덧붙일 필요를 느낀다. 이 영화를 감상하는 당신의 시선은 지금 영화 속 어느 자리에서 어느 곳을 향해 있는가? 영화를 보는 동안 이걸 묻지 않은 채, 관객인 우리가 마치 객관적인 자리에서 자본의 추상성, 권능, 환상을 보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인가. 혹은 이 영화를 자본주의에 대한 근심으로 읽어내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위의 질문을 경유하지 않고 이 영화가 형상화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초월적인 자리에서 그 자본의 매커니즘을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유사한 착각일 수 있지 않은가.
허문영만이 이 영화에 대한 섬세한 비평의 결론에 이르러 ‘우리의 자리’를 의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크로넨버그는 한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를 묘사하며
[신 전영객잔] 출구를 마련하지 않은 악몽
-
-
영화의 한 장면. 주인공이 탄 리무진 창밖으로 보이는 뉴욕 중심가가 느린 속도로 전시된다. 도시는 시위자들에게 점거되었다. 희뿌연 연기로 뒤덮인 거리를 소요 군중이 어지럽게 오가고 있다. 널뛰는 주가와 환율이 점멸하던 거리의 전광판에는 이런 문구가 떠오른다.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유령이
이상한 문구다. 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의 첫머리에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고 썼다(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코스모폴리스>가 첫 소개된 지난해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마르크스의 이 문장을 인용하고, 이것이 자신의 영화와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그것은 “현 상태를 지양(止揚)해나가는 현실의 운동”(<독일 이데올로기>), 혹은 현재적인 자본주의 내부에서 엄청난 속도로 에너지를 비축 중인 파괴-창조적 잠재력, 혹은 자본주의의 바깥이며 피안이었다. 그러니까
[신 전영객잔] 한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
-
켄 로치의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이하 <앤젤스 셰어>)를 본 뒤 남다은 평론가가 얼마 전 <씨네21> ‘신전영객잔’에 쓴, 최근 독립영화의 경향에 관한 편지 형식의 글이 생각났다. 나는 그 글이 명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글에 감동받아 필자가 가르치는 대학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프린트해 나눠주려다 말았다. 대신 몇몇 학생들과의 면담에서 그의 글을 언급하며 지적질을 했는데 효과가 있었다. <앤젤스 셰어>를 보고 다시 남다은의 그 글이 떠오른 것은 관객과의 대화 도중 영화청년으로 보이는 한 패기있는 젊은이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그는 종래의 켄 로치 영화와는 결이 좀 다른 이 영화가 나름 재미있고 연륜을 증명해준다고 한 내 말을 반박하고 그저 능숙함만 보이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한국의 독립장편영화를 본 최근의 경험을 말하면서 남다은의 글을 인용했다. 역시 효과가 있었다.
무식하고 더럽고 게으른 쓰레기들…
[신 전영객잔] 이 루저들의 무심한 활기
-
다소 과대평가받은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개인적으로는 더 흥미롭게 보았다. 물론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뛰어난 영화가 아니다. 그러니 태작을 수작으로 둔갑시키고 싶진 않다. 다만 그 만듦새와 무관하게 이 영화의 어떤 부분이 ‘문제적’ 흥미를 유발하는지 말해보려는 것이다.
참으로 추상적인 웹툰 그리고 영화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을 독립영화 방식으로 만들어 세계 영화제를 순례한 감독 장철수가 웹툰을 원작으로 한 상업적 기획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만든 것이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장철수는 일단 미학적 기질상 이 영화의 적임자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예컨대 김기덕을 포함하여 그에게서 영화를 배웠거나 그와 함께 일했던 감독들이 비교적 공유하고 있는 점들이 있다. 어떤 미학적 추상성에의 믿음이다. 추상성이란 사실 어떤 구체성도 그리 중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나아가 구체성이 전무한
[신 전영객잔] 번지수를 잘못 찾은 유능함
-
돌고래 쇼 중,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조련사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 육체적 감각을 되찾은 날. 그녀는 의족을 차고 어색한 걸음으로 사고 현장을 찾는다. 대형 수족관 앞에 선 그녀가 수족관 창을 손으로 두드리자, 마법처럼 어딘가에서 거대한 고래가 나타난다. 마치 고래를 쓰다듬듯 창을 쓰다듬던 여인이 손과 팔을 움직여 동작을 시작하자, 고래가 그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여인의 표정을 볼 수 없는 대신 고래의 표정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혹은 의족을 찬 다리로 어색하고 꼿꼿하게 서서 우아하고 능숙하게 팔을 움직이는 여인의 뒷모습이 그녀의 얼굴 표정 그 자체라고 느낀다. 둘 사이에 가로막힌 창. 이제는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세계. 그 창을 사이에 두고 고래와 여인은 서로를 만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창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이 창은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한계를 리듬으로 전환한다. 여인의 손짓에 고래는 어디론가 다시 사라져버리고 창 앞에 여인 홀로, 하지만 뭔가 달
[신 전영객잔] 내가 만질 수 없는 그러나 나를 만져주는
-
나에게 강우석의 영화는 늘 옛날 미국영화의 무구한 오락적 가치를 떠올리게 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공공의 적> 이후, <한반도>를 제외하곤 난 늘 그의 영화를 일관되게 지지해왔다. <전설의 주먹>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영화가 예상만큼 흥행하지 못한 것을 두고 놀랐다. 나는 이 영화의 건전한 오락적 가치가 충분히 대중적으로 통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편의 영화의 흥행 여부를 작품 자체의 가치만으로 판별할 수는 없다. 다른 대다수 영화에 비해 긴 상영시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한계라는 것도 이 영화의 흥행 스코어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웠던 언론의 호평에 비해 이 영화가 상대적으로 낡았다는 상당수의 비판적 시각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옹호하고 싶다. <전설의 주먹>이 다루고 있는 삶의 남루함이라는 소재에 외면할 수 없는 강우석의 윤리적 정직성이 스며들어 있고 그가 묘사
[신 전영객잔] 강우석 스타일을 지지함
-
요즘도 가끔 질문을 받곤 합니다. 당신의 글은 누구를 향한 것입니까. 누군가는 단 한명의 감독을 대상으로 글을 쓴다고 하고, 누군가는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쓴다고 대답합니다. 언제나 그 질문 앞에서 망설이는 저는 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는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 그러니까 영화라는 세상을 경유해서 결국은 그 세상을 살고 있는 나의 변화를 보기 위해 글을 씁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기적인 태도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가 제게 중요한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2013년 봄,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해 글을 써야겠다는 긴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지면에서 단 한번도 써본 적 없는 편지의 형식이 이번만큼은 저의 근심을 나누는 유일한 방식이 될 것 같았습니다. 지금 저는 학교에서, 현장에서, 혹은 일터에서, 오직 영화 한편을 찍기 위해 힘겨운 삶의 조건과 싸우며 밤잠을 뒤척이다 우연히 <씨네21>을 뒤적일 젊은 감독님들에게 보
[신 전영객잔] “현실을 모방하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지요”
-
한발은 땅 위에 한발은 허공 속에
의기양양한 시인이 이렇게 절룩거린다.
그를 비틀어버리는 낯선 곳에서
완전하게 패배하여 자신의
상상의 형상이 사라져버리는 세계 속으로 되돌아온다.
-장 콕토 <몽유병자> 중에서
레오스 카락스의 짧은 필모그래피에서도 <폴라 X>(1999)는 이례적인 영화였다. 대부분 낮에 찍혔고, 그의 페르소나인 드니 라방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감독의 영화에선, 오즈 야스지로나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나 소재보다 계절이나 밤낮이라는 배경이 더 근원적이다.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도 그런 것 같다. 카락스가 스물넷에 만든 데뷔작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는 거의 모든 장면이 밤이며, 뒤를 이은 <나쁜 피>(1986)와 <퐁네프의 연인들>(1991)도 3분의 2 안팎이 밤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미완성의 조상(彫像)과도 같은 특이한 외모의 드니 라방은 몽유병자의 무표정으로 어둠이 깃든 파
[신 전영객잔] 진실은 막간에 있다
-
영화 촬영현장이었습니다. 자동차 세대가 굉음을 내며 차례로 터널을 뚫고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두대의 대형 자동차 중간에 끼어 달리는 소형 자동차에는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이 장면이 스크린에 펼쳐질 때 우리는 가운데에 있는 저 소형차와 카메라 덕분에 두대의 대형 자동차가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감독은 여러 번 그 장면을 되풀이하며 고심을 거듭했는데 그때 그의 고민의 내용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습니다. 쾌속의 운동감을 어떻게 더 상승시킬 것인가. 그게 그의 고민이었을 겁니다. 한 귀퉁이에 서서 그걸 지켜보다가 지금의 문제를 문득 떠올립니다. 저의 호기심은 그 감독의 고민과 정확히 반대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가 빠르기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저는 느려서 이상한 장면들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실상은 긴요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어느 두편의 영화의 두개의 장면, 한동안 잊고 지내던 그 문제에 관한 호기심이 문득 그때 다시
[신 전영객잔] 슬로모션, 넌 누구냐?
-
9.11 테러 이후 빈 라덴을 사살하기까지 CIA의 비밀활동을 다루며 여전히 첨예한 정치적 쟁점을 건드린 탓에 <제로 다크 서티>는 비교적 고른 지지를 얻은 <허트 로커>에 비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들에 따라오기 마련인 불평들, 이를테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왜곡했다며 온갖 증거들을 나열하는, 대개의 경우 영화 자체와 별 관계가 없는 비평들은 열외로 두자. <제로 다크 서티>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들이 문제를 삼는 지점은 영화에 등장하는 고문장면에 대한 영화의 태도이다. 빈 라덴에 대한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여주고 있으므로 결국은 고문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비판적 견해가 한편에, 오히려 현실의 고문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다른 한편에 있다(“악은 어디에 있는가?”, <씨네 21> 894호). 캐스린 비글로는 이런 논쟁에 대해 <제로 다크 서티>
[신 전영객잔] 이런 무력함이라니
-
※<스토커>의 결말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십세기 폭스 서치라이트 로고가 깔리는 박찬욱의 영화를 한국의 극장에서 보는 경험은 좋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박찬욱이 연출하고 정정훈이 촬영했지만 이것은 니콜 키드먼과 미아 바시코프스카와 매튜 구드가 주연하고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력이 들어간 할리우드영화다. 박찬욱의 영화가 보여주는 형식적 미감과 관객을 습격하는 윤리적 동요의 기운은 <스토커>에서도 여전하다. 훨씬 세련되고 단정하며 여운도 만만치 않다. 동시에 송강호, 최민식, 이영애, 임수정 등이 나오는 박찬욱의 한국영화에서 느꼈던 윤리적 동요보다는 충격이 덜하다. <스토커>는 간단히 정리하면 불온한 피를 타고난 가족의 얘기다. 미친 삼촌이 돌아오고 그 삼촌에게 여주인공 인디아(미아 바스코프스카)는 근친적 욕망을 느낀다. 삼촌 찰리(매튜 구드)는 그녀의 욕망을 격발하는 존재이다. 그녀의 욕망에는 성욕뿐만 아니라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로 접착된
[신 전영객잔] 그녀는 우리와 섞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