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종이 달>을 본 뒤, 원작인 가쿠타 미쓰요의 <종이달>을 읽었다.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을 두고 원작과 비교해 따져 묻는 건 사실 좀 허무한 일이다. 연출자의 목표가 ‘소설의 빈틈없는 재현’일 리 없을뿐더러, 설사 데칼코마니 하듯 소설을 영화로 찍어내려 했다고 해도 쓰인 ‘글’을 ‘(움직이는) 이미지’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생겨난 ‘얼룩’들은 차라리 필연에 가깝다.
<종이 달>을 만든 요시다 다이하치는 이 ‘얼룩’을 즐길 줄 아는 감독이다. 이 영화 전까지 그는 총 네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모두 원작 소설(혹은 만화(<퍼머넌트 노바라>))을 출발점으로 하는 작품으로, 그 각색 방식이 무척 흥미롭다. 실제로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에서 그가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는’ (작은) 사건이 불러일으킨 동요를 높낮이가 서로 다른 네 등장인물의 ‘시점-감정’과 정교하게 분할된 ‘시간’이라는 두개의 축 위에 정신없이 펼쳐놓았다가 영화의 마지막에 하나의 공간(학교 옥상)으로 모두를 불러들인 다음 마법처럼 이를 봉합해냈을 때, 홀린 듯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종이 달>은 이러한 마법 같은 얼룩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허무함을 감수하고 원작 소설을 꺼내든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소설과 영화는 많은 차이가 있다. 소설은 주인공 리카와 그녀를 알고 있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일인칭시점으로 번갈아 기술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리카의 과거는 여러 관찰자의 시선에서 기록된 기억들로, 범행 전후 과정은 도주 중인 리카 자신의 주관적 플래시백으로 듣게 된다. 여기엔 애초부터 리카가 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혹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객관적’ 또는 ‘전지적’ 시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리카는 ‘향 좋은 새 비누 같은’ 어른스러운 소녀이기도 했다가 또 누군가의 기억엔 ‘집착이 심하지도, 어딘가 빠지기도 쉽지 않은’ 정의로운 사람으로 남아 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담담하게 회상하는 리카 본인의 이야기까지 다 합친다 해도 우리는 왜 그녀가 결국 범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지 명확하게 정리해낼 수 없다. 대신 소설은 이 모든 등장인물을 아우르는 하나의 감정 상태인 ‘만능감’(萬能感)에 대해서 설명한다. “어디로든 가려고 생각한 곳으로 갈 수 있고, 어떻게든 하려고 생각한 것을 할 수 있다. 자유라는 것을 처음으로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리카를 떠올리는 인물들의 기억과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리카의 플래시백, 모두의 중심에 놓인 것은 바로 이 ‘종이 달’ 같은 손에 잘 잡히지 않은 감정이다.
하지만 요시다 다이하치는 주변 인물을 모두 제거한 다음, 리카(미야자와 리에)를 영화 속 유일한 화자로 설정한다. 그리고 플래시백의 형태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대신 정규직으로 발령받은 리카가 첫 출근하는 순간부터 타이로 도망가는 시점까지 선형으로 진행하는 방식을 택한다. 여기까진 연출자의 선택이겠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영화는 시간순으로 정리된 사건 일지처럼 리카의 행적을 쫓는 데 전력을 다한다. 그리고 리카를 제외한 다른 인물은 그저 기능적으로 배치하는 데 그친다. 그 때문에 소설을 읽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우리는 리카가 젊은 고타(이케마쓰 소스케)를 알게 되고, 그를 위해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위해) 돈을 훔치기 시작하는 리카에게 선뜻 공감하기 어렵다. 리카의 남편이 아내가 선물한 커플 시계를 왜 내키지 않아 하는지, 혹은 갑자기 일에 집착하며 상하이에 가지 않겠다는 리카를 왜 한번쯤 의심하지 않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상황은 고타쪽도 마찬가지다. 왜 그가 잠깐 마주친 리카를 따라가는지, 함께 돈을 쓰며 즐기는 동안 그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영화는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다층적인 결들로도 다 포착하지 못했던 소설 속 서사는 스크린으로 옮겨와 당혹스러울 정도로 평평해지고,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리카가 저지른 범죄와 그녀의 감정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애써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리카의 얼굴 위로 언뜻 스치는 순간적인 감정의 동요나, 속도감이 달라진 그녀의 몸짓과 걸음걸이뿐이다. 섬세하게 감정을 연출하는 것과, 텅 빈 서사 안에 앙상하게 남아 있는 감정을 애써 지켜보게 만드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직 남아 있다.
감독은 소설의 다면적인 이야기 구조를 리카를 중심으로 정리해나가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좀더 다가가기 위해 소설에 없는 두명의 인물, 직장 동료 스미와 아이카와를 만들어낸다. 아이카와는 상사와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으며 상사가 저지른 ‘범죄’를 슬그머니 덮어주는 대가로 ‘돈의 맛’에 눈뜬 인물이다. 그녀는 이 사실을 리카에게 털어놓고 자꾸 변해가는 리카에게 모든 것이 그저 다 조심해야 할 ‘일상적인 일’이라 말하며 그녀를 부추긴다. 이 정반대의 지점에 스미가 있다. 경제지를 읽는 스미에게 리카는 대단하다며 자신도 더 공부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리카에게 스미는 좋아 보이는 일을 찾아온 거면 그걸로 된 거 아니냐며 차갑게 핀잔을 준다. 하지만 리카는 퇴물로 퇴직을 종용받는 스미를 보며 경제지를 읽는 것 따윈 의미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한명은 공모의 방식으로(아이카와), 또 한명은 반면교사의 방식으로(스미) 리카를 범죄로 내몰며 그녀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결정적 문제는 소녀 리카의 ‘기부금 사건’을 현재 진행하는 리카의 서사에 녹여 넣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텅 빈 교실에서 소년의 사진을 바라보는 소녀의 뒷모습이 남기는 궁금증은 소녀 리카가 돈을 훔쳐 기부를 하는 순간, 횡령을 저지른 현재의 리카와 안전하게 맞물린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한 인간의 진정한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선 자신의 본성을 찾아야 한다.” 영화와 연결지어 설명하면 이렇다. 거액의 돈을 횡령한 리카의 범죄는 사실 어린 시절, 아빠의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댔던 소녀의 ‘본성’을 생각해본다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체포돼 죗값을 치르는 것이 결국 ‘자유’라는 사실을 깨닫는 원작 속 리카와 달리, ‘있어야 할 곳’으로 가겠다며 창문을 깨고 도망치는 영화 속 리카를 만들어낸 감독은 말하자면 지금 그것이 그녀의 본성을 찾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하는 중이다. 권선징악의 드라마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니 그 선택에 동의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과연 소녀 리카의 행위와 성인 리카의 행위를 동일한 ‘본성’으로 볼 수 있느냐는 점이다. 훔치는 행위는 동일하지만 그 돈으로 벌인 일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할아버지 돈을 어려움을 겪는 손자에게 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믿었던 리카의 태도는 소녀의 그것과 닮아 있지만, 횡령이 자가 증식하는 순간, 그 의미는 변질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횡령이 발각돼 죗값을 치러야 하는 리카 앞에 불현듯 소년과 한 약속을 지킨 것뿐이라며 수녀에게 맞서는 소녀 리카의 모습을 불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관객에게 이 두 가지가 같은 본성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기라도 하듯 영화의 마지막, 타이로 도망친 리카 앞에 그 소년을 데리고 온다. 물론 우리는 이 소년이 실제 리카가 돈을 보내주던 소년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청년을 대면한 리카만큼은 그가 자신이 후원해준 소년이 맞다고 믿는다. 그런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