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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들끓는 정념과 고요한 명상의 변주곡

‘거기에 있는 것들’을 넘어 ‘거기서 느낀 것들’에 관한 영화 <경주>

<경주>

그건 그곳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어떤 연유로 영화가 그렇게 찍힌 것입니까 질문받을 때 감독 장률은 자주 그와 같이 답해왔다. <경계>의 카메라의 느린 패닝에 관해서는 사막이라는 대지의 성질을, <두만강> 인물들의 무표정에 대해서는 그들 삶에 밴 무표정한 상태를 근거로 들었다. 사막에서도 빠르게 움직이는 것들은 있을 것이고 두만강의 사람들이라고 울고 웃을 일이 전혀 없겠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반박이 중요한 것 같진 않다. 중요한 건 장률이 구체적인 지역(몽골의 사막, 중경, 익산-이리, 두만강 등)을 결정하고 그 지역의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풍속과 환경으로부터 핵심적인 무언가를 추출하여 영화의 공기와 리듬과 표정과 정서 등등을 총괄하는 핵심 층위로도 삼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장률의 영화는 ‘거기에 있는 것들’의 현존하는 성질과 상태를 전적으로 존중하고 따랐다.

<경주>에 관해서는 어떨까. “삶과 죽음의 공존이 어색할 게 없는 곳이 경주다. 경주는 어디를 가나 능이 있는 곳이다”(<씨네21> 958호), 하는 것이 <경주>에 대한 장률의 설명의 요지다. 거기에 수긍하는 차원에서 <경주>는 삶과 죽음, 현실과 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영화다, 하는 것이 대개 우리의 감상 요지다. <경주>도 예컨대 삶의 터전 안에 널린 능과 같이 경주에 있는 것들로부터 시작됐다. 이번에는 그런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곳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하는 말은 <경주>를 설명하는 데 더이상 유효하지 않거나 다소 부정확해질 상황에 처했다. 예컨대 어제 있었던 점술가 노인이 오늘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같은 자리에 젊은 여인이 버젓이 서서 내가 오래전부터 여기 있어왔노라고 말하게 되는, 밝은 대낮에 한 남자의 면전으로 백일몽의 환영이 현실과 구분없이 찾아드는, 메마른 강바닥을 보고 있는데도 어디에선가 콸콸콸 환청의 물소리가 들리는 <경주>의 그것들을 두고서, 그건 실제로 경주가 그렇기 때문이다 하고 말할 순 없게 된 것이다. 사막이라는 대지의 광활함과 속도감을 따라 카메라가 느린 패닝을 하는 건 거기 있는 것들의 속성을 따르는 것의 문제이지만, 저 능을 보고 삶과 죽음의 공존이 떠올라 환영이 출몰하는 도시를 제시하는 건 거기서 느낀 것들을 감각화하는 것의 문제가 된다.

‘사실에서 느낌으로’라는 방점 전환이 여기에 있다. 능들이 삶의 주거지 안쪽까지 섞여 있는 도시가 경주라는 건 사실의 차원이다. 그때 능은 능이라는 사실일 뿐 곧장 죽음이 아니어서 감상자에 따라 의미는 때마다 개별적이다.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김상경)는 그 능 위에 누워 죽음이 아니라 여자를 기다렸다. <경주>에서 주인공 최현(박해일)과 공윤희(신민아) 일행이 능 위에 올라가 밤의 낭만과 시름에 빠져 있을 때 이내 달려와 거기에서 뭐하는 짓이냐며 호통치는 경비원에게라면 그 능은 직업의 영역이며 아늑한 죽음이 아니라 훼손 없이 보존되어야 할 엄숙한 공공 문화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경주>는 왜 이렇게 찍힌 것입니까, 했을 때 그에 대한 설명은 이렇게 제시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건 그곳이 그렇다고 실제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장률은 전에 없이 거기에 있는 것들을 넘어 ‘거기서 느낀 것들’에 최대한 바탕을 둔 영화 <경주>를 만들었다.

거기에 있는 것들과 거기서 느낀 것들, 이라고 표현한 이런 게 서로 별개일 리는 없다. 하지만 방점이 옮겨간 걸 부정할 순 없고 방점이 바뀌었으므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거기에 있는 것들(예컨대 무표정, 느림, 황폐함, 거리감)을 우리 눈으로 똑바로 보도록 하는 것이 장률 영화의 오랜 집착이었다면, <경주>는 거기서 느낀 것들(예컨대 삶/죽음, 현실/꿈, 과거/미래의 공존)이 우리 눈에 풍요롭게 보이도록 하는 데 힘을 쓴다. 그래서 <경주>의 경주는 두만강변이나 중경이나 익산-이리와 같은 현실 속의 운명적이고 냉엄한 환경과 풍속의 도시가 아니라 기이하고 오묘하게 유령들이 활개 치는 낭만적 신기루 혹은 허공의 도시처럼 그려진다.

이것이 장률 영화의 일시적 전환인지 앞으로 꾸준히 지속하게 될 무언가의 새로운 시작점인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단할 수 없다. 다만 질문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경주>가 바라 마지않던 그 인상적 풍요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조화되는가, 이다. 그 조화의 지대한 한면이라고 해야 할 수려함과 넉넉함에 대해서는 이미 적잖이 언급됐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다른 면모에 주목할 생각이다. 이 글은 <경주>를 이루는 어떤 특별한 출현과 결합의 양상들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데, 그걸 탐색하는 과정에서 이미 알려진 수려하고 넉넉한 로맨스물 이외에 <경주>의 또 다른 성격이 드러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말하자면, 들끓는 정념과 고요한 명상이 서로 화음 혹은 불협화음을 내는 변주곡들의 몇 가지 형태에 관해서라고나 해야 할까.

<경주>의 줄거리는 흔히 최현과 공윤희의 1박2일 로맨스로 축약되는데 두 인물이 주인공이니 우선은 당연하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몇 가지 다른 인물 관계들이 더 있다. 그것들이 차례로 출현하면서 최현과 공윤희 사이로 틈입하여 잔여물을 남기고 환기를 가동하면서 상상을 자극한다. 최현과 공윤희 커플까지 포함하여 그들을 가리켜 영향 아래 놓인 커플들이라고 지칭하고 싶어진다.

첫 번째 커플은 최현의 친한 형 창희와 그의 젊은 아내다. 최현은 창희의 장례식 때문에 한국에 왔는데 사람들은 창희의 아내에게 남자가 있었고 창희의 죽음이 그의 아내와 관련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저 여자가 창희를 잡았다”고 최현의 아는 형은 한마디로 단언한다. 두 번째 커플은 최현이 경주로 부른 옛 후배 여정(윤진서)과 그녀의 의처증 심한 남편이다. 공교롭게도 이 부부 사이의 정서적 핵심도 의심이다. 세 번째 커플은 최현과 여정이다. 여정은 과거에 최현의 아이를 임신했었다고 경주를 떠나기 직전 최현에게 질책하듯 혹은 징벌하듯 말한다. 네 번째 커플은 찻집 여주인 공윤희와 죽은 그녀의 남편이다. 영화는 공윤희가 기혼자였음을 뒤늦게 밝힌다. 남편은 자살했다고 공윤희가 말한다.

이 커플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불행하다는 데 있다. 의심, 의문, 비밀, 죽음 등이 이들의 불행을 감싸고 있으며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자기의 순서가 오면 인물들은 그 불행의 사정을 차례대로 밝힌다. 하지만 반드시 일부분만 밝힌다. 정말 창희의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는지, 여정의 남편이 왜 의처증을 갖게 되었는지, 최현과 여정의 관계는 어느 정도였는지, 공윤희의 남편은 왜 자살했는지에 대해서까지는 말해지지 않는다. 이들이 밝힌 사연과 밝히지 않은 사연의 나머지 공백이 우리로 하여금 은근한 가정법과 질문법을 발동시켜 나머지 중요한 두 커플을 보게 만든다.

중요한 두 커플이란 다섯 번째 커플 최현과 공윤희, 여섯 번째 커플 최현과 아내다. 가정법과 질문법은 스스로 알아서 공상의 이야기를 짜내기 시작한다. “선배는 부인을 의심해본 적 없어요?” 라고 여정이 최현에게 물었을 때 최현은 답하지 않았지만 혹시 최현과 아내 사이에 있었던 불화의 요인으로 그의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우린 은밀히 되돌려 상상하게 된다. 창희 커플의 영향 때문이다. 우린 진위를 잘 모르지만 모르기 때문에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최현의 아내가 최현을 ‘잡을 수도’ 있었고 혹은 잡았다고 소문이 날 수도 있었고 최현의 미래는 창희가 될 수도 있었다.

이 가정법에 의거한 질문들은 반대 방향으로도 번진다. 만약 최현이 공윤희와 성적 관계를 맺었더라면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앞선 커플들이 겪었던 모든 불화의 과정을 최현은 새로이 끌어안게 되는 것은 아닌가. 최현과 공윤희의 성적 결합의 실패에 대하여 평론가 이후경도 장률의 말(“통상적 개념의 사랑이라는 감정에 들어갔다가 거기에 빠져서 서로 원수가 돼버리는 기억보다는 훨씬 더 아름답지 않겠는가”)을 인용하고 특히 최현과 여정의 관계를 근거로 들면서 “최현의 뒷걸음질에는 그 두려움이 끼어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씨네21> 961호). 실은 훨씬 더 오래전에 <생활의 발견>의 명숙(예지원)이 예언처럼 명대사를 남긴 바도 있다. “나쁜 기억 남길 것 같으면 하지 마요.”

<경주>는 최현과 공윤희를 중심으로 로맨스를 진전시키는 가운데에서도 통속적 불행으로 얼룩진 실패한 커플 관계들을 켜켜이 출현시켜 그것들로 다섯 번째 커플 최현과 공윤희, 여섯 번째 커플 최현과 아내의 관계에 암암리에 간섭한다. 중요한 건 그 간섭의 영향력을 의식하며 장률이 내놓은 영화적 결과다. 장률은 앞선 네 커플과 뒤의 두 커플이 엄연히 다른 결과에 도착하도록 서로 가른다. 앞의 네 커플은 불행했지만 뒤의 두 커플은 적어도 더 나빠지지 않거나 행복에 접근한다.

최현과 공윤희의 그 밤이 왔을 때 장률은 오묘한 수를 둔다. 그 오묘함이란 최현과 공윤희와 최현의 아내 이렇게 셋 중 아무도 망가지지 않는 수다. 최현과 공윤희 커플은 좋은 과거로 남고 최현과 아내 커플은 좋은 미래로 남겨진다. 최현과 공윤희 커플은 따뜻한 기억을 갖게 되고 최현과 아내 커플은 화해의 전조를 갖게 된다. 최현이 스스로 공윤희와의 성적 결합에서 실패자를 자처함으로써 그렇게 된다. 그리하여 최현이 새벽을 맞을 때쯤 문득 기적처럼 화해를 요청하는 아내의 음성 메시지가 와 있다. 아내는 최현을 위해 그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준다.

<경주>를 한 남자(최현)와 한 여자(공윤희)의 아늑한 로맨스로만 초점을 맞추면 앞선 커플들의 불행한 관계가 두 남녀 주인공 사이에서 은연중 얼마나 전반적으로 간섭하고 있는지 그 농도가 잘 보이질 않을뿐더러 네 커플의 불행과 두 커플의 행복의 진일보라는 감독의 구분도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가 여유롭고 낯선 로맨스라고만 알고 있는 이 이야기의 끝은 예상 밖으로 한 남자가 충분히 가능했던 낯선 성애의 봉우리를 두고서도 스스로 실패자를 자처하는 경우다. 어찌 보면 그 때문에라도 <경주>는 어느 하룻밤의 로맨스가 아니라 어느 기혼자의 가정 복귀극이라는 역설적인 도덕적 면모를 의외이지만 진지하게 갖추고 있는 셈이다.

로맨스를 고조시키면서도 다른 커플들의 불행의 허깨비를 잔뜩 개입시켜 위태롭고 상상적인 질문의 자리를 만들되 그 결론부에서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마는 맑은 도덕적 결단으로 끝맺기. 물론 <경주>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며 우린 또 다른 변주 형태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경주>를 배회하고 있는 두 종류의 헛것에 접근해야 할 것 같다. 최현의 헛것과 최현이라는 헛것이다.

최현의 헛것

평론가 안시환은 “최현이 공윤희의 집을 나왔을 때 영화가 엔딩을 맺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씨네21> 959호)고 한다. 평론가 달시 파켓은 “5분 더 일찍 영화가 끝났더라면 완벽하게 만족스러울 수 있었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으면서 극장 문을 나섰다”고 쓰고 있다(포털사이트 다음 <더 매거진>, ‘달시 파켓의 눈’). 5분이라고 표현했지만 “더 실험적이면서도 덜 현실적인 스타일”, “예술적 제스처로서의 불필요한 과잉”이라고 표현한 걸로 보아서 최현이 공윤희의 집을 나온 뒤에 붙어 있는 일련의 환상 장면들을 지목하는 것 아닌가 싶다.

여정의 남편이 최현을 쫓아 경주에 왔다는 믿기 어려운 상황에 최현이 밥을 먹다 말고 헐레벌떡 도망치는 장면. 어제 있었던 점술원의 노인 대신 한 젊은 여인이 같은 자리에 있고 그녀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자신이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노라고 말해 최현을 낌짝 놀라게 하는 장면. 최현의 눈앞에서 오토바이족들이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는 장면. 어느 메말라버린 내천에서 콸콸콸 물소리가 들려오는 장면. 넋을 잃은 채 최현이 수풀 언저리로 들어가자 멈춰 있던 카메라가 갑자가 과격하게 움직이며 그를 덮치듯 다가가는 장면. 두 평론가의 감상과 의견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은 내게도 이 장면들은 결론을 지연하고 유연화하기 위해 다소 기계적으로 덧댔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이 장면들이 적어도 장률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라는 말도 같이 전해야겠다. 왜 필요했던 걸까.

여기서 끝나면 <경주>는 지나치게 말짱한 정신의 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장률은 정념의 밤을 무사히 넘긴 최현을 다시 끓어오르는 정념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걸 이 장면들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밤에는 오히려 도덕이 승리하지만 낮에는 오히려 환상이 진주해 있다. 이때 환상이라는 말은 좀 사치스러운 표현이 될 것이고 말 그대로 헛것들이 펼쳐진다. 최현 앞에 헛것들이 즐비하게 서성거려야 하므로 그 후반부는 완전치 않다 해도 떼낼 수 없는 것들이었을 터다.

헛것의 징조를 보인 건 이미 영화 중반부에서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최현이 여행 안내소를 두번이나 찾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다소 군더더기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이 장면이 중요해 보인다. 영화 속 헛것이 처음 출현하는 장면이기 때문이고 이후에 이어질 그 출현들에 대한 유머러스한 뉘앙스의 예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최현이 과거에 경주에 왔을 때 술김에 어느 돌다리를 건넜고 그 아래로 물소리가 났다며 거기가 어디인지 물어보자 안내소 여직원은 그런 곳은 없다면서 술을 먹고 들었으니 그 물소리는 환청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그때 마른하늘에 천둥이 치자 여직원은 비가 올 낌새도 없는데 웬 천둥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최현은 그거 북한에서 포를 쏴대는 것 아니냐고 슬그머니 응수한다.

너와 내가 맨 정신에 듣고 있는 저 소리의 정체에 대해서라면 과연 너는 확신할 수 있겠느냐고 최현은 농을 치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장률도 끼어서 농을 친다. 그 장면의 마지막에 천둥소리 또는 포 소리는 우광쾅하고 한번 더 화면 영역 바깥에서 크게 들린다. 장률은 그 소리로 우리에게도 묻고 있다. 이건 천둥소리이겠습니까, 포 소리이겠습니까. 물론 그 천둥소리가 찻집을 배경으로 한 차례 더 등장할 때에는 정말로 비가 내리고 최현과 공윤희의 로맨스가 시작되지만, 적어도 지금은 헛것들의 입장(入場)을 알리는 전주곡이다.

엄연히 헛것은 헛짓과 다르다. <경주>를 본 관객이 홍상수 영화를 떠올리는 것은 불가피한데, 홍상수의 것으로 무수히 등장해왔으나 장률의 것으로는 등장하지 않았던 것들이 장률 영화에서 처음 등장했으므로 그건 어쩔 수 없다. 예컨대 되풀이하여 돌아오는 것들의 대구 구조 속에서 닮음과 다름으로 세계와 시간에 대한 감각을 흔든다는 미적 형식은 기존의 장률 영화에는 없었지만 홍상수가 줄기차게 특유의 것으로 확장해온 것이 아닌가. 다만 장률과 홍상수의 관계를 전반적으로 말할 자리는 아닌 것 같고 그리고 <경주>가 장률만의 것도 충분히 갖추고 있으니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다. <생활의 발견>이 주인공의 헛짓을 통해 둔감했던 삶의 실체를 벗겨내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경주>는 주인공의 눈앞에 드러나는 헛것들을 통해 감독 자신이 삶과 죽음의 공존이라고 표현한 어느 경계의 지점에 서서 흔들리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생활의 발견>의 경수는 헛짓을 하고 <경주>의 최현은 헛것을 본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자. 주인공에 관한 한 장률의 전작들과 <경주>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주인공의 계층성이 전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아니 계층이 전에 없이 섞여버렸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장률 영화의 선명했던 계층적 지반은 하층민들이었는데 <경주>에는 동북아정치학 교수와 찻집 여주인과 북한학 교수와 플로리스트와 형사가 모이는 괴이한 모임이 있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지역과 주인공의 관계성이다. <경주>의 주인공 최현이 철저하게 그 지역의 방문객이자 여행자이자 외지인이며 비거주자라는 점이다. 박 교수(백현진)는 최현이 교수로 있는 베이징대학의 특강을 따내려다 잘 되지 않자 최현의 말 중에서 꼬투리를 잡아 그가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들며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았던가. “그래, 여기(한국)는 뭐 다 불바다가 돼도 괜찮다?” 너는 속해 있지 않으니 괜찮다는 것이냐, 하는 식이다.

장률이 고집스럽게 그 지역의 토착민 내지는 적어도 거주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경계>의 모자 순희와 창호가 있지만 그들은 비록 경유하다 불시착했다 해도 꽤나 오래 사막의 환경에 순응하며 머물렀다. 어쩌면 거주민이지만 이방인인 이주노동자들을 담은 <풍경>이 장률에게 전환의 계기를 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에 그가 타자인 탓에 최현은 한 발짝 거리를 갖고 떨어진 소극적 견자가 되기도 하는데, 공윤희를 따라간 모임에서 옆방의 술 먹고 춤추는 남자를 보던 중 그 남자의 동료가 최현에게 “잘 봤습니까” 하고 따지듯이 물을 때 그 말이 그의 견자의 자리를 지적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다.

그러니까 다시 돌아와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최현의 타자화를 더욱 부추기는 것들 중 하나가 헛것이며 헛것들의 출몰로 그의 정념은 이리저리 흔들린다. 실은 그게 영화 내내 은근하게 배어있던 분위기다. 그러므로 앞서 지적한 후반부 일련의 장면들은 경주가 최현을 상대로 부리는 마지막 주술이며 둔갑술이다. 이방인을 갖고 노는 헛것 출몰의 땅에서 최현은 별수 없이 견자이고 어쩌면 망자이며 영원히 타자다.

최현이라는 헛것 혹은 손과 귀

이제 ‘최현의 헛것’에 ‘최현이라는 헛것’을 더할 때가 됐다. 그래야 이 영화의 대표적인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화음 혹은 불협화음의 변주 형태 하나가 제대로 보인다. 최현을 두고 여행 안내소의 나이 든 여직원은 젊은 여직원에게 “저 사람 좀 이상해”라고 주의를 준다. 공윤희를 좋아하는 형사 영민(김태훈)은 참다못해 최현에게 여권을 보여달라며 정체를 밝힐 것을 요구한다. 김성훈 기자는 사석에서 “최현은 꼭 죽은 사람 같다”고 말했다. 최현이 망자인 채로 떠도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인데, 그 감상이 논리적으로 반박될 순 있다 해도 그 감상의 모처 자체는 예민한 것이다. 최현이 헛것 아니겠느냐고 느끼는 이들이 영화 안에서나 밖에서나 다방면으로 다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들은 누군가는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맞다. 왜 최현을 두고 지금 앞뒤 없이 자꾸 헛것이라고 칭하고 있는가 하고 반문해야 할 것이다. 그러게, 우리는 왜 지금 이 순간 최현을 자꾸 헛것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가 외지인이기 때문인가. 타자이기 때문인가. 그것으로는 좀 부족해 보인다. 한 가지 확실한 근거가 영화에 있다. 무엇보다 최현이 영화의 다른 주인공 공윤희의 헛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그는 어째서 공윤희의 헛것인가.

먼저 한 가지를 환기하고 싶다. <경주>의 예고편을 먼저 보고 영화의 본편을 나중에 보게 되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내가 예고편에서 뭔가 크게 착각한 점이 한 가지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리고 그 착각은 예고편의 목적(이 영화는 박해일과 신민아가 주인공인 연애담입니다)이기도 했으므로 나만 그러한 건 아닐 것이다. 잠시 예고편을 생각해보자. 박해일의 목소리로 이런 대사가 들린다. “손 한번만 보여주시겠어요?” 이어서 곧장 신민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귀 한번 만져봐도 될까요?” 우리는 박해일과 신민아의 목소리를 듣고 두 배우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떠올린 뒤에, 그렇다면 그건 최현이 공윤희에게, 공윤희가 최현에게 하는 대사일 것이고 둘 사이에 오고 가는 연애의 제스처로서의 대구일 것이라고 예측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이 손과 귀의 요청은 대구는 대구이되 어딘가 비틀린 대구이며 상대가 서로 맞지 않는 대구다. 공윤희가 만져보자고 한 귀는 최현의 귀가 맞지만 최현이 보자고 한 손은 공윤희의 손이 아니라 죽은 창희 형의 아내인 그러니까 최현의 젊은 형수의 손이다. 도대체 왜 이런 엉뚱한 향방이 생긴 걸까. 이 손에 대한 요청과 귀에 대한 요청은 어떤 차이를 갖는 걸까.

최현이 찻집에 두 번째 갔을 때 정원에 있는 공윤희를 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자 창희 형의 형수가 환영으로 등장한다. 처음에 이 장면은 두 가지 질문을 그 즉시 유발한다. 이 장면이 왜 이 자리에 있는가 그리고 왜 죽은 창희 형이 아니라 형수의 환영이 등장하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도 최현이 여정을 만나고 온 직후라는 것과 그리고 그 순간 공윤희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더 흥미로운 건 형수의 대사다. 형수는 환영으로 나타나서는 자신은 외도를 한 것이 아니라거나 자신이 형을 죽이지 않았다거나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고승들이 스스로 입적하는 것을 거론하면서 애매하게도 “최 선생님은 이해하시지요?”라고 묻는다. 라스트 신의 창희의 말대로라면 춘화 속에서 그와 최현은 커플이었으니(말하자면 우리가 말하지 않은 일곱 번째 커플이자 마지막 커플), 시대를 뛰어넘은 각자 창희의 상대자로서 당신과 나만큼은 그를 알고 있자는 뜻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나의 결백을 믿어줄 거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바로 이때 최현이 그녀에게 손을 보자고 말한다.

“최 선생님은 이해하시지요?”라고 형수가 말하자 최현이 부탁한다. “손 한번 볼 수 있을까요?” 형수가 손을 내밀자 최현은 물끄러미 잠시 그 손을 보더니 형수의 손 위에 자기의 손을 살며시 포개 얹는다.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만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감촉으로 확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천천히 상대방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다. 이해하느냐고 물은 형수의 질문에 이해한다고 답하는 중일 것이다. 최현은 손을 보자고 말했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만지고 나서야, 그 손의 감촉을 통해서야 형수를 이해한다.

육신의 일부를 확인해보고 싶다는 차원에서 귀를 한번 만져보자는 공윤희의 요청도 얼핏 최현의 요청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 결과가 확연히 다르다. 공윤희는 최현이 찻집에 첫 번째 왔을 때 그의 얼굴을 뜯어보면서 “제가 아는 분과 닮았어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때 그 닮은 사람이 죽은 남편이라고 하진 않는다. 그리고 닮은 건 공윤희의 설명에 따르면 얼굴이 아니라 바로 그 귀다. 그 때문에 그날 밤 공윤희는 자신의 집에서 최현에게 “귀 한번 만져봐도 될까요?” 하고 말한다. 하지만 만져본 다음에는 이렇게 말한다. 남편의 귀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만져보니 다르네요”라고. 최현은 형수의 손을 보자고 한 다음 만지고 나서야 그녀를 이해하게 되지만 공윤희는 그 절차와 결과가 정확히 반대다. 보기에는 죽은 남편의 귀와 똑 닮았던 최현의 귀, 그걸 만져보고 나니 실제로는 다른 무엇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다른 것임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같은 게 아니라 닮아 보인 무엇이었을 뿐이다. 최현의 귀를 만져보자 공윤희는 그가 남편의 육신도 남편의 귀를 가진 이도 아닌 자신에게 잠시 머무르는 헛것임을 알게 된다. 지금 공윤희의 눈앞에 있는, 똑같아 보일 뿐 실제로는 다른 저 최현은, 최현의 저 귀는 공윤희에게 실제로는 헛것이다.

찻집에서 형수가 등장하는 환상 장면과 공윤희의 집에서 최현과 공윤희가 성적으로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거실에 앉아 있는 장면. 이걸 두고 전자를 손의 장면으로 후자를 귀의 장면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손의 장면은 최현의 헛것의 대표적인 장면이고 귀의 장면은 최현이라는 헛것의 대표적인 장면이다. 최현은 형수의 손을 만지고 나서 그녀의 결백함에 대해 윤리적 공감을 갖지만 공윤희는 최현의 귀를 만지고 나서 단순히 실망하는 데 그친다. 하지만 공윤희의 경우에 그 요청 자체에 성애적 욕망이 이미 담겨 있다. 그러니까 윤리의 손과 성애의 귀, 이것이 앞서 말한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화음 또는 불협화음의 변주 형태 중 하나다. 둘은 서로 다른 대상을 향한 요청 안에 있지만 윤리와 성애의 항목으로 이 두 장면의 대사와 행위가 벌어질 때 그 호흡과 리듬은 온전히 뛰어나다. 여기에 손과 귀에 관한 그 어떤 면모가 없더라도 이미 아름다울 장면이지만 이 윤리의 손과 성애의 귀가 있기에 우리를 내내 더 동요시킨다.

그 밤의 그림들

그 밤의 그림들 그러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윤리의 손은 공윤희의 찻집에서 만져졌고 성애의 귀는 공윤희의 집 거실에서 만져졌다. 이게 왜 아이러니한 일인가 하면, 춘화의 기운이 지배하는 찻집의 그 방에서 손을 보자는 윤리적 요청이 있었고 문인화가 내려다보는 그 방에서 귀를 만져보자는 성애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린 이로써 춘화 혹은 문인화의 기이한 교차와 섞임과 결합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경주>에는 두개의 그림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찻집의 전 여주인을 좋아한 어느 화가가 벽에 그려넣은 춘화이고 또 하나는 공윤희의 남편이 죽기 며칠 전 집 거실에 걸어놓은, 봉자개라는 화가가 그린 문인화다. 이 두 그림의 미학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경주>를 말할 수 없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이 춘화와 문인화의 미학이 단순히 별개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진 않다. 그 두 그림의 미학적 수준을 논의할 소양도 우리에겐 부족하다. 다만 두 그림의 성질이 영화의 어느 순간에서나 서로 긴장하고 교차하고 결합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가장 풍요롭게 묘사되는 최현과 공윤희의 그 밤으로 다시 가보자.

최현과 공윤희의 밤을 말할 때에 춘화와 문인화를 의식하는 것이 단지 비유는 아니다. 장률은 그 밤을 노골적으로 춘화의 강세적 분위기로 물들이며 시작한다. 집에 들어온 그들 사이엔 불을 켜겠다는 말이 없다. 집 안의 어둠, 창밖의 녹색 조명, 고요한 사방. 그들의 실루엣은 색정으로 조금씩 더 이끌릴 것만 같은 분위기다. 이것이야말로 춘화의 한 장면이 완성될 찰나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귀를 만져보자는 공윤희의 요청이 있다. 하지만 바로 이때 문제의 훼방꾼 영민이 들이닥친다. 집 안의 불은 훤하게 켜지고 은근한 춘화의 분위기는 쑥대밭이 된다. 우리는 영민이라는 이 형사의 진정한 역할을 생각해보게 된다. 영민은 <경주>의 서사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었을까. 그는 최현의 연적으로서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일까. 그런데 공윤희는 최현이 아니었어도 영민에게 애초부터 그다지 호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회할 필요가 없다. 그의 가장 큰 역할은 실상 이 밤의 훼방꾼이 되는 것이다. 그 일을 마치자 그는 황급히 퇴장한다.

흥미로운 건 그가 전적으로 무인의 기질을 갖췄고 최현이 전적으로 문인의 기질을 갖췄다는 것이고 더 흥미로운 건 이 무인이 춘화의 분위기를 깬 다음 퇴장하자 이때부터 밤의 공기는 이상하게도 춘화에서 문인화의 분위기로 강세가 슬며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불은 꺼지고 조건은 처음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어둠과 빛과 고요는 모든 것이 춘화가 시작됐던 바로 그때와 같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화폭은 이제 더이상 춘화가 아니라 문인화의 분위기로 교차되어 젖어 있다. 춘화가 사라지고 문인화가 등장했다는 것이 아니다. 춘화는 여전히 여기 그려지고 있지만 그 위로 문인화가 포개져 더 강력하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마침내 최현은 공윤희와 성적으로 결합하지 않는다. 공윤희가 살며시 문을 열어 의사를 표했지만 그가 참았거나 알지 못했다. 그는 촛불을 입김으로 불면서 성적인 긴장을 몸 밖으로 내몰고자 몰두했고 밤새 흔들렸거나 선잠에 들었을 것이지만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맑은 정신의 유지, 이것이 문인화로 강세가 넘어가고 있는 이 밤의 핵심이다. 그리고 푸른 새벽이 오고 최현의 아내에게서 한통의 음성 메시지가 와 있다. 아니 노래가 와 있다. 그녀의 화해의 속삭임과 그녀가 불러주는 노래 <모리화>를 들으며 최현은 이미 공윤희의 집을 빠져나와 걷고 있다.

우리는 춘화에서 문인화의 분위기로라는 이 교차 및 결합의 과정에서 한 가지 진행의 방식을 묻고 답하게 된다. 그건 사소해 보이지만 실은 사소하지 않다. 최현의 아내는 왜 문자가 아니라 음성 메시지, 정확히 말하자면 목소리와 노래를 보내온 걸까, 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누구라도 요즘은 음성 메시지를 잘 이용하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을 만도 하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고 장률은 생각한 것 같다. 그러니 이것이 과연 사소한 문제인 걸까. 그렇지 않다. 영화의 초입부, 장례식장에서 최현은 코에 담배를 대고는 아내가 싫어하는 담배를 피우려 하면 아내가 뒤에서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때 옆에 있던 형이 아내는 여기 없으니 한대 피우라고 부추긴다. 그러자 형의 말에 최현은 “아니 여기 있어”라고 잘라 답한다.

<경주>의 많은 커플들이 단지 커플일 뿐 나머지 한명이 반드시 부재했다는 사실을 우린 기억하게 된다. 그들은 한자리에 함께 있지 못한다. 젊은 형수는 이 세상에 있지만 그의 남편인 창희 형은 없고 여정은 남편에 대해 말하지만 그의 모습은 영화에 드러나지 않으며 공윤희는 남편에 대해 알려주지만 그에 대해 우린 알 수 없다. 오로지 최현과 공윤희, 최현과 그의 아내만이 함께 있다. 그런데 영민의 훼방이 있기 전, 최현과 공윤희가 함께 있음으로써 춘화의 분위기가 강렬하게 조성된 것이라면, 영민의 훼방이 있고 난 뒤에는, 그러니까 문인화가 강세를 띤 그 새벽에는 최현의 몸이 아내의 음성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와 함께 거기 있다.

최현이 아내의 화해 요청이 담긴 음성 메시지와 노래를 듣고 나서 공윤희와의 관계에 선을 긋고 마음을 돌려 세운 것이 아니라 그가 아내에 대한 도덕적 약속을 최선을 다해 어렵사리 지키자 아내로부터 화해의 요청이 날아들었다는 것은 그냥 그런 순서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마치 최현의 행동과 결단에 대한 보상같이 아내의 화해의 음성과 노래가 날아든 것이다.

최현의 말대로, 아내는, 음성적 존재로 여기 있다. 따뜻한 노래로 화답하면서 여기 있다. 장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밤, 춘화와 문인화의 교차와 결합을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긴장된 성애의 끈을 끝까지 유지하되 주인공의 정신적 기품은 더 강성할 것. 아니 그보다 더 간단히도 가능하다. 성애의 흥취는 진하게, 하지만 맑은 정신은 더 올곧게. 이것이 정념과 명상에 관한 또 하나의 변주곡이다.

미지의 풍경 소리

우리는 영화 속에 등장한 두 그림을 바탕으로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두개의 상상적 그림을 떠올려보아야만 한다. 가령 이와 같은 그림들이다. 남녀가 뒤엉킨 성행위를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그림이 여기 있다. 그 해학과 색정의 그림 안에는 엉뚱하게도 이런 차분하고 또 차분한 글귀가 쓰여 있다.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 뜨고 하늘은 맑다.” 그리고 또 하나의 그림이 있다. 초승달이 떠 있다. 방금까지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는 움막. 식탁에는 찻잔이거나 술잔인 것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하늘은 아주 맑다. 그 고요하고 맑은 그림 안에 이런 엉뚱한 해학적 색정의 글귀가 쓰여 있다. “한잔하고, 하세.”

춘화의 그림 안에 문인화의 글귀가 문인화의 그림 안에 춘화의 글귀가 있는 것이 <경주>다. 장률은 <경주>를 두 그림 중 어느 한쪽으로 쏠리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보인다. 춘화와 문인화 두 그림을 결합하여 하나의 그림만으로는 하지 못하는 것을 해보려고 한다. 때문에 최현도, 공윤희도 보지 못한, 관객인 우리만이 본 그 기이한 그림이 있다면, 영화 속 그림을 계기로 우리가 상상한 두개의 그림이며, 그게 <경주>다.

영화에서 춘화를 보러 경주에 온 건 최현이었지만 춘화를 보기 위해 벽지를 뜯은 건 공윤희다. 하지만 공윤희도 벽지를 뜯었을뿐 그 그림을 보진 못한다. 영화는 공윤희가 그걸 보기 전에 컷하여 라스트신으로 넘긴다. 결과적으로는 현재의 시간 속에 사는 자 중에서는 아무도 문제의 그림을 보지 못한다. 그다음에 그 주인 없는 비인칭의 플래시백으로서의 라스트신이 등장한다. 누구의 것도 아닌 과거 장면. 기억의 주인은 분명치 않지만 때는 분명한 이 장면에 문득 풍경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일제히 바깥으로 시선을 돌린다.

우린 이 라스트신이 질문을 남기고 있다고 여긴다. 최현은 찻집의 그 방에서 시선을 돌리며 환영을 맞이했다. 그렇다면 비인칭의 이 장면에서 인물들 전부가 시선을 돌린다는 건, 그들이 또 다른 환상을 맞이하려 한다는 것인가. 혹은 그들의 시선을 이끈 것이 풍경 소리라는 것을 생각하자. 이건 바람이 불어서 혹은 누군가가 들어서서 난 풍경 소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리의 쓰임을 세심하게 여기는 장률이다. 영화가 라스트신에 이르기 전까지 영화에서 풍경 소리가 제대로 났던 건 한번뿐인 것 같다. 여행객 일본인들이 찻집을 떠나고 최현과 공윤희가 조금 멀뚱멀뚱 있을 때 최현이 풍경을 만지자 소리가 난다. 그렇다면 라스트신의 과거의 사람들은 지금 최현과 공윤희의 관심이 깊어지는 그 현재의 장면을 주시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 알 순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들끓는 정념과 고요한 명상의 화음 또는 불협화음의 변주곡 형태라고 애초에 우리가 부른 것들, 불행의 커플들이 은밀히 간섭하는 인간사, 성애와 도덕이 당기고 밀치며 몸부림치는 밤, 헛것들이 허허롭게 혹은 갑작스럽게 어슬렁 거리는 낮, 그리움의 귀와 믿음의 손 혹은 성애의 귀와 결백의 손, 그리고 서로 겹친 춘화와 문인화의 성질들. 그러니까 장률이, 경주라는 대지, 거기서 느낀 것들. 그와 같은 것들은 언제든 변주된 형태로 다시 또 연주될 수 있을 것이다.

<경주>의 서성이는 것들 또는 밤과 낮에 대해 생각하다 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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