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주 에머리빌에 위치한 픽사 본사에는 ‘픽사 대학’(Pixar University)이 있다. 픽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이곳에서 수업을 듣기도 하고, 가끔 가르치기도 한다. 데생이나 머신 러닝 같은 테크니컬한 수업에서부터 창의적인 사고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업들이 열린다. 픽사 본사를 방문했을 때, 가장 인기 있는 수업이 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신경과학!” 인간의 인지사고과정과 행동에 대한 과학적인 토대에 다들 관심이 많단다. 나도 그들과 함께 ‘신경과학의 최신 연구 성과’에 대해 2시간이나 떠들기도 했다. 그들은 이미 신경과학도들이었다.
아마 <인사이드 아웃>을 만든 피트 닥터 감독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흔히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을 보면 “도대체 저 사람 머릿속엔 뭐가 들어 있을까?”라고 혼잣말을 하는데, 이 영화는 그걸 고스란히 화면에 옮겨놓았다. 오랫동안 폐기되지 않고 살아남았던 ‘호문쿨루스 가설’(Homunculus hypothesis, 뇌 속에 호문쿨루스라는 작은 사람이 우리를 조종하고 있다는 설정)에 기반을 둔 영화라고나 할까? 감정기복이 심하고, 세상을 한없이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춘기 아이의 머릿속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궁금한 아빠적 상상력이 이 영화의 모티브가 아닐까 싶다.
신경과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6개의 기본 감정(basic emotion)을 다양하게 중첩하면서 20개 이상의 복잡한 감정(complex emotion)을 만들어낸다. <인사이드 아웃>은 그중 ‘놀람’(surprise)을 제외한, ‘기쁨’(Joy), ‘슬픔’(sadness), ‘버럭’(anger, 분노), ‘까칠’(disgust, 역겨움), ‘소심’(fear, 두려움)을 의인화해서 이들이 뇌 속에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조종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내 안의 감정들이 만들어내는 목소리를 바깥으로 끄집어낸(Inside out!) 영화다.
사춘기 반항이 시작된 11살 소녀 라일리는 정든 고향 미네소타를 떠나 낯선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간다. 친구들과 떨어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라일리의 ‘감정 컨트롤 본부’는 혼란을 겪는다. ‘기쁨’과 ‘슬픔’은 실수로 본부를 떠나 길을 잃게 되고 ‘버럭’, ‘까칠’, ‘소심’ 세 감정만이 라일리의 마음을 조종하게 된다. ‘슬픔’과 ‘기쁨’이 우여곡절 끝에 라일리의 머릿속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담은 이 영화는 사춘기를 ‘기쁨과 슬픔이 잠시 집을 나간,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묘사한다. 부모들은 ‘맞다!’며 박수를 치겠지만 청소년들이라면 ‘헐~’ 어이가 없을 설정이다. 영화는 <몬스터 주식회사>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재미있고, <토이 스토리3>만큼은 아니더라도 묵직한 감동을 제공한다.
허용 범위의 오류, 적절한 정교함
나 같은 신경과학자에게 “이 영화, 어떻게 봤나요?”라고 묻는다면, 당신의 깊은 뇌 속 중격측좌핵은 ‘이 영화가 얼마나 과학적인가?’ 혹은 ‘과학인 오류는 없는가?’에 대한 대답을 기대할 것이다. 감정과 표정 연구의 대가인 심리학자 폴 에크먼이 자문을 했으니, 이 영화가 과학적으로 영 허투루 만들어졌을 리는 없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기쁨은 복측 피개부, 두려움(소심)은 편도체, 분노(버럭)는 시상하부, 역겨움(까칠)은 섬엽 등 서로 다른 영역에서 기본 감정들이 처리되는데, 각 영역의 세포 모양과 네트워크 구조를 캐릭터나 공간으로 잘 바꾸어놓은 것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노골적으로 세포가 연상되지도 않게 말이다.
과감한 생략이나 단순한 설정(예를 들어, 아빠의 감정 컨트롤 본부는 주로 버럭이 조정하고 엄마는 슬픔이 맡는다거나)이 불편할 순 있지만, 애니메이션이 이 정도의 과학적 정교함을 갖기도 쉽지 않다. 신경생물학과 심리학에 대한 사전조사가 잘된 사례다. 특히 제작진이 이런 공부를 많이 하다보면, 웹툰 <유미의 세포들>처럼 인간 행동에 대한 컨트롤 본부를 세포 수준(이성세포, 감성세포, 음란세포, 출출세포 등)에서 설정하고 싶어지거나, 도파민(쾌락), 세로토닌(행복 혹은 우울), 아세틸콜린(흥분) 등 신경전달물질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댔을 텐데, 직관적으로 명쾌한 ‘기본 감정’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건 적절한 자기 제어였다.
하지만 몇 가지 설정상의 오류들이 눈에 거슬린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행동을 관장하는 컨트롤 본부를 감정들이 제어하고 있다는 점이다. 뇌에 컨트롤 본부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전전두엽’이 그 역할을 맡고 있을 텐데, 이곳은 이성과 감성이라는 쌍두마차가 이끌고 있다. 자동적으로 반응하고 빠르게 판단하며 직관적이고 결정하는 ‘시스템1’과 인지적으로 반응하고 심사숙고해 판단하며 사려깊게 결정하는 ‘시스템2’가 만나 선택과 행동을 만들어낸다. 감정들은 대개 ‘시스템1’에 속하니, 영화 속 설정은 ‘시스템1’에만 좌우되는 감정적인 인간들로 우리를 묘사하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기본 감정 다섯 중 누가 제어 버튼을 누르는가에 따라 사고와 행동이 달라진다기보다는, 단순하고 성질 급한 ‘시스템1’팀과 느리고 우유부단한 ‘시스템2’팀이 서로 주도권 싸움을 하는 모습이 좀더 실제 뇌에 가깝다. 영화에선 ‘기쁨’이 대장처럼 주도권을 잡고 있지만, 실제 뇌에선 ‘두려움’ 같은 생존에 필요한 요소가 더 큰 목소리를 낸다.
영화에서 뇌는 끊임없이 단기기억을 ‘핵심 기억’이란 구슬 형태로 장기적으로 보관하는 창고로 옮긴다(‘핵심 기억’(core memory)이란 단어는 신경과학자들보단 컴퓨터과학자들에게 익숙한 개념이다). 같은 핵심 기억이라도 어떤 감정이 더해지느냐에 따라 매번 다르게 경험된다는 영화 속 설정은 꽤 그럴듯하다. 하지만 실제 뇌 속 ‘기억저장소’는 영화에서처럼 잘 정리된 구슬창고가 아니라, 과학자의 정리 안 된 연구실 책상처럼 순서도 뒤죽박죽이고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엉망진창’에 더 가깝다.
무엇보다도, 핵심 기억이 성격(personality)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설정은 과도하다. 성격이 기억에 영향을 받긴 하지만 타고난 기질이나 반복된 습관, 자라온 환경이나 사회적 역할 등이 만들어낸 복잡한 뇌구조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슬픔의 목소리는 곧 공감과 연대의 신호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슬픔’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통찰이다. 영화 초반부에는 ‘기쁨’의 비중이 크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슬픔’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피트 닥터 감독이 슬픔을 가장 매력적인 감정으로 주목한 건 깊은 통찰이면서 동시에 ‘신의 한수’였다.
왜냐하면 사실 기본 감정들 중에서 슬픔은 실체가 불분명한, 가장 오묘한 존재다. 두려움이나 놀람, 역겨움은 우리로 하여금 위험을 감지하게 하고 그것을 피할 수 있게 도와준다. 기쁨은 삶의 추진력을 제공하며, 분노는 위험에 맞서 싸우는 용기와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슬픔은 왜 필요한지 아직 마땅한 이론이 없다. 생존에는 물론이요, 배우자를 찾거나 번식을 하는 데에도 슬픔은 별로 유용하지 않다.
그동안 심리학자들은 슬픔이 부정적인 상황에서 일을 빨리 포기하게 만들어 시간 낭비를 예방하는 순기능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타인에게 동정심을 유발해 보호 기제로 작동해왔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이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공동체에서 배려한 흔적은 수천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는 슬픔에 대한 ‘최신 가설’을 결말을 통해 보여준다. 새로운 가설에 따르면, 슬픔은 타인의 도움이 지금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구조 신호라는 것이다. 부정적인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며 슬픈 감정을 표현하면, 가족과 친구가 다가와 내 슬픔을 공감해주는 것이 나를 새롭게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나를 위해 친구가 흘려준 눈물이 삶의 의지가 돼본 경험이 있다면 슬픔이야말로 공감과 연대의 신호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영화는 슬픔이 기쁨이나 분노, 소심과 까칠 못지않게 중요한 감정이며, 가족간의 사랑과 같은 숭고한 감정이 슬픔(과 이에 대한 공감)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내 머릿속 감정들의 여러 얼굴들을 마주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신경과학자들이 한동안 유쾌한 수다를 떨 만한 ‘안주 같은 영화’ 한편이 탄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