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주부였던 리카(미야자와 리에)는 은행에서 일을 시작한 뒤 우연한 계기로 고객의 돈을 횡령하기 시작한다.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은 리카의 범행 방법을 보여주는 데 무게를 두는 대신 그녀가 왜 수천만엔을 횡령하게 되었는지 그 내면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종이 달>에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이다. 감독은 여기에 답하기 위해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는 리카의 현재 서사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 시절 리카가 기부금을 내기 위해 돈을 훔친 일화를 다룬 과거 서사다. 영화를 보고난 뒤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과거 서사는 왜 필요한가. 과거 서사를 통해 리카가 어렸을 때부터 돈을 훔치는 데 스스럼이 없었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리카의 범행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 같다. 가장 손쉬운 이 답변은 현재 서사의 존재 이유와 상충한다. 한쪽에서 “리카는 왜 그랬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 “리카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질문 자체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과거 서사는 왜 필요한가.
현재의 빈틈을 메우는 과거
감독은 인물의 감정선을 세밀하게 보여주기 위해 남편과의 관계가 미묘하게 어긋났던 리카가 대학생인 고타(이케마쓰 소스케)와 사귀면서 생의 활기를 되찾는 과정과 고타의 빚을 대신 갚기 위해 그녀가 첫 번째 횡령을 저지르게 된 과정에 영화의 전반부를 할애한다. 리카는 고객의 돈을 가지런히 봉투에 담아 고타에게 건넨다. 받지 않으려는 고타와 주려는 리카의 대화가 이어진다. 카메라는 누가 말하고 있느냐에 따라 고타와 리카의 얼굴을 번갈아 클로즈업한다. 그런데 대화의 마지막, 고타가 “고마워”라고 말할 때 카메라는 고맙다고 말하는 고타 대신 그런 고타를 보고 기뻐하는 리카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이와 같은 전반부의 마무리로 강조되는 것은 첫 번째 횡령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이를 가능케 한 리카 내면의 감정이다. 뒤이어 어린 시절 리카가 다니던 학교에서 제3세계 아이들을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는 과거 장면이 등장한다. 기부의 미덕을 길게 늘어놓는 수녀의 대사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기쁘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물론 여기서 과거 장면은 수녀의 마지막 대사로 리카의 환한 미소를 다시 한번 강조하기 위해 호출되었다. 이 장면은 <종이 달>이 과거 서사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기본 용례를 제공한다. 영화에서 과거 서사의 내용만큼 혹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 서사를 들려주는 타이밍이다.
전반부가 리카와 고타의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리카와 스미(고바야시 사토미)의 이야기다. 직장 선배인 스미는 리카가 예금문서를 조작한 것 같다고 의심하지만 상사는 이를 묵살한다. 스미가 원치 않는 발령을 받았을 때 리카가 그만둘 것인지 묻자 그녀는 단호하게 “갈 거야, 가야 할 곳으로”라고 말하는데 이 문장은 “할 거야, 해야 할 일이 있다면”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스미는 혼자 리카의 범행을 밝혀내려 한다. 그런데 정작 스미가 리카의 범행을 밝혀내는 장면은 생략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관객은 이미 누가 범인이고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다. 스미가 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 과정도 알고 있다. 따라서 감독은 스미가 리카의 범행을 폭로하는 장면이 관객에게 별다른 놀라움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대신 감독은 증거를 확보한 스미가 리카와 마주치는 순간 이야기의 바통을 과거 서사에 넘긴다. 이때 관객은 친구들의 기부가 뜸해졌을 때에도 리카가 혼자 기부를 계속하기 위해 아버지의 돈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서 과거 서사는 관객이 몰랐던 리카의 또 다른 비밀을 밝힘으로써 현재 서사의 결핍된 충격, 일종의 서사적 쾌를 대리한다.
과거와 현재의 의도적 교차
모든 사실이 밝혀진 뒤 스미는 리카에게 왜 그랬는지 묻는다. 이와 함께 수녀가 어린 리카에게 왜 그랬는지 묻는 과거 장면이 교차편집된다. 과거의 리카와 현재의 리카는 각각 수녀와 스미를 상대로 스스로를 변호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더이상 과거와 현재 서사의 경계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그 경계를 허물어뜨려 마치 네 인물이 시간을 초월해 동시에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 장면은 “과거 리카와 수녀” , “현재 리카와 스미”로 짝지어져 진행되지 않는다. 대신 현재 리카의 대사를 수녀가 반박하고 수녀의 말에는 다시 과거의 리카가 맞서고 과거 리카의 대사를 스미가 반문하는 식이다. 가령 현재 장면의 리카가 “그래서 진짜 하고 싶었던 걸 한 겁니다”라고 말하면 리버스숏으로 수녀가 “그런 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혹은 과거 장면의 리카가 “(훔친 돈이지만) 아이들이 기뻐하는 걸 생각하면 행복해요”라고 말하면 이번에는 리버스숏으로 스미가 “행복해서 횡령한 건가요”라고 반박한다. 이때 스미는 과거 리카의 대사를 맞받아치면서 현재의 리카에게 반문하고 있다.
이 장면의 편집은 흥미롭다. 팽팽하게 조율된 대화는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 있는 순간을 빚어낸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방식이 흥미로운 것과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현재 서사의 진행에 다소 어색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네 인물의 대결이 시작되기 전 리카는 “가겠습니다. 가야 할 곳에.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전액을 돌려주면 형사고소는 피할 수 있을지도 몰라”라는 스미의 말에 대한 응답이므로 이를 죗값을 받겠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리카는 고타와 처음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날 아침 초승달이 사라진 이야기를 들려준 뒤 돌연 마음을 바꿔 유리창을 깬 뒤 도주한다. 그런데 관객의 입장에서 리카의 변심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세심하게 배치된 네 인물의 대화가 그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사무실에서 스미와 리카가 나눈 대화가 아니다. 더불어 과거 장면은 리카의 회상 장면도 아니다. 과거 장면은 전적으로 관객만을 위해 준비되었다. 현재 서사만 따로 분리한다면 도주를 결심하는 리카의 번복에는 얼마간의 비약이 존재한다. 때문에 과거 장면을 관객의 논리적 착시를 일으키기 위해 마련된 영화적 장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과거가 현재를 말하는가
과거 서사는 리카를 이해하기 위해 마련된 또 하나의 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 서사의 주된 기능은 현재 서사를 더 그럴듯한 이야기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 서사의 보완이 아니라 서사 외양의 보완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이는 엔딩에서 보다 확실해진다. 타이에서 도피 중인 리카가 자신이 돈을 훔쳐 후원했던 꼬마를, 이제는 성인이 된 그를 우연히 만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감독이 개연성을 지불하고 얻고자 했던 것은 과거 서사와 현재 서사를 겹쳐놓음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매듭짓는 것이다. 유일하게 언급하지 않은 과거 서사의 한 장면을 말할 때가 되었다. 오프닝에서 관객이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얼굴은 리카가 아니라 리카가 들고 있는 사진 속 꼬마의 얼굴이다. 감독은 이후에도 꼬마의 사진을 반복적으로 등장시킴으로써 관객에게 그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앞의 문장을 이렇게 고쳐야 할 것 같다. 감독은 엔딩에서 개연성을 지불한 게 아니라 관객의 궁금증과 개연성을 맞교환했다. 만약 엔딩을 본 뒤 현재 서사와 과거 서사 사이에 더 많은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면 당신은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서사의 분장술에 유혹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