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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필연의 심연

<투 러버스>의 마지막을 보며 눈물을 참기 힘든 당신에게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주려고 산 반지를 저 멀리 바닷가로 던진다. 모든 걸 걸고 함께 도망치기로 약속했던 그녀가 헤어진 애인이 다시 돌아왔다며 남자를 배신한 것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남자가 운다. 그때 그의 주머니에서 장갑 한짝이 젖은 모래 위로 떨어진다.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하는 남자의 착한 애인이 언젠가 준 선물이다. 남자는 눈물을 그치고 장갑을 줍는다. 모래 위에 처박힌 반지상자도 다시 집어든다. 그리고 송년파티가 벌어지고 있을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다급하게 집으로 돌아와 앉은 자리에서 남자의 시선이 누군가에게로 향한다. 남자의 이 짧은 부재와 돌아옴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하는 그의 애인이 해맑은 표정으로 거기 앉아 있다. 남자는 그녀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흐느낀다. 둘은 포옹을 하고 남자가 잠시 카메라를, 아니, 우리를 쳐다본다. <투 러버스>의 마지막 장면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그가 홀로 견뎌야 했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일까. 돌아와 애인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과 표정에서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일까. 그가 겪은 실연보다 그의 귀환이 슬프다. 그가 바닷가에서 깊은 아픔을 토해낸 뒤, 성큼성큼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자리에 앉을 때, 그 귀환이, 그 자리가 단순한 타협이나 포기의 결론이 아니라, 그보다 무겁고 설명 불가능하고 반문할 수 없으며, 끌어안아야만 하는 필연에 더 닿아 있음을 우리는 느낀다. 그 짧은 시간, 그를 뒤흔들었을 감정과 그가 내려야 했을 결단의 의미, 파티를 즐기는 행복한 사람들 틈에서 그가 애써 붙잡고 있는 마음에 대해 우리가 다 알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마지막을 보며 눈물을 참기 힘들다면, 우리가 이 필연의 행로를 부정할 수 있는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가 왜 돌아와야 했는지에 대한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것. 그 비통한 간극이 이 글을 쓰게 한다.

감정의 포화를 이끄는 것

레오나드(와킨 피닉스)가 만나는 두 여자는 모든 면에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산드라(비네사 쇼)는 감정을 잘 다스리며 배려심이 깊고 단단한 성정의 여자다. 레오나드와 산드라는 이들의 가족들이 비즈니스를 도모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 이어지는 둘의 만남도 거의 언제나 가족행사와 관련이 있다. 이들의 부모들은 둘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며, 그녀는 그 이유가 가족들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산드라는 레오나드의 불안과 결핍을 채워주고 싶어 한다. 반면 미셸(기네스 팰트로)은 산드라와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그녀는 감정기복이 심하고 의존적이며 심약하다. 그녀는 유부남과의 연애로 고통스러워한다. 레오나드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에게 주저 없이 기대며 그를 혼란스럽게 한다. 미셸은 레오나드만큼, 혹은 그보다 더 불안정하고 상처투성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레오나드와 연인관계를 유지하는 여자는 산드라지만, 레오나드가 진정 욕망하는 자는 미셸처럼 보인다. 산드라에 대한 감정이 가족에 대한 의무나 현실적인 선택과 관련이 있고, 미셸과의 만남이 그의 진짜 욕망이나 환상과 연관된다고 간단하게 말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도식적인 규정은 레오나드라는 인물은 물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드리워진 필연의 심연을 상투적 의미로 덧씌운다. 그러니 다소 뻔해 보여도 다시 물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두 여자에 대한 레오나드의 감정은 무엇인가. 그는 왜 두 여자에 대한 감정을 동시에 지속하는가. 정한석은 한국에서는 아직 개봉하지 않은 <이민자>에 대한 감상을 전하면서 허문영의 표현을 인용해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는 “물 먹은 솜” 같은 감정적 밀도와 피로함이 있다고 쓴 적 있다(<씨네21> 907호). 동의한다. 그런데 <투 러버스>를 보는 우리의 감흥이 종종 “물 먹은 솜”의 상태에 이른다면, 그건 레오나드가 서로 다른 기질의 두 여자를 오간다는 사실, 즉 그의 감정적 흐름이 두 갈래로 나뉜다는 사실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그 감정들이 명확히 정리되어 분리되지 않고 어딘지 모호하게 달라붙거나 이어져 있다는 인상이 우리를 그런 감정적 포화 상태로 이끈다.

몇몇 장면들이 있다. 레오나드가 미셸과의 우연한 만남을 가장해 그녀의 출근길에 동행하면서 둘 사이에 친밀하고 사적인 대화가 오간 뒤 레오나드는 미셸의 전화번호를 알게 된다. 그는 지금 산드라와의 약속을 잊고 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들뜬 표정으로 산드라에게 사과전화를 걸고 영화 데이트 약속을 잡는다. 그러면서 건너편 미셸의 방 창문을 쳐다본다. 상대는 미셸에게서 산드라로 옮겨지지만 이 장면을 채우는 감정의 흐름에는 단절이 없다. 레오나드는 지금 산드라에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일까? 그렇게 보이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순간을 복잡하게 만든다. 또 다른 장면. 레오나드가 미셸의 유부남 애인과 저녁을 먹는다. 미셸과 애인은 오페라를 보러가고 그 뒷모습을 묘한 감정으로 쳐다보던 레오나드는 집으로 돌아와 오페라 CD를 듣는다. 그때, 산드라가 찾아온다. 산드라는 레오나드에게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며 자기와 사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오페라의 선율 속에서 레오나드는 “나도 당신을 좋아한다”고 답하고 산드라에게 키스를 한다. 그날, 둘은 첫 섹스를 한다. 처음에 이 장면에 흐르는 오페라 음악에는 미셸과 유부남 애인에 대한 레오나드의 복잡한 심정이 실려 있다. 질투, 선망, 분노, 슬픔, 위화감 등이 뒤섞인 감정일 것이다. 그런데 그 웅장하고 서글픈 음악 속에서 레오나드와 산드라가 몸과 마음을 나눌 때, 그 선율은 어느새 이들을 위한 노래처럼 들린다.

체념을 끌어안고 돌아옴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좋아하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예상하는 감정적 충돌이나 단절을 이 영화에서 찾기는 어렵다. 대신 일련의 장면들이 보여주듯, 이상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적 전환, 혹은 맞물림과 겹침이라고 부를 만한 움직임이 여기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레오나드의 위와 같은 감정적 이동은 위악적이거나 기만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레오나드가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에 등장하는 남자처럼 두 여자에게서 각기 다른 충만감을 느끼며 감정적 평행을 유지한다고 자신하는 자는 아닐 것이다. 그는 지금 미셸이라는 도달 불가능한 이상에 대한 좌절과 결핍을 산드라를 통해 해소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면 <투 러버스>의 마지막이 그토록 우리의 마음을 흔들지는 못할 것이다. 레오나드의 감정이 미셸에게 더 사로잡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상에서 산드라에 대한 그의 감정이 거짓이라거나 덜 진실하다고 단언할 근거는 없다. 비즈니스를 둘러싼 양가의 관계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가 산드라와 맺는 관계에는 미셸에 대한 감정과는 다른 종류의 간절함이 있다고 나는 느낀다.

레오나드에게는 사랑의 실패에 관한 트라우마가 있다. 그가 고백한 바에 따르면, 약혼녀와 그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고 그 이유로 약혼녀가 그를 떠났다. 그녀를 찾아 헤매며 그는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부모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무능력한 자신과 그런 자신을 무참히 버리는 여자.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에게 산드라는 그 트라우마로부터 ‘정상’의 궤도로 도약할 수 있는 건강함과 투명함이다. 반면 미셸은 레오나드처럼 우울의 세계에 침잠한 자이며 결여 그 자체이고, 레오나드의 거울이다. 레오나드가 산드라의 끈을 놓지 못하면서도 미셸에게 이입할 수밖에 없는 건 이 때문이다. 산드라가 레오나드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해줄 수 있는 상대라면, 미셸은 그 트라우마를 반복하게 하는 존재다.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란 우리의 과거와 상처를 넘어서게 하는 힘이라고 여기지만 우리를 정작 두려운 매혹에 빠뜨리고 뿌리칠 수 없게 하는 사랑은 그 트라우마를 반복하고 실패를 예견하는 자기파괴적인 것이다. 그에게 미셸이 병든 자신 자체라면, 산드라는 그런 병든 자신을 보게 하는 눈이다. 그 병든 상태는 그가 생에 대한 감각을 포기하지 않는 절박한 방식이고, 그 상태를 보게 하는 눈은 그 병이 생을 넘어서고자 하는 충동을 붙잡아준다. 두 여자 사이에서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환멸하고 연민한다. 레오나드와 산드라의 첫 섹스 장면에서 얼룩처럼 느껴지는 단 한 가지는 이 장면이 미셸의 불 꺼진 방 창문을 보는 카메라의 응시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 장면에는 마치 병든 내가 ‘정상적인’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혹은 내 밖에서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거리감이 있다. 그 거리감은 다소 지루하지만, 안정적이고 아늑하다. 하지만 레오나드가 매섭고 황량한 바람이 부는 뻥 뚫린 옥상에서 미셸과 사랑을 나눌 때, 지독히 밀착되어 서로 엉겨붙은 둘의 모습은 공격적이고 불안정하며 위태롭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레오나드는 미셸이라는 결여를 유지하기 위해 산드라와의 관계를 지속한다. 미셸을 사랑하기 위해 산드라를 사랑한다. 우울하고 병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친밀한 이웃의 지반을 가꿔야 한다. 이러한 구분이 산드라에 대한 레오나드의 감정을 도구적으로, 혹은 열등한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레오나드의 산드라에 대한 감정과 미셸에 대한 감정 중 어느 쪽이 더 치열하다고 말하기보다 그 두 감정의 관계가 치열하다고 말하고 싶다. <투 러버스>는 그 치열함에 도덕적인 판단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두지 않는다.

물론 우리 중 누구도 그 두 감정을, 두개의 나를 완벽한 균형감각 속에서 유지할 수는 없다. 레오나드는 미셸의 손을 잡는다. 그는 결국 우울하고 병든 심연으로 뛰어드는 길을 선택한다. 레오나드와 미셸이 벼랑 끝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전화로 나눈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나는 당신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어. 하지만 당신을 느낄 수 있어.” 병든 자들은 서로를 거리를 두고 보지 못한다. 상대의 결여를 보는 대신, 그것을 내 것으로 느낀다. 만약 영화가 그 자리에서 끝났다면, 우리는 또 다른 파국을 예견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둠으로 승리한 로맨스의 쾌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셸은 레오나드를 배신하고 이제 레오나드에게 남은 선택지는 얼마 없다. 죽거나 홀로 떠나거나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그는 귀환을 선택한다. 놀랍게도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보다는 서두른다는 인상이 있다. 미셸과 도망치기 위해, 그토록 조심스럽게 몰래 집을 빠져나왔던 남자가 단 몇 시간 만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집으로 다급하게 돌아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제임스 그레이의 지난 영화들에서 귀환은 언제나 파국으로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자는 환영받지 못하거나, 가까운 사람들, 특히 가족들의 죽음을 불러오곤 했다. 돌아오지 말았어야 하거나, 너무 늦게 돌아와서 누군가의 희생을 대가로 치렀다. 그에 비하면 <투 러버스>에서 레오나드의 귀환은 그런 표면적인 변화를 불러오지 않는다. 그 귀환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며 명확한 내적인 동기를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그를 집으로 끌어당기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의 강렬함을 무섭게 체감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귀환은 그레이의 영화들이 보여준 그 어떤 돌아옴의 행위보다 체념적으로 느껴진다. 아니, 단순히 체념을 내버려두는 게 아니라, 그 체념을 어떤 식으로든 필사적으로 끌어안으려는 안간힘이 여기 작동하는 것 같다.

우울과 관능과 슬픔의 소우주

레오나드가 집을 떠나던 그 밤, 천진한 미소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아들을 엄마는 붙잡지 못했다. 그 아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엄마만이 그의 귀환을 응시한다. 바닷가에 버려질 뻔했던 반지를 산드라의 손에 끼워주는 레오나드가 눈물을 훔치며 말한다. “그냥 행복해서 그래.” 몇 시간 전 그가 엄마에게 고백하던 행복과 지금 그가 산드라에게 말하는 행복은 같은 것일까. 우리는 그가 미셸과의 행복을 말할 때 의심하지 않았듯, 산드라를 향해 중얼거리는 행복이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다만 그 두 행복이 같지 않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다. 지금 그의 육체는 그 간극을 인정해야만 하는 자리에 와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가 본 것은 갑자기 물에 뛰어든 레오나드의 모습이다. 물속에서 그는 과거에 그를 떠나버려서 긴 우울에 잠기게 한 약혼녀의 환영을 본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난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나는 떠날 수밖에 없어.” 그때 레오나드가 허우적거리며 물 위로 올라와 도와달라고 외친다. 그를 구하러온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가 그가 뛰어내리는 걸 보았다고 말하자, 레오나드는 말한다. “난 빠진 거야.” 물에 뛰어든 게 아니라 물에 빠졌다는 말에는 물에서 나와야 한다는, 나오고 싶다는 의지 혹은 본능이 숨겨져 있다. 첫 장면에서 우리가 잠시 경험한 이 물속의 세계는 더없이 몽환적이고 아름답다. 그러나 이 세계는 죽음에 너무 가까이 있다. 레오나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물속으로 이끌렸지만 숨이 멎기 전에 물 밖으로 손을 뻗는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 도입부를 떠오르게 한다. 레오나드는 이제 물 밖으로 완전히 나온 것인가. 레오나드의 작은 방에는 수족관이 있다. 그가 방 안에서 산드라와 이야기를 나눌 때, 창문 건너편의 미셸을 바라볼 때, 수족관의 물소리가 언제나 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는 만지고 싶지만 만져지지 않고, 부서지기 쉽지만 쉽게 증발하지 않는 우울과 관능과 슬픔의 소우주였다. 영화의 마지막, 돌아온 레오나드가 파티의 소란함 속에서 산드라를 포옹하는 그 순간, 환청처럼 그의 몸에서, 그의 눈물에서 그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어떤 잔혹한 파국의 끝보다 두렵고 울적하며 애처롭고 아픈 결말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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