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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시나리오가 좋은 영화가 되기란 어렵지만 좋은 시나리오인데도 나쁜 영화가 되기란 쉬운 일이라는, 영화계에서는 얼마간 통용되는 이러한 격언은 시나리오가 결코 영화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시나리오 무용론을 가리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나리오가 영화 완성의 중요한 부분인 동시에 공정의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는 그 잠정적 운명을 강조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말이다. 루이스 브뉘엘 만년의 중요한 영화들을 함께했으며 그 자신이 대단한 학식과 재담을 갖춘 사람이기도 한 시나리오작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는 그가 막 입문했을 당시 위대한 감독 자크 타티와 그의 편집기사에게서 배운 촌철살인의 교훈 한 가지를 끝내 잊지 못한다고 전하고 있다. 시나리오작가로서 영화에 대하여 무엇을 아는가 질문하는 타티에게 카리에르가 영화에 대한 추상적인 열정과 사랑만을 열거하자 타티는 편집기사를 시켜 카리에르를 편집실로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편집실에서 편집기사가 한손은 시나리오가 적힌 종이를, 또 한손은 필름 릴
[신 전영객잔] 실종된 코맥 매카시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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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화 감독의 <잉투기>에서 어른들은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인터넷 격투기 동호회에서 ‘칡콩팥’이라는 아이디로 유명한 태식은 커뮤니티 라이벌이었던 ‘젖존슨’으로부터 대낮에 기습적으로 얻어터진 뒤 그걸 담은 동영상이 네티즌들에게 회자되는 공개망신을 당한다. 태식은 젖존슨에게 복수를 맹세하고 그를 찾아다니는 게 인생의 단기 목표인 백수 잉여인데도 그의 어머니는 그를 별달리 타박하는 기색이 없다. 자식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포기한 듯 보인다. 경매로 처분된 부동산을 접수하는 일로 돈을 버는 그의 어머니는 한국을 1%만을 위한 사회라고 원망하면서 코스타리카로 이민 갈 생각이다. 영화 후반에 태식이 ‘잉투기’라는 잉여들의 격투기 대회에 나가 젖존슨과 오프라인에서 재대결할 의지를 불사르며, 이제 뭔가 할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의지를 얻었노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고 이민 가지 말자고 부탁을 하자, 어머니는 부드럽게 거절하면서 그렇다면 그녀 혼자만 이민을
[신 전영객잔] 바보도, 괴물도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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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를 3D로 처음 보았을 때, 대체 무엇을 새롭다고 느껴야 할지 난감했다. 많은 사람들이 실감을 이야기했지만, 그 실감의 정체도 모호했다. 영화는 등장인물에 대한 동일시 혹은 나비족의 판타지적 세계에 대한 동화를 의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3D 안경이 주는 멀미를 제외하고는 지속적으로 튀어나오거나 창공을 가로지르는 이미지들이 나의 육체를 건드렸던 기억은 없었다. 어느 정도는 이 영화의 서사적인 결함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영화가 나의 육체를 통과하는 경험과 나의 육체가 영화 속 세계에 말초적으로 동화되는 경험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3D영화의 목적 아니, 효능은 결국 관객이 영화 속 세계 ‘안’에 있다는 완벽한 환영을 주는 데 있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궁극의 영화적 경험일까. 영화를 본다는 행위와 그 안에 들어가길 희망하는 욕망은 얼마나 맞닿아 있을까.
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를 3D로 보았을
[신 전영객잔] 카메라여, 당신은 어디까지 갈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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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비티>의 초반에 이상한 장면이 등장한다. 탐사선의 우주허블망원경을 수리하던 여성 우주비행사 라이언 스톤(샌드라 불럭)은 위성 파편들의 습격으로 우주 공간에 내동댕이 쳐진다. 지지할 곳도 탐사선과의 연결선도 모두 잃어버린 그녀의 몸은 텅 빈 우주 공간에서 빙글빙글 돌며 어둠이 깃든 지구 반대편 상공으로 빨려들어간다. 동료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와의 통신도 이제 끊겼다. 이곳은 지구의 600km 상공, 중력도 소리를 전달할 매개체도 없고 영하 100도를 넘나드는, 생명이 살 수 없는 공간이다.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 있다.
카메라는 라이언의 주변을 돌며, 방향도 속도도 짐작할 수 없이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그녀의 육체와 함께 조난의 움직임을 체화한다. 그러다 한순간, 라이언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카메라는 그녀의 헬멧에 점점 가까워지더니 헬멧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눈이 된다. 이제 스크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속절없이 유영하는 그녀의 육체가 아니라 그녀의 눈
[신 전영객잔] 무중력의 카메라, 외설적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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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쓸 소재를 편집기자에게 문자로 알리며 처음엔 이렇게 적는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쓸게.’ 뭔가 좀 어색하다고 느껴서 잠시 멈춘다. 물론 영화 제목을 적은 것이라고 상대방이 모를 리 없지만, 몇초 들여다보고 있자니 ‘사랑에 빠진 것처럼 글을 쓸게’라는 뉘앙스로도 읽힌다. 부호를 추가한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쓸게.’ 그때서야 ‘<사랑에 빠진 것처럼>이라는 영화에 대해 글을 쓸게’라는 뜻으로 명료해진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조금 전의 문자로 보내고 싶은 엉뚱한 충동에 잠시 시달린다. 언어에서 부호라는 프레임은 의미에 봉사하므로 때로는 명료하지만 때로는 갑갑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프레임이라는 태생을 본래부터 지닌 영화는 이것을 능동적으로 이용할 때에만 애매와 모호와 열림의 순간들을 만끽한다. 이 사소한 문자 보내기의 경험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그의 영화 <사랑에 빠진 것처럼>을 보는 감상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
[신 전영객잔] 그 돌멩이가 깬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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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미셸 프랑코의 멕시코영화 <애프터 루시아>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해설을 했다. 한달에 한번 늘 해설을 했던 극장인데도 평소에 비해 관객이 크게 줄었다. 지난해 칸에서 주목할 만한 부문 대상을 받긴 했지만 신인감독이 만든 멕시코영화에 관심이 쏠리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해도 수입사나 홍보사도 그다지 성의가 없는 기색이었다. ‘애프터 루시아’란 제목을 지은 이유가 궁금해 홍보사의 보도자료를 살펴보니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영화는 최근 이 나라에 살며 인터넷에 뜨는 뉴스에 무심한 사람이 아니라면 통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누군가가 겪는 고통은, 당연한 말이지만, 대개는 가해자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우리는 가해자 편에 서는 방식을 택한다. <애프터 루시아>는 그 점에 관해 관객에게 대속을 요구하는 영화가 아니라, 고통 그 자체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치유는 쉽지 않다
<애프터 루시아>는 교통사
[신 전영객잔] 피할 수 없다면 껴안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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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희>에 대해 “이번에 미친 짓 중 하나는 노래를 통째로 넣는 것”이라는 홍상수 감독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특집 ‘홍상수의 첫 경험’, <씨네21> 921호). 영화 안의 음악으로 세번 나오는 <고향>은 이미 알려졌듯, 1941년에 발표된 가수 이난영의 노래를 최은진이 다시 부른 곡이다. 그의 어떤 직관이 이런 시도를 하게 만들었는지 우리가 알 길은 없으나, 그간 홍상수의 음악에 친숙한 우리에게도 이 곡은 어딘지 과도하게 들린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 느낌은 그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근대가요가 흘러나오고, 그걸 부른 가수의 음색이 드라마틱하며, 무엇보다 이 노래에는 구체적인 가사가 있다는 점에 근거할 것이다. 애절하게 호소하는 가사를 더없이 애절하게 부르는 가수의 노래와 홍상수 세계의 조합에 대해 적어도 나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홍상수의 전작들에서 음악의 감흥은 음악 자체의 내용이나 개성이 아니라, 그 음악이 세
[신 전영객잔] 말(言)의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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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설국열차>를 처음 봤을 때 봉준호만은 앞으로 한국에서 영화를 찍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프로덕션 규모와 프로덕션 시스템의 가위에 눌려 봉준호가 자기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고 악전고투한 흔적을, 주관적이지만, 느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나는 대단원의 장면에서 윌포드를 연기하는 에드 해리스는 내가 본 어떤 영화에서보다 압도적 기운이 약했다. 스테이크를 굽는 옆모습으로 에드 해리스/윌포드가 화면에 등장해 커티스와 긴 대화를 나눌 때 그의 동작과 말투는 화면을 장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봉준호 영화에선 간단한 설정 화면에서도 늘 화면 내의 조형적 긴장이 탱탱하고 배우들의 기세가 그 긴장을 버텨내는 주요 동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확실히 이상했다. <설국열차>를 두 번째 보고 나서 이 작품이 여전히 흥미로운 봉준호의 영화적 진경이지 않을까 유보적인 입장이 되었다. 다소 이완된 형태지만 봉준호의 영화적 결기는 화면 속에서 지탱되고 있었
[신 전영객잔] 품었던 생각을 끊어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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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인 엽문을 소재로 한 왕가위의 영화 <일대종사>에서 엽문의 아내 장영성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불산의 비 오는 어느 밤이다. 엽문과 장영성이 헤어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1953년 대륙의 국경은 막혔고 엽문은 홍콩 신분증을 갖게 됐다”는 후반부의 자막 이후 고독한 상념에 빠진 엽문이 그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므로 이 장면은 엽문이 기억하는 아내 장영성의 마지막 모습으로서의 플래시백이다. 영화 초반부에 잠시 등장했던 장영성은 영화 내내 잊혔다가 후반부에 문득 이렇게 다시 돌아와 이내 퇴장한다.
장영성의 등장 분량은 너무 짧아서 왕가위가 엽문과 장영성 사이의 이야기를 애초에 이렇게만 촬영했을 것이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실제로도 장영성 역의 송혜교는 3년여간 촬영하며 훨씬 더 많은 장면에 출연했다고 알려져 있다. 신빙성 없는 풍문으로는 극중 엽문(양조위)과 팔극권의 달인인 일선천(장첸)의 뜨거운 무술 대결 장면이 촬영되었지만 삭제되었다
[신 전영객잔] 인생무상의 멜로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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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에서 남궁민수(송강호)가 등장하는 순간은 예상과 달리 영화의 첫 번째 클라이맥스가 지나간 뒤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와 꼬리칸 반란자들이 꼬리칸을 탈출하며 이 영화에서 가장 역동적인 질주의 쾌감을 불러일으킨 다음, 열차의 감옥에 이르러 마침내 남궁민수의 정체가 드러난다. 반란 지도자 커티스와 비밀스러운 열차의 열쇠가 되어줄 남궁민수가 처음 대면하는 이 순간이 앞으로의 서사적 전개를 책임져줄 중요한 전환시점이 될 것으로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영화는 이 장면에 기대되는 긴장감을 뜬금없는 말장난이나 행동들로 분산시키며 앞선 탈출 시퀀스의 흥을 단절시킨다. 물론 그것이 서사적, 장르적 기대를 배반하는 봉준호 특유의 스타일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그냥 지나치기에는 좀 이상한 점이 있다.
크로놀 냄새를 맡고 깨어난 남궁민수는 부스스한 얼굴로 커티스와 그의 일행을 쳐다본다. 잠시 어색한 순간이 지나간 뒤, 남궁민수와
[신 전영객잔] 두 이야기는 결국 만나지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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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 전문가 남궁민수(송강호)와 반란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마침내 설국열차의 지배자 윌포드(에드 해리스)와 기차의 엔진이 거처한 최전방 칸의 문 앞에 이르렀다. 커티스는 자신의 치욕스런 과거를 고백하고 참회한 뒤, 남궁민수에게 빨리 마지막 문을 열라고 재촉한다. 남궁민수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다른) 문을 열고 싶어. (열차의 벽면에 난 문을 가리키며) 워낙 오래 갇혀 살아서 저걸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좆도 문이란 말이지. 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잔 말이지….”
이 대목에서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건 봉준호의 대사가 아니다. 물론 이 대사는, 그 서민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지적이며 급진적이다. 그는 지금 하층민의 봉기에 의한 권력 교체만을 생각해온 커티스에게 체제의 변혁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체제의 바깥을 꿈꾸는 형이상학적 결단을 제안하고 있는 중이다. 마침내 그의 딸 요나(고아성)에 의해 기차의 벽은 폭파되고 연이어 기차 전체가 붕괴된다.
[신 전영객잔] 봉준호 바깥의 봉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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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머스 앤더슨의 <마스터>를 보고 굉장하다는 생각이 든 건 미국 현대사의 이면을 자기만의 독법으로 파고드는 이 내공 깊은 감독이 내리는 결론이 내게는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와킨 피닉스가 연기한 주인공 프레디, 누가 봐도 정신병자이거나 정신병자가 될 가능성이 짙은 남자를 감독이 긍정하는 것으로 봤다. 이는 프레디의 마스터였던 랭카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입을 빌려 그를 ‘마스터가 필요없는 남자’로 찬양하는 대사로도 드러나지만 이미지로도 느낄 수 있다. 영화 초반,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해군 갑판병인 프레디가 무료하게 배와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이 이어질 때 인상 깊은 장면이 있다. 이것저것 재료를 섞어 술을 만든 프레디가 만취해 배 꼭대기 어딘가에 누워 있을 때 저쪽 아래 갑판 위의 다른 병사들이 먹을 것 등을 던지며 야유하는 광경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카메라 시점 아래 프레디는 순교자처럼 보인다.
프레디는 자신이 조정할 수 없는 운명으로부터
[신 전영객잔] 실패자들 그래서 더 긍정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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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석유 시추업자 대니얼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인생 노년은 아수라장이다. 그는 대저택을 지녔지만 그 안에서 외롭고 포악한 늙은이로 살고 있으며 오랫동안 키워온 양아들과도 방금 악담을 퍼부으며 서로 돌아섰다. 때마침 영화 내내 경쟁자였고 눈엣가시였던 젊은 사이비 기독교 교주 일라이(폴 다노)가 그를 찾아와 돈을 요구하자 대니얼은 오래전에 그가 일라이에게 당했던 방식 그대로 모욕감을 갚아준다. 그러고도 끝내 분을 이기지 못해 일라이의 머리를 볼링 핀으로 두들겨 살해하고는 “내가 다 이루었다”(I am finished)고 읊조린다. 본론에서 펼쳐졌던 미치광이 사업가와 야욕에 찬 교주의 터질 것처럼 팽팽했던 대결은 그렇게 대단원에 이르러 전자가 후자를 해치우고는 상대방의 대표적인 교리 한 구절(“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을 마음대로 착취하며 끝나게 된다. 장대한 이 영화의 끝도 여기다.
이 라스트신은 벼락
[신 전영객잔] 이건 영화인가? 아니 이건 영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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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스>에 대한 꼼꼼한 통찰이 담긴 글들(김효선 “지금 여기는 지옥입니다”, 허문영 “한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 김지미 “구원은 없어라”)을 읽었다. 그 통찰들을 능가하는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할 자신은 없지만, 하나의 질문만은 덧붙일 필요를 느낀다. 이 영화를 감상하는 당신의 시선은 지금 영화 속 어느 자리에서 어느 곳을 향해 있는가? 영화를 보는 동안 이걸 묻지 않은 채, 관객인 우리가 마치 객관적인 자리에서 자본의 추상성, 권능, 환상을 보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인가. 혹은 이 영화를 자본주의에 대한 근심으로 읽어내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위의 질문을 경유하지 않고 이 영화가 형상화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초월적인 자리에서 그 자본의 매커니즘을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유사한 착각일 수 있지 않은가.
허문영만이 이 영화에 대한 섬세한 비평의 결론에 이르러 ‘우리의 자리’를 의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크로넨버그는 한 자본가의 미학적 승리를 묘사하며
[신 전영객잔] 출구를 마련하지 않은 악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