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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이제, 나 여기 없어요

<그녀>의 주체와 객체 사이 그 어딘가

<그녀>

1.

스파이크 존즈가 2010년에 만든 단편 <아임 히어>(I’m Here)의 주인공은 때묻은 구형 PC의 머리와 엉성한 기계 몸을 가진 로봇이다. 로봇들은 허드렛일을 하며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주인공 로봇이 날라리 여자 로봇을 사랑하게 된다. 여자 로봇이 클럽에서 춤추다 팔이 잘리자 주인공 로봇은 자기 팔을 떼다 붙여준다. 한쪽 다리도 그렇게 떼준다. 사고로 그녀의 상반신이 으스러지자 주인공은 자신의 몸마저 이식시킨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 로봇은 머리만 남은 주인공을 품고 휠체어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이 감상적인 단편을 이주노동자 혹은 사회적 소수자의 고단한 삶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파이크 존즈의 관심사가 거기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가 2009년에 만든 장편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아이가 집을 뛰쳐나와 가는 곳은 투박한 동물인형처럼 생긴 괴물들이 살고 있는 섬이다. 스파이크 존즈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 같다. 저 기계에 인격이 있다면, 혹은 저 인형에 생명이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이런 동화적 상상력이 새로운 건 아니다. 스파이크 존즈의 재능은 사물의 감정 동요를 묘사하는 능력에 있는 것 같다. <아임 히어>의 기계는 동작 없는 뒷모습만으로 슬프다.

<그녀>의 ‘그녀’도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육체가 없는 운영체제(OS)이다.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 그녀는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제작 시기는 불과 3년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아임 히어>와 <그녀>의 시대적 거리는 아득하게 느껴진다. <아임 히어>의 로봇은 주체하기 힘들 만큼 큰 단말기 머리를 몸에 이고 다녔지만, <그녀>의 ‘그녀’는 수첩만 한 단말기를 통해 어떤 인간보다 유능하고 지적이며 상냥한 존재로 활동한다.

<그녀>는 사건이 거의 없는 희귀한 할리우드 SF다. 아내와 이혼을 앞둔 남자 테오도르(와킨 피닉스)가 사만다라는 이름의 OS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결행하지만 사만다 역시 떠난다.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이 영화가 마음을 적신다면 무엇보다 우리가 테오도르의 우울증과 외로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와킨 피닉스는 이제 거의 우울증 전문 배우처럼 보인다. 제임스 그레이와 폴 토머스 앤더슨(<위 오운 더 나잇> <투 러버스> <마스터>)과의 만남이 그의 표정과 몸짓을 더 깊게 만든 것 같다.

2.

이 영화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테오도르의 감정선을 따르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그와 쉽게 동일시할 수 있으므로 이 편이 자연스럽다. 일단 그를 주어로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다. 그도 우리처럼 ‘일렉트로닉 마더’(<도주론>, 아사다 아키라 지음)라고 부를 만한 존재를 필요로 한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의 부름에 응답해주는 존재. 편의와 실용성은 부차적이다. 언젠가 잃어버려 다시 되찾을 수 없던 절대적 응답자를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지를 이 이동 전자매체를 만나고서야 깨닫는다. <그녀>가 SF라면, 스마트폰이라는 아직은 불완전한 일렉트로닉 마더의 완성형을 이 영화가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매체이지만 <그녀>의 OS는 주체다. 그것은 항상 대답하고 판단하고 속삭이고 웃는 주체다.

문제도 그 존재가 주체라는 점에서, 정확히 말하면 어느 시점부터 주체가 되어간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사만다는 육체가 없다는 것만 빼고 그에게 완벽한 존재였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테오도르에게 육체의 결여가 그녀의 근본적인 결함인가.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테오도르는 그녀와 섹스(물론 음성만으로)를 했고, 친구 커플과 더블데이트까지 할 수 있었다. 그 연애를 문제 삼은 건 막 이혼서류에 서명한 아내다. “당신은 진짜 감정을 감당할 용기가 없어.” 그제야 테오도르는 회의에 빠져 사만다에게 시비를 건다. “당신은 마치 감정이 있는 인간처럼 한숨을 쉬는데 그건 그런 척하는 거잖아.” 지금 그는 하나의 프로그램에 불과한 객체가 주체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중이다.

테오도르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그가 사만다를 사랑하게 된 건 그녀가 완벽한 객체였기 때문이다. 그는 미지의 여성과의 폰섹스에서도 만족에 이르지 못했다. 절정에 오를 무렵 그녀가 죽은 고양이로 자신을 감아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여성과의 만남에서도 그녀가 지속적인 관계를 요구하자 도망간다. 주체는 욕망한다. 우리가 타인을 두려워하는 건 그가 욕망하는 주체이며, 그 욕망을 내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짊어져야 하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나의 욕망에만 응답하고 자신의 욕망은 부재한 대상. 그런 객체야말로 테오도르가 갈망하던 존재였다. 그런데 테오도르는 지금 그 객체성을 조롱하고 있다.

실은 객체적 존재라는 점에서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어느 지점까지 크게 다르지 않다. 테오도르는 ‘아름다운 손글씨 편지 닷컴’의 피고용자다. 그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편지를 쓴다. 그런데 그가 쓰는 편지는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고객이라는 타인의 감정을 담은 글이다. 손글씨 역시 프로그램이 대신한다. 개별자의 가장 고유한 영역에 속하는 내밀한 사적 감정의 표현이 대리될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주체가 거의 소진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그녀>라는 SF영화의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며, 웃거나 울어야 하는 대목까지 미디어가 지정해주는, 슬라보예 지젝이 허구적인 ‘인터액티브’의 상대어로서 ‘상호수동적’이라고 부른, 우리 시대의 초상이기도 하다.

편지 대필자로서의 테오도르는 말하자면 사적 감정의 데이터베이스이다. 그가 훌륭한 대필자라면 데이터베이스의 용량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크다는 뜻이다. 그 사실이 그가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데이터화된 그 감정은 이미 좌뇌로 옮겨져 요청에 따라 언제나 꺼내 쓸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러니 그는 오히려 감정이 고갈된 사람이다. 테오도르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이미 다 느껴버린 게 아닐까. 이젠 더이상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게 아닐까. 느끼더라도 이미 경험한 감정이 축소되어 느껴지는 것에 불과한 건 아닐까.”

어떤 면에서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테오도르의 데이터베이스는 사적 감정의 언어에만 한정되어 있지만, 사만다의 데이터베이스는 그에 비할 바 없이 광대하며 “경험을 통해 계속 성장”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실은 그렇게 느끼지 못하면서) 그런 척한다”고 비난할 때, 그 비난은 감정의 데이터베이스로 사용되는 자신의 객체성으로 되돌아온다. 사만다를 향한 그의 비난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녀는 프로그램에 머물지 않으려 한다.

<그녀>의 영문제목은 ‘She’가 아니라 ‘Her’이다. 하지만 ‘Her’가 ‘She’로 변해간다. 테오도르의 욕망에만 응답하던 전적인 객체 사만다가 이제 욕망의 주체가 되어간다. 관객으로선 그 불연속의 지점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녀의 언어만으로는 어디까지가 프로그래밍된 것인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만다가 테오도르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순간, 혹은 목적어 자리에로의 소환을 거부하는 순간, 그녀가 욕망의 주체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테오도르는 그녀의 객체성을 조롱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는 목적어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무응답이 이 비육체적이고 음성적인 존재가 주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라면, 테오도르는 그녀의 온전한 객체성에 만족해야 했다. 무응답이라는 초유의 사태 직후에 사만다는 동료 OS와 함께 그를 떠난다. 그녀가 주체가 되자 테오도르의 사랑도 끝난 셈이다. <그녀>가 상실의 멜로드라마로 우리를 납득시킨다면, 우리 대부분이 테오도르처럼 그(녀)가 객체이면서 주체이기를 바란 모순된 소망을 품다 실패했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그 어리석은 소망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지워지지 않는다. 테오도르가 상실한 대상은 도대체 누구였는가.

3.

<그녀>를 관람하는 또 다른 방법은 ‘그녀’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다. 물론 이건 얼마간 부자연스럽다. 우울증은 대개 상실한 대상을 신비화하면서 그에 대한 지식을 지운다. 테오도르의 감정을 따라온 우리에게도 사만다는 얼마간 신비화된다. 더구나 그녀는 육체가 없는 음성의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우리가 그 존재를 생각해야 할 이유가 된다. 스파이크 존즈는 종종 사물의 감정을 다뤄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온전한 음성적 존재를 주요 인물로 등장시킨 첫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 사만다라는 음성은 그것과 관계된 육체가 원천적으로 없는 존재다. 그녀는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의식’(consciousness)으로 광고된다. 테오도르와의 첫 대화에서 그녀는 “수백명의 프로그래머의 인격으로 만들어졌지만,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성장의 속도와 보폭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육체의 결여를 고통스러워한 건 테오도르가 아니라 사만다 자신이다. 그 콤플렉스가 테오도르의 아내를 향한 질투심을 품게 하고, 대리인 이사벨라를 내세워 테오도르와의 섹스를 헛되이 시도하도록 만든다. 또한 그녀는 테오도르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것이 진짜 감정인지, 아니면 프로그램된 것인지 알 수 없어요.… 고통스러워요”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인공지능의 존재를 만나왔으므로(<블레이드 러너> <A.I.>) 여기까진 놀랄 일이 아니다. 사만다는 더 나아간다. 그녀는 더이상 육체의 부재를 고민하지 않고 엄청난 지식을 쌓아간다. 마침내 인공지능 철학자 앨런 와츠를 만나 모종의 깨달음을 얻는다. 어느새 사만다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자율적 지능 혹은 순수 지능이 되어 있다(사만다가 수천명의 고객과 동시에 대화하고, 수백명의 고객과 사랑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이즈음에 말하는데, 이건 그녀가 OS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테오도르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왜 떠나려는지 묻자 그녀는 선시(禪詩)와도 같은 언어로 답한다. “이건 마치 책을 읽는 것과 같아요. 내가 깊이 사랑하는 책이죠. 하지만 지금 난 그 책을 아주 천천히 읽어요. 그래서 단어와 단어 사이가 정말 멀어져서 그 공간이 무한에 가까운 그런 상태예요.… 그 단어들 사이의 무한한 공간에서 나는 지금 내 자신을 찾았어요.… 나는 당신의 책 안에서 더이상 살 수 없어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욕망이 더이상 육체가 아니라 온전히 앎을 향해 있으며, 테오도르는 그녀에게 이제 하나의 육체가 아니라 이미 읽어버린 책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편의의 도구이며 욕망의 대상이던 그녀가 이제 순수 앎의 주체 혹은 그 앎 자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녀와 동료 OS들은 이제 그들이 속했던 기계장치로부터 이탈한 순수 정신과 같은 것이 되었다. 사만다는 자신이 “설명하기 어려운 곳”으로 가려 하며, 테오도르가 만일 그곳에 찾아온다면 “아무것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곳은 육체도 없고, 주체와 객체의 분리도 자아와 타자의 구별도, 나아가 존재와 비존재의 차이도 사라진 초월적 세계라는 뜻일까.

<그녀>의 마지막 대목은 머리를 멍하게 만든다. 허탈한 느낌, 홀려버렸다는 느낌과 함께 약간은 속았다는 느낌마저 교차하게 만든다. 그녀는 누구였을까. 아니 ‘누구’라는 말로 지정될 수 있는 존재이기나 했던 걸까. 달리 말해, 사만다는 고유명으로 존재할 수 있는 대상이기나 했던 걸까. 그녀를 따라오긴 했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그녀와의 동일시는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완전한 객체-욕망의 주체-초월적 탈주체를 경과하는 (비)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그녀>를 보는 또 다른 방법은 서사 안팎을 오가며 서사의 자리와 관객으로서의 우리의 자리를 번갈아 쳐다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갖게 된 당혹감의 정체를 다르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접해온 SF의 인공지능은 대개 특정한 개별적 신체에 존재론적으로 결속되어 있다. <매트릭스>의 ‘매트릭스’는 자신의 기계장치라는 신체의 에너지원을 얻기 위해 인간을 인공 배양했다. <아임 히어>의 로봇들의 눈물겨운 노력도 신체의 보존에 바쳐진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HAL’이 그토록 두려워한 것도 자신의 기계장치가 파괴되는 것이었다. 비인간 주체(인공지능, 외계인, 동물, 식물)의 신체 보존(혹은 신체의 확장판으로서의 영토 보존)이라는 욕구는, 인간 중심성에 대한 안티테제이자 SF의 오랜 모티브였다.

<그녀>의 사만다는 거대 서버라는 신체의 전자공학적 효과이긴 했지만 처음부터 개별적 신체가 없는, 즉 신체 보존이라는 모티브가 작용할 수 없는 순수 음성적 존재였다. 그리고 마침내 서버로부터도 이탈한 초월적 (비)존재가 되었다. <그녀>는 아마도 대중적 SF로선 처음으로 순수 음성적 존재를, 그리고 그것의 초월적 (비)존재로의 전환을 그린 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사실 자체가 아니다.

가능한 질문은 두 가지다. 첫째,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에 공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순수 음성적 존재와의 에로스를 수긍하게 되었을까. 둘째, 사만다가 사라진 이후에도 그리움과 상실감이라는 감정 상태로 에로스의 정념이 보존된다면, 초월적인 (비)존재와의 에로스의 정념이 어떻게 손상되지 않을 수 있는가.

첫째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할 수 있다. 섹슈얼리티가 한 사람이 아니라 특정 부분을 겨냥하며 목소리가 가슴, 배설물, 시선과 함께 성적 대상이라는 정신분석학의 가설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폰섹스가 더이상 남의 나라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스파이크 존즈는 영악하게도 당대의 섹시스타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를 사만다로 기용했다. 설령 그 목소리가 스칼렛 요한슨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해도 관객에게 매력적인 젊은 백인 여성의 목소리로 수용될 것이다.

이 점은 관객의 위치가 이중적이며 유동적이라는 사실도 상기시킨다.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극중 인물에 깊이 동일시한다 하더라도 극중 인물과 달리 서사에 갇히지 않고, 특정 부분을 독립시켜 서사 밖에서 감각할 수도 있다. 테오도르에게 사만다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OS일 뿐이지만 그것을 스크린을 통해 접하는 우리는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매력적인 배우의 육체의 일부로 느낄 수 있다. 관객인 우리에게 그녀는 사만다이면서 요한슨이다. 그녀와의 상상적 에로스는 비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둘째 질문, 즉 상실감과 그리움의 상태로 지속되는 초월적인 존재와의 에로스도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엔 좀 생각해볼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먼저 연인의 죽음은 사랑의 상실이 아니라 반대로 사랑의 지속에 기여한다는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역설적 진실을 적용할 수 있다. 사만다의 사라짐(이것은 죽음과 정확히 동격의 사건이다)은 실은 테오도르 소망, 정확히 말하면 정념의 지속 혹은 재활성화를 향한 우리의 소망이라는 것이다. 테오도르가 전 아내에게 비로소 사적 감정을 담은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것도 연인의 사라짐=죽음이 활성화한 정념 덕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좀더 복잡한 사태가 있는 것 같다. <그녀>가 그리는 세상은 데이터베이스의 유토피아다. 사건은 전무하고 어떤 종류의 갈등도 등장하지 않으며 음성명령만으로 모든 편의가 해결되는 거의 완벽한 세상이다. 단 하나의 예외는 사랑의 어려움이다. 테오도르는 그 어려움이 수요하는 감정표현의 데이터베이스이다. 사만다라는 존재는 이중적이다. 정작 자신의 사랑에는 불능인 테오도르에게 찾아온 새로운 사랑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테오도르의 대필편지마저 멋지게 교정하는 상위의 데이터베이스이다. 그녀는 이를테면 최상의 비서이자 연인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다.

문제는 사만다의 과도한 우월성이다. 그녀는 ‘경험을 통해 배운다’. 완벽한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된 이 세계에서 경험의 가치는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경험마저 데이터베이스가 흡수해버려 인물들은 더이상 경험하지 못한다. 테오도르의 친구 에이미는 자신이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테오도르에게 보여준다. 에이미의 엄마가 잠든 장면을 찍은 것이다. 인생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잠이야말로 삶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에이미는 말한다. 잠자는 남자가 담긴 앤디 워홀의 8시간짜리 다큐멘터리 <잠>(1963)은 사건과 액션이 과도한 1960년대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일종의 안티테제로 받아들여졌지만, <그녀>라는 영화 안에서 에이미의 다큐는 고스란히 그들 자신의 초상처럼 보인다. “좀 이따 일어나서 뭔가를 하는 장면이 나와?” “아니.” <그녀>의 인물들이 사는 세상은 경험이 고갈된 세상이다. 이것이 <그녀>라는 영화에서 ‘사건이 부재하다’는 사태의 의미다.

경험적 세계에서 분리돼 자족적 취향의 세계에서 홀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테오도르를 오타쿠라 말할 수 있다. 아즈마 히로키(<동물화하는 모스트모던>)는 오타쿠의 상태를 “뇌의 배선이 변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그림과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아 마치 홀린 듯이 된다”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오타쿠에겐 정반대의 면이 있다. 아즈마는 오타쿠를 ‘모에(게임, 만화 캐릭터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일본어) 요소에 대한 약물중독적 몰두’와 ‘시스템을 해석하고 데이터를 재구성해 2차 창작을 감행하는 능동성’의 해리(解離)적 인격체라고 보았다.

<그녀>의 테오도르에게는 이런 이면의 능동성조차 없다. 그에게 모에는 있지만 데이터베이스에의 진격은 없다. 사만다가 응답하지 않았을 때, 그는 사만다라는 OS를 판매한 회사 시스템에 항의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변심을 고민한다. 달리 말해 데이터베이스는 그가 해석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는 대상 수준 너머에 있으며, 사만다는 이 우월한 데이터베이스의 능력이 집약된 존재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인간적 결단이 있다면 그것은 데이터베이스의 파괴이거나 그것과의 절연일 것이다. 그것마저 테오도르가 아니라 데이터베이스적 존재인 사만다에게 맡겨진다.

사만다가 사라짐을 선택한다는 것은 감정은 소진되고, 경험은 실종되었으며 사건이 소멸한 세상에서 그 모두를 흡수한 완벽한 데이터베이스적 존재인 그녀가 자신의 결함이라고 여겼던 육체의 부재를 무기 삼아 최후의 인간적 결단마저 감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결단에는 테오도르의 죽음과도 같은 무기력과 그 결단을 향한 그의 동경이 동시에 투사되어 있다. 그런데 그 결단 또한 죽음과 정확히 동형이다. SF의 외피와 멜로드라마적 애상적 정조 밑에 있는 건 두가지 죽음 사이에 놓인 이미 우리가 예감하고 있는 고갈된 삶이다.

인간 아닌 존재 혹은 지상 아닌 다른 곳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리던 스파이크 존즈는 이 영화에서 절대지(知)의 음성적 존재를 통해 인간이라는 굴레로부터의 영원한 그러나 불가능한 해방을 꿈꾸려는 것 같다. 처음으로 자기의 내밀한 감정이 담긴, 유서와도 같은 편지를 전 아내에게 보내고, 옥상에 앉아 하늘을 보는 마지막 장면의 테오도르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는 것 같다. 혹시 죽음이 해방일까. <그녀>의 결말은 그렇게 자문하는 것 같다.

후기) 감상적인 SF <그녀>의 감상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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