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웬 낙관인가. 우주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인간이 돌아와 땅을 딛는다(<그래비티>(2013)). 웜홀을 통과해 블랙홀에 뛰어든 사람이 산 것도 모자라 임종을 앞둔 딸과 만난다(<인터스텔라>(2014)). 이번엔 화성에서 조난당해 죽은 줄 알았던 자가 687일 동안 생존해 귀환한다(<마션>(2015)). 두드러지는 트렌드다. ‘과학으로 무장한 지구 귀환 어드벤처’로 뭉뚱그려도 되는 이 흐름은, 2015년 현재 인류의 우주 개척 사업들과 진도만 다를 뿐 같은 궤도에 있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세운 우주개발 기업 ‘스페이스X’는 2027년쯤 첫 화성 거주자를 보낸다는 목표로 구체적인 계획을 실행 중이다. 평생 지구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7만8천여명이 지원했다. 지난 9월 머스크는 TV 토크쇼에 출연해 화성 대기를 생존 가능한 온도로 유지하는 효과 빠른 구상도 내놨다. 화성에다 열핵폭탄을 투하해 기온을 높인 다음 여기서 발생한 복사열과 이산화탄소로 ‘온실효과’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박테리아를 퍼뜨리는 일부터 시작해 결국 식물을 번식시켜 화성 표면을 테라포밍(terraforming), 즉 지구의 땅처럼 트랜스포밍하는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주목할 대목은 미 항공우주국 NASA나 유럽 우주국 ESA, 중국 국가항천국과 같은 공공 영역은 물론 구글의 에릭 슈미츠 회장, 아마존 CEO 제프 베조스 등 민간의 슈퍼리치들이 우주개발 계획에 거액을 투자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테크놀로지와 돈을 가진 지구인들이 지금 지구 바깥 일에 열중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행성의 정치•경제•생태 환경을 종합해볼 때 머지않은 미래에 인류가 볼 수 있는 꽤나 현실적인 그림은 <엘리시움>(출연 맷 데이먼)이다. 우주정거장에 건설된 낙원 안에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들이 거주하고 나머지는 병든 지구에 남는 거다. 비관적이다. 다시 살펴보자. <그래비티> <인터스텔라> <마션>의 낙관은 지구에 대한 비관에서 런칭했다.
영화적 능청마저 느껴지는 낙관주의
화성탐사대 ‘아레스3’ 대원들은 모래 폭풍에 파편을 맞고 날아가 생체신호마저 끊긴 동료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가 숨졌다고 판단한다. 당장 탈출하지 않으면 지구로 복귀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마크의 ‘시신’을 찾지 못한 채 화성을 떠난다. 그런데 살아 있었다. 주인공을 살아 돌아오도록 한 추동력을 한 단어로 꼽으라 할 때 <그래비티>가 의지였고 <인터스텔라>가 사랑이었다면, <마션>의 그것은 신뢰다. 믿음의 대상은 과학과 시스템, 그리고 동료들이다. 자가학습 인공지능 로봇이 반란을 일으키기는커녕 ‘솔직함 90%, 유머 80%로 세팅’ 가능한 <인터스텔라>가 그랬듯 <마션>에서 인간의 과학기술은 철저하게 인간의 통제 아래에 있다. 단 한개의 나사도 풀리지 않은 듯한 NASA 임직원들은 국장부터 말단 모니터 요원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일을 똑바로 하는 인물들이다. 구조 계획을 놓고 갈등을 겪은 끝에 최적의 결론에 이르는 NASA 내부의 움직임은, 최첨단 로켓에 장착된 수많은 컴퓨터들이 주어진 연산 후 추론 결과를 내놓는 방식과 닮았다. 소설 속 표현에 따르면 마크는 “슈퍼 울트라 천재들”이 모여 있는 NASA의 정보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고 따른다. 화성 최고의 식물학자이자 화성 최초의 농부인 그는 사실 화성에서 가장 굶주린 인간이지만, 수학과 화학, 물리학과 기계공학이 신속 정확하게 생존법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작가의 과학 지식은 인물을 위기에 빠뜨리기보다 살리는 데 동원된다. 탐사대원들이 항로를 돌려 마크를 구조하는 대목에서 드러나는 동료들 사이의 믿음은 이 영화가 표방한 낙관의 절정이다. 일말의 기복도 허락지 않는 탐사대 대장 멜리사 루이스(제시카 채스테인)의 저 단단한 표정은, 목숨 걸고 믿어도 되는 시스템의 다른 얼굴이다.
<마션>의 낙관주의는 원작 소설의 문학적 재치를 고스란히 영화적 능청으로 승화한 수준이다. 마크가 어렵게 감자 잎을 틔우는 데 성공하는 장면, 즉 화성에서 생명을 창조한 장면 뒤로 NASA에서 치러지는 그의 ‘장례식’ 장면이 붙는다. 마크의 생존을 안 NASA 관계자들이 그의 심경을 걱정하는 장면 다음에는 그가 디스코를 틀어놓고는 들을 만한 음악이 없다며 투덜대는 장면이 이어진다. 마크를 남기고 떠난 대원들이 실의에 빠진 화면은 이 영화에 아예 없다. 화성을 탈출한 대원들은 상영시간 중 거의 절반이 지나서야 다시 등장한다. NASA에서 실행 가능한 구조 계획을 세우고 난 뒤다. 소설에서는 도입부 조난사고 때조차 대원들이 나오지 않다가 전체 26챕터 가운데 12챕터에서 처음 등장한다. 대신 “탐사대 여러분, 이 일은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라는 마크의 동지애 넘치는 당부가 소설 둘째 페이지에 나온다. NASA와 교신이 닿은 마크가 무엇보다 궁금해한 것도 동료들의 생사 여부와 그들의 심경이었다. 우리는 마크가 흘리는 기쁨의 눈물을 한차례 봤을 뿐 좌절의 흐느낌을 본 적이 없다. 우주복에 장착된 슈트카메라와 기지 내부 카메라 화면을 수시로 보여주며 화성에서의 일상을 꼼꼼히 보여주는 척하는 영화는, 마크가 생존 과정에서 당연히 겪었을 어떤 일들은 단호히 외면함으로써 태도를 유지한다.
답으로 향하는 통로에서 필요했던 것은
이 낙관이 향하는 목표지점은 어디인가. 구조대로 임무 전환한 탐사대는 전원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별다른 반문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1명을 살리기 위해 5명의 우주비행사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에 수십억달러가 투입된다. 중국도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 진행하던 로켓 프로젝트를 구조작전에 내준다. 마크의 생환을 기원하는 세계적 물결이 인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이언 일병 역 맷 데이먼)가 던진 질문. ‘특정 인물을 살리기 위해 치르는 더 많은 이들의 희생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는 ‘전쟁의 모순은 무엇인가’라는 추상적 물음을 위해 제시되는 구체적 질문의 하나였다.
목표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좋은 질문’을 통한 최적의 경로 설정이라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질문이 좋은 영화다. <마션>과 초기 설정이 비슷한 <캐스트 어웨이>는, 죽은 줄 알았던 주인공이 4년 만에 살아 돌아왔을 때 인간과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질문하기 위해 작품의 절반을 무인도 표류기로 할애한 경우다. <마션>에서 “한명이 죽을 높은 가능성과 여러 명이 죽을 낮은 가능성” 사이에서 주어지는 선택지는 그런 점에서 요긴한 질문을 파생한다. 만일 <아이, 로봇>에 나오는 로봇들에게 판단을 맡겼다면 그 가능성을 종합 연산한 끝에, 예컨대 49:51의 결론을 이끌어낸 다음, 그것이 마크를 구하는 쪽이든 반대이든 51에 해당하는 경우를 향해 눈 돌리지 않고 결행했을 것이다. 기계와 인간은 다르며 기계는 인간의 통제를 받는다는 이 영화의 태도는 탐사대원과 나사 관계자 모두 행복하게 잘살았더래요, 라는 뻔한(?) 몽타주 시퀀스로 자기 목소리를 분명히 한다.
원작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다소 뻔한(?) 문장으로 써 있는데, 소설을 읽으며 질문과 만난 독자에겐 이 답이 뻔하지 않다. 답으로 향하는 통로에서 좋은 질문을 가졌기 때문이다. 지구적 비관에서 출발한 낙관 프로젝트의 흐름에서, 과학의 방식을 통과하고 수학의 경로로 제기되는 이들 질문에 나는 긍정의 한표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