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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의 영화비평] 그것은 ‘진짜 행복’인가?

<디판>의 서정적 비현실성, 비현실적 리얼리즘

<디판>

스리랑카 소수민족 타밀족은 완전독립을 목표로 오랫동안 무력 투쟁해왔다. 그리고 지난 2009년 ‘타밀타이거’라 불리는 반군이 정부에 항복했고, 내전은 끝난 듯 보였다. <디판>의 이야기는 타밀타이거 출신의 전직 군인 디판이 스리랑카 내전에서 패하고, 유럽으로 망명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좀더 쉽게 망명자 권한을 얻기 위해서 그는 ‘가짜 가족’을 만들어낸다. 알지 못하는 여인이 그 여정에 동참하고, 전쟁 탓에 부모를 잃은 소녀가 그들의 딸이 된다. 이윽고 프랑스에 도착해서 세 사람은 파리 외곽의 레지던시에 머물며 본격적으로 가족 행세를 한다. 그렇게 ‘진짜 행복’을 찾으려는 디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프랑스 리얼리즘의 현재

난민을 다루는 많은 다른 영화들처럼, <디판> 역시 자신들의 땅을 떠난 이민자들이 새로운 곳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에서의 첫 모습, 길거리에서 2유로짜리 장난감을 판매하는 주인공의 행색은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한 비참함이라 말할 수 있다. 정확히 영화 중반까지 소재에 대한 작품의 접근은 기대치만큼의 만족스러운 감상을 주며 진행된다. 그리고 중반 이후, 영화의 진짜 강점이 드러난다. 오디아르의 영화란 점에서 유추하듯 프랑스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완성된 ‘서정적인 비현실성’이 보이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작품이 아닌 ‘자크 오디아르’의 장점이지만 말이다.

칸국제영화제 수상 당시 일부 평단은 “황금종려상이 영화보다 감독을 더 지지했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오디아르의 일곱 번째 영화이자, 주제에 대한 논란을 얻고 있는 이 작품 <디판>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 지점부터 관찰하는 것이 좋다. 그의 영화 <예언자>(2009)를 통해 짐작하듯, 오디아르의 작품들이 지닌 구조는 서로 닮았다. 험난한 처지에 놓인 인물이 곤경에서 벗어나자마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게 된다. 그는 조금씩 새로운 것을 학습하는데, 이때 새로운 세계는 과거의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 드러난다. <예언자>뿐 아니라 <러스트 앤 본>(2012)도 마찬가지다. 킥복서 알리는 스테파니를 만나 새 삶을 시작하지만, 이내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결론에 이르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면서 마무리되지만 말이다. 이 낙관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이 점이 중요하다. 우선 미학적 관점에서 오디아르는 역사적 주제를 사회주의적으로 푸는 켄 로치 감독이나 개인의 일화를 일반화된 사회의 주제로 내놓는 다르덴 형제와는 구분된다. 어쩌면 칸영화제의 선택은 그 관점에 대한 대가로 읽어도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오디아르의 영화는 프랑스 리얼리즘의 현재를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과거 시적 리얼리즘의 고전미와 더불어, 스스로를 곤충학자에 비유했던 자크 베케르의 점묘파적 사실주의 터치가 <디판>에는 서려 있다. 스타일이나 내러티브의 상징화에 관심을 두는 압델라티프 케시시나 로랑 캉테와도 그는 다르다. 여기에 스릴러와 누아르 등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내러티브를 사실적 카메라와 결합시킨 공로가 더해진다.

오디아르는 자신의 새 작품이 몽테스키외의 서간체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고 밝힌다. 이 전제는 작품의 소재를 유니크한 관점으로 끌고 간다. 확실히 두 작품의 외향은 다르다. 하지만 관점은 동일하다. 알려진 바와 같이 <페르시아인의 편지>는 이란에서 온 이방인의 눈을 통해, 허심탄회하게 당대 프랑스 사회의 정치를 논하기 위해 작성된 성찰적인 글이다. 직접적인 각색을 취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는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는 장치와 기이한 것에 대한 분노에 있어 소설을 모방한다. 초반 프랑스인이 기계를 사용하는 방식을 놀라워하던 소설의 주인공과 자신의 방을 가질 수 있기에 기뻐하는 영화 속 인물들은 겹쳐지고, 후반부 역시 마찬가지다. 유럽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는 우스벡의 편지는, 레지던시를 정복한 일당에게 침묵하는 프랑스 사회에 실망감을 가지는 디판의 관점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몽테스키외의 소설이 페르시아인의 관습을 전파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듯, 영화 역시 실제로는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오는 ‘시선’의 변화를 통해 주제를 드러내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영화가 후반부 액션 스릴러에 도달했을 때 관객의 당혹감을 최소화시킨다.

자크 오디아르의 감각

생각해보면 난민이라는 강력한 소재에 <디판>은 침식당했던 것 같다. 중반 이후 영화는 완전히 세 외국인들의 것으로 변모해 있는데, 이 점은 영화 찬반의 중심에 놓인다. 그들이 생성하는 변화의 리듬은 섬세하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난민쪽에서 프랑스 사회의 것으로 끌고 간다. 예를 들어 소녀가 학교에서 저지르는 친구에 대한 폭력은 사회적 입장보다 ‘소외’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 디판이 전쟁의 장치들을 불쑥 내미는 것도 비슷하다. 도시는 황폐화되었으며, 과거 전쟁을 통해 강력하게 학습된 테러의 관습이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임을 영화는 역설한다. 유사 가족이 진짜 가족으로 변화할 때 즈음, 대놓고 자신의 감상적 성향을 파괴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관객은 선택해야 한다. 눈을 감고 못 본 척할 것인가, 아니면 몽테스키외가 이르듯 “명예를 더럽히는 자격 없는 세대들을 잘라내기” 위해 발포할 것인가를 말이다.

비현실적 리얼리즘의 영화 <디판>이 지닌 미학적 균형은 자크 오디아르 스스로의 감각 덕에 가능한 것이었다. 명확한 동시에 적당히 감상적이어야 하고, 지나치게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처럼 미묘한 세력의 균형이 관객을 합리적으로 주제에 다가가게 만든다. 돌이켜보면 인트로 시퀀스가 주는 의미도 마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시작부에서 디판이 가짜 가족을 만들었던 이유는, 상황의 난처함을 드러내는 의도 외에도 내용을 바라보는 ‘시점’을 독립된 제3자의 것으로 완성하는 데에 있었다. 만일 이들이 정말 가족이었다면, 영화의 주제는 훼손되었을지 모른다. 덕분에 영화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명확해진다. 도시 웨스턴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장르적이지만, 극은 이들이 가짜 가족이란 것이 들통날까봐 두려워하는 스릴을 의도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소재에 대한 장르의 득실은 곧장 테마의 이점으로 바뀐다. 가짜 가족이 형성한 시점의 특이성은 이후 전개에서 활용되지 않더라도, 오히려 경제적으로 영화를 압축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시나리오작가로 처음 영화계에 발을 들인 오디아르는 확실히 미학적 성격뿐 아니라 구조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색채를 지니고 있다. 최소한의 사건으로 캐릭터의 심경을 그리지만, 그 과정에서 얻는 성과는 다분히 크고 사회적이다. 그러니 결말의 온화함 또한 다시금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전쟁의 경험을 겪은 적이 있는 남자가 건물의 관리인으로, 그리고 가족의 가장으로서 다시금 일어서는 과정을 영화는 드러낸다. 그는 처음엔 프랑스어를 전혀 못했고, 수돗물을 마시는 것조차 남에게 물어보는 순수한 이방인이었다. 그렇지만 변했다. 그가 도달한 사회화의 정도가 자발적인지, 아니면 문명사회의 이기인지는 돌이켜 판단할 문제다. 만일 영화의 행복한 결말이 거슬린다면, 아마도 당신은 나와 동일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행복은 허상이라고 말이다. 사회가 심어준 가짜 환상에 우리는 도취되어 있다. <디판>뿐 아니라 <예언자>도 그렇게 말한다. 이 점은 오디아르를 더욱 아이러니하게, 동시에 강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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