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 료타로의 소설 <신센구미 혈풍록>에 실린 ‘산조 강변의 난투’ 에피소드에는 이노우에 겐자부로라는 이름의 나이 든 무사가 나온다. 퍽 인자하고 지혜로운 인상을 풍기는 이 무사는 검술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다. 그를 따르는 무사 고쿠기의 시점으로 신센구미의 우두머리였던 곤도를 비롯해 이 조직의 리더들이 왜 검술 실력도 별 볼일 없는 그를 모시는지를 동정을 담아 묘사하고 있는 이 에피소드는 그가 조장으로 이끄는 6번대가 어느 여관에 숨어 있는 로닌들을 처치하려다 낭패를 보는 것으로 끝난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 <고하토>(2000)에도 이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이노우에를 묘사하는 관점에서 온도 차이가 꽤 난다. 혈기왕성한 젊은 무사들 사이에서 이 나이 든 무사는 첫 등장부터 지혜로운 고수의 느낌을 풍기지만 실은 지략도, 용기도, 실력도 없는 그저 그런 늙은이일 뿐이었다. 그의 무능으로 인해 그가 이끄는 신센구미의 6번대는 하마터면 몰살당할 뻔한다. 원작에 있었던 이노우에의 인간적 매력을 완전히 말소하고 차갑게 거리를 둔 채 그의 무능을 묘사하는 것은 이 조직과 이 조직의 구성원에 대한 오시마 나기사의 관점을 보여준다.
류승완의 신작 <베테랑>을 거론하면서 왜 엉뚱하게 시바 료타로의 소설과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를 끌어들였나 하면, 알고 보면 대단치 않지만 사악한 자본 권력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묘사에서 <고하토>의 그 대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까지 듣고 자란, 또는 영화나 드라마나 책을 통해 학습된,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는 통념은 적당히 살고 보니 완전히 거짓말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 더 편협해지거나 경직되며 그로 인해 어리석어지기 쉽다는 걸 절감하는데, 나이가 든 수많은 사람들이 끌고 가는 기성 사회의 시스템도 그만큼 한심하고 혐오스럽다는 생각도 자연스레 따라온다. 대개는 언론을 통해 걸러지는 이 사회의 권력자들과 그들이 가꾸는 시스템이란 것이 사실은 별것 아니라는 걸, 독하기는 하지만 무서워할 건 아니라는 걸 류승완의 영화 <베테랑>은 시종일관 직설적으로 밀어붙인다.
허술한 권력자, 재벌
영화 <베테랑>의 한 장면. 직책은 그럴듯한 신진건설 상무지만 실상은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의 시종 역할을 하는 최 상무(유해진)가 가리봉 어느 허름한 건물 옥상에서 경찰에 피신해 있던 하청업체 전 소장과 조태오가 관련된 사건 뒤처리를 위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분위기는 제법 비장하다. 전 소장은 왕년의 건달 내공을 물씬 풍기면서 서도철 형사(황정민) 한명쯤 죽이는 건 일도 아니라는 식으로 시나리오를 짠다. 전 소장의 말에 반신반의하던 최 상무도 상황이 더욱 악화된 채 초조감에 몰린 조태오가 전 소장에게 살인청부를 시키라고 지시하자 그 명령에 따르는데, 정작 판이 벌어질 때 액션은 해프닝처럼 펼쳐진다. 서도철의 수사를 만류하던 오 팀장이 막내 윤 형사까지 대동하고 가리봉의 전 소장 은신처를 급습할 때 열린 문으로 선공하던 전 소장의 첫 번째 외마디는 “어? 혼자가 아니네?”였다. 칼을 휘두르며 설쳐대는 조선족 살수들과 형사들의 맞대결이 액션영화의 장르 관습을 타고 펼쳐질 때 류승완은 이걸 성룡 스타일의 재기 넘치는 코미디로 푼다. 고수인 듯 폼을 잡던 전 소장의 행동은 헛된 퍼포먼스였다.
이런 식의 반전이 <베테랑>의 직선적 리듬에 윤기를 불어넣는다. 이 영화에 담긴 악에 대한 관점은 단순하다. 나쁜 짓을 저지르는 그들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든 간에 그들은 나쁜 놈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악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더욱더 심화되고 여기에는 어떤 분석이나 설명이 붙지 않는다. 선악의 구분이 모호하지 않고 악의 묘사도 복합적이지 않다. 이건 영화를 평평하게 만들지만 오락영화로서는 무난한 설정인데 류승완은 거기에 심층을 부여하지 않고 표층을 있는 그대로 끝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악에 대한 다른 설정을 만들어낸다. 재벌 3세 조태오와 그가 중심에 끼려 하는 재벌그룹의 수뇌부, 그들을 떠받들고 있는 하수인 체제의 실제 몰골은 겉으론 강력해 보여도 빤히 살펴보면 무섭다는 느낌을 벗어나게 된다. 그들의 체제는 저렴하게 돌아간다. 그들 내부에는 최소한의 존엄도 없다. 그들의 체제를 무서워하지 않고 경멸함으로써 그들에게 비로소 맞설 수 있다.
현실을 호출하는 판타지
<베테랑>은 액션 오락 판타지의 틀을 통해 철옹성 같았던 재벌권력과 그 하수인들이 권력을 위해 복무하는 방식과 재벌권력을 비호하는 정치행정체제의 작동방식이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빈틈없이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들의 상호 연동작동방식에 균열이 생기는 것은 이것들 내부에 어떤 틈이 드러날 때다. 그 틈은 상호존중뿐만 아니라 자기존중도 없는 그들 내부의 결여 탓에 생긴다. 조태오의 수행경호원은 조태오와 격투기 실전 연습 중 발목이 나가는 사고를 당하는데 조태오는 그걸 당연시 여긴다. 조태오가 분을 이기지 못해서 늘 곁에 두던 사냥개를 골프채로 때려죽이는 것과 비슷한 일일 뿐이다. 조태오의 경호원은 조태오에게 같은 인간이 아니라 그냥 경호원일 뿐이다. 조태오가 하는 말대로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되는’ 상황이지만 이것은 나중에 문제가 된다. 조태오의 경호원은 나중에 서도철 형사의 편에 서서 기꺼이 법정 증언도 감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되는, 트레일러 기사 폭행과 투신을 만들어낸 조태오의 악행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것이 문제가 될지 어떨지 전혀 모른다. 그에게는 그냥 재미있는 게임이었을 뿐이다. 그 상황을 벌일 때 조태오는 방금 전까지 자존감이 없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여러 행동을 관객에게 시연한다. 검찰에 출두하는 아버지의 부재로 맞게 될 권력공백기에 그는 이복형제들에게 회사 지분을 빼앗길까봐 극도로 예민한 상태에서 불안에 떠는 가련한 영혼이었다. 그는 자신의 불안감을 주변에 투사하고 그들의 불안으로 자신의 불안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자기존중과 상호존중이 없는 게 당연시되는 비인간적 상황에서 조태오의 최초의 범죄는 이뤄진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 치밀하고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듯한 절대권력의 시스템과 그 시스템을 지휘하는 리더들, 그들에게 복무하는 하수인들의 면면은 따지고 들어가면 별것 아닌 게 된다. 이 비논리적이며 충동적인 영화 속 지배권력 시스템은 판타지가 아닌 층위에서 대한민국의 실제 현실을 호출한다. 청와대를 비롯한 행정부, 삼성과 대한항공과 롯데 등의 재벌가에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이 <베테랑>이라는 허구의 판타지와 결합될 때 이 생글거리는 액션영화는 표층을 훑는 것만으로도 굳이 강박적으로 심층을 전제하지 않고도 권력과 정의의 대항관계를 만들어낸다. 유해진이 예민하게 연기한 최 상무는 이 대항관계의 균형추 역할을 한다. 그는 거의 노예나 다름없이 살았던 조태오의 경호원과 달리 상당한 대가를 받는 시종의 신분으로 자신의 존엄을 구차하게 자위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의탁한 권력이 지기야 하겠느냐는 확신 속에서 서도철 형사를 대하지만 영화의 말미에 그는 시종일관 당당한 서도철 형사에게 더이상 깔보는 자세를 취하지 못한다. 최 상무는 심리적으로 권력자와 동일시하는 투사를 통해 자신을 보존하는 소시민적 노예근성을 시험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심리적 동요는 보는 이에게 통증을 준다.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는 상황
그에 반해 황정민이 연기한 형사 서도철은 한국식으로 기준을 낮춘 영웅이다. 류승완이 좋아하는 성룡과 버스터 키튼과의 친연성을 따져봐도 초인적 면모가 전혀 없는 영웅이다. 푼수기가 있는 소시민이자 자기 일에 능숙한 형사에 가깝다. 그는 농담을 일삼으며 주위 선후배 동료들과 티격태격하는 실없는 사람이고 집에 들어가면 마누라에게 늘 타박받는 봉급쟁이일 뿐이다. 그가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것은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아주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상식일 뿐인데 <베테랑>에서 이 상식은 절대적인 윤리기준이다. 서도철뿐만 아니라 서도철의 편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상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잘 가동되는 것처럼 보였던 조태오의 지배, 피지배 시스템은 무너진다. 서도철의 아내는 돈으로 회유하는 최 상무 앞에서 자존심이 흔들리는 자신에게 화가 나서 더 강경하게 최 상무의 제안을 거절하고 처음에 서도철이 있는 광역수사대에 조태오 관련 수사를 중지할 것을 명했던 총경은 광역수사대 막내 형사가 살인청부로 칼침을 맞자 입장을 바꿔 강경수사를 명령한다. 경찰역사상 재벌은 건드린 역사가 없다며 서도철의 수사를 막던 직속선배 오 팀장도 서도철이 단신으로 현장에 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합류한다. 무엇보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자 피해당사자인 트레일러 기사 배씨의 입장이 있다. 그는 몇대 심하게 맞고 보상액의 네배 이상을 받고 끝낼 수 있었던 것을 항의하러 조태오에게 다시 갔다가 변을 당한다. <베테랑>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다른 사람 입장에선 사소하게 보일 수 있는 일들 앞에서 최소한의 상식과 윤리감각으로 움직이는 주인공들을 보여준다. 그들의 상식적 윤리감각이 반대편 악당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몰인식 때문에 영화 속 악당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자.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는 상황은 지금도 우리 현실에서 숱하게 벌어지고 있다. 류승완의 연출은 바로 그 지점을 집어내며 번뜩이는 창의성을 보여준다. 클라이맥스 액션 장면, 명동 대로변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서도철은 조태오에게 일부러 맞는다. 그는 사방에 있는 CCTV 카메라와 군중이 꺼내든 휴대폰 카메라를 의식한다. 영화 내내 서도철과 그의 주변 인물들을 지탱했던 최소한의 상식에 기초한 윤리적 감각은 이 장면의 중핵이 될 수 없다. 관객은 이미 누가 선이고 악인지 분명하게 가릴 수 있는데도 감독은 다시 제3의 시점을 끌어들인다. 제3자의 시점을 통해 자신이 피해자임을 충분히 입증해내고서야 서도철은 행동에 나선다. 그는 엉망이 된 몰골로 비로소 “이제부터 정당방위야”라고 소리치고 주먹을 휘두른다. 액션 전후의 긴장이나 진행되는 액션의 고저 리듬 연출에 취약했던 류승완은 이 대목에서 그가 액션리듬을 주제에 맞게 조절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한다. 영화 속의 군중은 서도철과 조태오가 왜 피투성이가 돼서 싸우는지 모른다. 그들은 그저 싸움구경을 할 뿐이다. 이 싸움에서 맥락은 중요하지 않다. 누가 먼저 피해자 행세를 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맥락상으로 서도철은 먼저 조태오에게 공격을 가해도 무방한 입장이지만 서도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을 지휘하는 권력자가 바로 조태오이기 때문이다. 서도철은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는 상황을 바로 그 순간에 연출해야 했다. 그다음에 문제를 삼게 된 그 맥락이 부연될 것이다. 조태오는 구속될 것이고 죄상이 자세히 밝혀질 것이다.
물론, 이 장면을 찍을 때 어떤 심층을 의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좀처럼 맥락을 잡지 못한 채 어떤 일을 문제 삼느냐 삼지 않느냐로 시끄러운 혼돈에 갇혀 있는 한국 사회의 축약 같은 게 거기 있었다. <베테랑>이 경쾌하게 훨훨 날아서 가닿은 지점이 바로 이런 자의식 없는 메타포의 성취라고 생각한다. 류승완은 집요하게 액션오락영화의 표층만을 훑었을 뿐인데 보는 이에 따라서는 심층이 있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유아인이 연기한 조태오의 인물상도 비슷한 심급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는 잘생겼으며 호감을 주고 때에 따라 친절과 관용과 세련된 매너를 연출할 줄도 안다. 우리는 영화 곳곳에서 그가 나름 자부심을 갖고 있는 연기자이자 연출자라는 것을 수시로 목격한다.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병원 엘리베이터에 탈 때 머뭇거리는 환자들과 환자 가족들에게 함께 타라고 환한 미소를 띠며 친절을 베푸는 것과 같은 행위를 하면서도 술자리에서 자신의 신경을 거스른 노리개 여성들에게 케이크 조각을 처바르는 행위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인간이 가진 양면성의 본질을 구태여 설명하려 들지 않는데도 우리는 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현실의 누군가에게도 구체적으로 대입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상상한다. 이 인물의 심층을 설명하기 위해 특정 이유를 갖다붙이면 이 인물은 영화 속 특정 캐릭터로 환원되며 현실적 외연을 갖기 힘들어진다. 그렇게 하지 않는 대신 이 영화는 조태오가 보여주는 다양한 행동의 매뉴얼을 비교적 풍부하게 나열한다.
표층의 나열
류승완이 이 영화에서 기왕의 약점을 극복한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소리가 들리되 들리지 않는 무성영화스러운 유성영화의 경지, 모든 것이 정지된 듯 몰아의 경지를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여느 영화보다 자신의 우상인 성룡의 영화에 근접한 재미를 보여준 이 영화 <베테랑>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은 경쾌하지만 풍부하고 집요한 표층의 나열이다. 류승완은 자의식과 야심을 누르고 속도감에 몰두한 세부의 천착을 통해 본인 경력의 대단한 전환점을 이뤄냈다.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도 말한 것 이상의 수준에 도달한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재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