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카메론은 <터미네이터2>(1991)에서 묵시록적 SF의 서사를 종결지었지만 제작사는 시리즈를 더 이어나가길 바랐다. 그러나 카메론의 손을 떠나서 만들어진 두번의 속편은 비평적 뭇매를 맞았으며 흥행 또한 성공적이지 못했다. <터미네이터3: 라이즈 오브 더 머신>(2003)은 예정된 디스토피아적 미래상과 시간여행, 암살자의 출현 등 전편들과 동일한 서사 구조를 공유했지만 차별되는 지점 없이 답습하는 데 지나지 않았고,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2009)은 전쟁영화로서 장르의 면모와 스케일을 일신하고자 했지만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다. 전편과의 연관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와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처해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길을 잃었던 것이다.
<터미네이터>(1984)와 <터미네이터2>만으로도 이미 타임 패러독스를 완결하는 설정과 구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새로운 실마리를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시리즈의 창조자 카메론이 자신의 뒤를 이은 속편들에 냉담한 반응으로 일관한 데에는 바로 이런 내재적인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카메론이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 관한 인터뷰를 통해 예외적으로 “마치 르네상스를 맞은 것처럼 시리즈가 새로운 힘을 얻었”으며 “이 새 영화는 <터미네이터>의 3편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라고 찬사를 보낸 건 매우 의미심장하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가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관(觀)과 만나는 접점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터미네이터2>의 연장선상에서 - 미래전쟁 시퀀스와 타임머신
공동각본가 윌리엄 위셔와 함께 작성한 <터미네이터2>의 각본 초고에는 영화상에서 간략하게 묘사하고 넘어간 미래의 세계상과 다양한 설정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컨셉 아트까지 완성되어 있었지만 그대로 영상화했다간 영화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지고 당시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제작비가 치솟을 우려가 있었기에 사전 제작 단계에서 잘려나간 부분들이 적지 않았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플롯은 카메론이 <터미네이터2>의 설정해두었지만 여건상 표현하지 못하고 삭제했던 미완성 컨셉으로부터 시작한다. 가장 대표적인 대목이 오프닝으로 펼쳐지는 미래전쟁 시퀀스였다.
‘기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목전에 둔 존 코너는 스카이넷의 본거지로 침투하는 데 성공한다. 스카이넷의 중심부에는 타임머신이 설치된 방(Time Displacement Chamber)이 있었고 존은 타임머신을 작동시켜 부관인 카일 리스를 과거로 보낸다. 다른 부하가 “카일은 어떻게 됩니까? 아니 어떻게 됐나요?”라고 묻자 존은 “카일은 임무를 완수하고 결국 전사한다. 그는 내 아버지다”라고 말한다. 모두 숙연해진 가운데 터미네이터가 생산되는 공장 시설로 발걸음을 옮긴 존 코너와 부하들은 여러 대의 T-800이 라인에 진열되어 있는 걸 보게 된다. 그중 비어 있는 자리를 본 존 코너는 열세에 몰린 스카이넷이 사라 코너를 죽이기 위해 T-800 한대를 먼저 보냈음을 눈치채고 그 자리 옆의 또 다른 T-800을 회한에 젖은 표정으로 바라본다(<터미네이터2>의 T-800). 그리고 영화의 시점은 현재로 넘어온다.’
예산과 제작 일정(1990년 5월 칸국제영화제에서 <터미네이터2>의 제작발표회를 가진 카메론은 1991년 7월4일까지 고작 1년 남짓한 기간 내에 영화를 완성해야 했다)의 문제로 이 장면의 비중은 대폭 축소되었고, 따라서 스카이넷 중심부와 타임머신 역시 구현되지 못했다(컨셉 아티스트로 영화에 참여한 스티브 벅은 이때 사용하지 못한 타임머신의 디자인을 로버트 저메키스의 <콘택트>(1997)에 반영하게 된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오프닝은 바로 <터미네이터2>의 각본 초고와 컨셉 아트상에서 묘사한 미래전쟁의 묘사와 타임머신의 디자인을 고스란히 가져와 재활용한 것이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인류가 기계에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기 직전인 <터미네이터2>의 도입부로 돌아와서, 이 묵시록적 SF 연대기의 이야기가 종결되는 지점에서 다시 시리즈를 리부트(reboot)하려 한다.
테크놀로지와 인간성, 카메론의 낭만주의
<터미네이터2>의 극장판(139분)에서는 잘려나갔지만 1993년 재개봉된 스페셜 에디션(154분)에서 복원된 장면 중에는 T-800이 존 코너로부터 인간의 웃음을 배우는 장면이 있다. 코미디적인 톤이 극의 진지한 분위기를 깰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들어낸 이 장면은 점차 기계가 인간과의 교감을 통해서 인간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관객은 T-800을 살인기계가 아닌 인격체로 바라보고 어린 존 코너와의 사이에 형성되는 유대관계에 공감하게 된다. 애칭 ‘팝스’로 불리는 T-800의 웃음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가 <터미네이터2>에 바치는 오마주(hommage)인 동시에 제임스 카메론이 필모그래피에서 일관되게 그려온 테크놀로지와 인간성의 화두를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감독 앨런 테일러가 이해하고 관통하는 지점일 것이다.
<에이리언2>(1986)에서 리플리와 뉴트, 안드로이드 비숍간의 신뢰와 연대는 <터미네이터2>에서 사라 코너와 존 코너, T-800간의 준가족적 유대로 변주되어 인간과 기계의 구분을 넘어선 관계를 보여준다. <타이타닉>(1997)에서 근대 기술의 정점이었던 타이타닉호는 계급구조를 공간화하면서 사람들을 갈라놓지만 주인공들은 신분을 초월한 사랑에 빠지며 이는 <아바타>(2009)에서도 인공적 신체를 통한 자연과의 교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각기 다른 양상이지만 카메론은 테크놀로지에 의한 비인간화의 상황을 배경으로 깔아놓으면서, 그 안에서 이분법적 경계를 뛰어넘은 존재들의 교감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카메론의 영화가 정서적 공감을 일으키는 요인은 바로 이러한 특유의 낭만주의에 있다. 제임스 카메론은 한없이 차갑고 비정한 테크놀로지와 한없이 따스하고 인간적인 감성의 대비를 통해 극적인 드라마를 빚어낼 줄 아는 작가이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앨런 테일러는 카메론의 세계관과 감성을 명료하게 이해한 바탕에서 극을 이끌어가고 있다.
사라 코너와 ‘팝스’ T-800간의 유사 부녀(父女) 관계는 존 코너와 T-800간의 유사 부자(父子) 관계에 대한 재치 있는 응답이며 딸과 같은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한 팝스의 헌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 나아가 인류의 지도자에서 치명적인 터미네이터로 화(化)하는 존 코너의 캐릭터 재해석은 카메론이 <에이리언2>와 <아바타>에서 관철해왔던 역설(paradox), 즉 기계/비인간은 인간화되지만 인간은 비인간화되는 상황에 정확히 대응된다. 분명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터미네이터>나 <터미네이터2>의 아성을 뛰어넘는 수준의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작품은 ‘테크 누아르’(tech noir) 신화의 창조주 제임스 카메론의 비전에 대한 존경과 존중을 보여주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한 작가의 정수를 꿰뚫고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변주해내는 역량이 프랜차이즈를 성공적으로 부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