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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이건 영화인가? 아니 이건 영화라네

<마스터>라는 비정상에 관한 몇 가지 추측

폴 토머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석유 시추업자 대니얼 플레인뷰(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인생 노년은 아수라장이다. 그는 대저택을 지녔지만 그 안에서 외롭고 포악한 늙은이로 살고 있으며 오랫동안 키워온 양아들과도 방금 악담을 퍼부으며 서로 돌아섰다. 때마침 영화 내내 경쟁자였고 눈엣가시였던 젊은 사이비 기독교 교주 일라이(폴 다노)가 그를 찾아와 돈을 요구하자 대니얼은 오래전에 그가 일라이에게 당했던 방식 그대로 모욕감을 갚아준다. 그러고도 끝내 분을 이기지 못해 일라이의 머리를 볼링 핀으로 두들겨 살해하고는 “내가 다 이루었다”(I am finished)고 읊조린다. 본론에서 펼쳐졌던 미치광이 사업가와 야욕에 찬 교주의 터질 것처럼 팽팽했던 대결은 그렇게 대단원에 이르러 전자가 후자를 해치우고는 상대방의 대표적인 교리 한 구절(“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을 마음대로 착취하며 끝나게 된다. 장대한 이 영화의 끝도 여기다.

이 라스트신은 벼락같다. 급격하게 뛰어넘은 시간차 때문에 다소 비약이 느껴지지만 그게 대단원의 긴장감에 흠집을 내진 않는다. 오히려 앤더슨은 본론에서 펼쳐졌던 주인공들의 서사의 쟁점을 탁월하게 응축해내는 동시에 ‘피를 부르리라’ 예고했던 제목의 내용을 명징하게 실현해낸다. 이런 감정들의 성취는 서사를 고조시키고 때론 비약하고 마침내 폭발시킬 줄 아는 자의 능란한 기술로만 가능한 것이다.

앤더슨은 다양한 방식으로 서사적 유능함을 발휘해왔다. 그는 다수의 인물과 짝패가 등장하는 다중 캐릭터의 영화에서도 반드시 서사를 묶고 정리해내는 매듭의 지점을 마련하곤 했다. 그가 모델로 삼았던 로버트 알트먼의 다중 캐릭터 영화들이 산만함에서 더 산만함의 활기로 나아가며 무모하고도 마성적인 괴력을 발휘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양상이었다. <매그놀리아>와 <부기 나이트>가 그 예다. 혹은 정확히 그 반대에 있는 <펀치 드렁크 러브>와 같이 일직선의 단단한 서사를 전개할 때에는 결코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 선을 따라 질주하는 집중력을 자랑했다.

그러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앤더슨이 많은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마스터>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전례가 없는 경우다. 2차대전에 해군으로 참전한 뒤 전역하여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불안정하고 위험해 보이는 사내 프레디(와킨 피닉스)가 ‘코즈’라는 신흥종교 단체를 이끄는 교주 랭카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를 만나 그의 수하가 되고 치료와 번민을 거듭한다는 비교적 명료해 보이는 내용 설명과는 다르게, <마스터>는 결국 철저하게 불명료하고 불투명한 영화다.

영화에는 실상 매듭이 보이지 않거니와 매듭인 것 같아 보이는 것들도 들여다보면 마냥 풀어져 있다. 누군가에게 이 사태는 곧장 서사적 서투름과 실패를 의미하는 것 같다. 미국에서 <마스터>가 개봉했을 때 이 영화가 서사적으로 취약하다고 비판한 일군의 비평가들에게 그러했을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라스트신을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고 돌아본 이유인데, 그러니까 앤더슨은 서사를 직조하고 응축해내는 저 과거의 능력을 별안간 잃어버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오히려 앤더슨은 이렇게 말했다. “<마스터>는 (내 전작들과 비교해) 좀더 수수께끼 같은 영화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 같다. <마스터>는 서사에 서투른 영화가 아니라 서사가 이상해 보이는 영화다. 영락없이 미스터리이고 이 미스터리가 지난 영화들과 비교하여 이 영화에 획기적으로 도입된 의도된 성질이고 사태이자 분위기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 지배적인 모종의 비정상성이 그 미스터리를 조장하고 있다고 우린 가정하고 있다. 그가 전작들과 이토록 다른 영화를 내놓은 개인적 경위를 우린 추론할 수 없지만 <마스터>가 어떻게 그리고 왜 거대한 의문부호가 되고 있는지에 대해 작품 안에서 말해볼 수는 있다. 그 몇 가지 추측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기원과 연대기가 없는 삶

프레디라는 이 수상한 사내의 신체에 관하여 먼저 말하는 게 좋겠다. 프레디의 정신 상태는 불안하고 위협적인데 그의 신체의 특정한 형상이 그런 느낌에 한몫을 더하고 있다. 말을 흘리는 어눌한 말투, 한쪽으로 기울어져 균형을 잃은 얼굴의 근육, 그리고 심하게 굽은 어깨. 말하자면 신체적 기형성. 그중에서도 어깨가 유별나다. 하지만 우리는 프레디의 굽은 어깨가 병인지 타고난 체형인지 몸의 습관인지 하여간에 그 무엇 때문인지 잘 모른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고 어머니는 정신병을 지녔으며 고모와는 술에 취해 근친상간을 한 적이 있고 사랑하는 연인 도리스는 사랑하기에 너무 어린 열여섯살이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 그래서 그 어깨는 마음이 너무 괴로워 몸으로 드러난 것이고 그의 내면의 고통의 강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추정하고 싶어지지만, 그건 어깨의 휘어짐이라는 표상이 워낙 강력하여 조급하게나마 부과하게 되는 우리의 의미 부여이자 상상일 뿐이다. 그런 사연들은 어깨를 휘게 하지 않는다. 굽은 어깨는 굽은 어깨일 뿐이다.

이것이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대니얼의 기형적 무릎과 <마스터>의 프레디의 기형적 어깨의 차이다. 대니얼은 곧게 서거나 걷지 못하고 언제나 몇 십도 구부러진 각도로 엉거주춤 걸어다니며 프레디 못지않은 괴상함을 선보였는데, 영화 초반에 석유를 시추하던 중 다리가 부러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굽은 무릎은 그의 지독한 삶의 표상이며 그가 절룩거릴 때마다 우린 그 절룩거림의 기원을 통각으로 회상하거나 알아챈다. 하지만 프레디의 굽은 어깨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그의 현재를 특징짓는 가장 유별난 표상이지만 여기엔 기원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의 장애가 아니라(그는 이것 때문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실상 그에게 흥미를 느껴 그의 기원을 따져보려는 우리의 장애물에 더 가깝다. 저 굽은 어깨는 단숨에 프레디라는 인물쪽으로 우릴 끌어당기고는 있지만 그의 삶의 기원적 구체성을 알고자 하는 순간부터는 내내 우리를 훼방놓는다.

그의 신체와 관련한 더 흥미로운 점이 있다. <마스터>를 보는 도중에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에 자주 빠져들었다. 그런데 프레디는 도대체 몇살쯤 된 사내인가. 어쩌면 이 질문을 어떤 관객도 분명 또 했을 것이다. 그는 20대의 어느 날에 군인이 되었을 것이고 7년이 지나 도리스의 집을 찾아간 것이라고 했으므로 아무리 많이 쳐준다 해도 30대 중반을 넘진 않았을 것인데, 추정되는 그의 실제 나이에 비해 그의 외양은 턱없이 늙어 보인다. 물리적으로 추정 가능한 그의 실제 나이와 외양으로 대변되는 그의 나이 사이에 놓인 엄청난 간극. 이것이 앤더슨이 참조한 영화들 중 한편인 <바워리가에서>에서 가져온 의도적 설정이라는 건 인터뷰를 읽고 나서야 짐작하게 되었지만, 중요한 건 여기 참조물이 있다는 그 사실이 아니라 간극이 일으키는 그 효과에 있다. 그 효과란 연대기적 삶의 시간성을 상실시키는 효과다. 그 간극은 프레디의 삶의 시간성을 온전하게 연대기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이해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으며 그는 그냥 어디선가 툭 하고 튀어나온 존재처럼 보이는 것이고 그 때문에 구체적인 연보를 쓸 수 없는 그의 삶은 고독하고 서글퍼 보이기까지 하다. 우린 프레디의 삶의 기원을 모르는 만큼 그의 삶의 연대기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관계의 비대칭성

프레디의 신체가 서론이 될 수 있다면 프레디와 랭카스터의 관계는 본론이 될 것이다. <마스터>가 그 무엇보다 양자의 관계에 핵심을 둔 영화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미국의 평론가 켄트 존스는 둘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했다. “이것은 프로이트와 늑대인간이 아니다. 그보다는 리 스트라스버그와 마릴린 먼로에 가깝다.”(<필름 코멘트>) 이 표현은 그들이 의사(프로이트)와 환자(늑대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멘토(리 스트라스버그)와 제자(마릴린 먼로)의 관계에 가깝다는 뜻일 것이다. 마릴린 먼로는 연극이론가이자 연출가인 리 스트라스버그를 자기의 절대적 조언자이자 연기 스승으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명쾌한 정의에 온전히 공감하긴 어렵다. 그들이 멘토와 제자의 관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여러 관계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한눈에도 랭카스터와 프레디는 멘토와 제자이고 주인과 하인이며 교주와 신도이고 유사 아버지와 유사 아들이다. 더 나아가 여기에 분석가(의사)와 피분석자(환자)의 관계를 더해도 무방할 것이다. 실제로 랭카스터는 영화 초반에 등장했던 두명의 군의관과 마찬가지로 프레디를 치유하기 위해 나선 세 번째 심리분석가의 역할도 맡고 있지 않은가. 다만 이상의 관계들이 <마스터>의 미스터리를 적극 구동하는 요체는 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기에 이 관계들은 너무 확연하고 선명한 대칭 구도에 놓여 있다.

차라리 이렇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 랭카스터에게 프레디란 무엇인가, 하고. <마스터>를 보는 누구라도 은연중에 전제하는 게 있다. 프레디에게 랭카스터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프레디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중심이라고 생각해서이고 제목도 그렇게 지어져 있다. 우리도 이 관점을 전제했던 것 같은데 이제 뒤집어 생각할 때가 온 것 같다. 랭카스터를 중심으로 프레디의 존재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실은 이렇게 뒤집어 물을 때에야, 괴상하다고는 느꼈지만 딱히 환상성 안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참으로 수상쩍다는 느낌만 남기고 다음 또 다음으로 넘어가버리곤 했던 무수한 문제의 장면들을 비로소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가 미스터리하다고 느껴진다면 그렇게 느끼도록 하는 의아한 장면과 그 연결들이 도처에 많아서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대체로 프레디와 랭카스터 사이에 놓인 관계의 비대칭성이라는 문제에 전적으로 관여되어 있으며 그 효과로써 이 영화의 모양은 어그러지고 있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관계의 비대칭성이란 뒤틀린 사회적 위계질서 같은 것이 아닌, 어떻게든 합이나 질서로 통일되지 않고 잡음과 교란과 혼선 등을 빚어내는 양방의 기울어진 정신의 모양새 같은 것이다. 두개의 문제로 나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랭카스터는 프레디의 무엇을 사랑하는가. 랭카스터는 프레디의 무엇을 두려워(해야)하는가.

애완용이 된, 애완 용(龍)

딸의 선상 결혼식 중, 축사의 말을 하기 위해 랭카스터가 일어선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난폭한 용을 잡은 다음에는 구르고 죽은 척할 수 있도록 잘 길들여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한다. 한마디로 상식 밖이며 황당무계한 말이다. 이게 과연 딸의 결혼식에서 아버지가 하는 축사로 어울린단 말인가. 어쩌면 우리는 잘 모르지만 코즈의 교인들끼리는 잘 통하는 은유이기 때문에 이 장면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인가 싶지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하객들도 잘 모르고 박수치고 웃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이 있다. 앤더슨은 이 장면에서 축사하는 랭카스터의 반응숏으로 하객이나 신랑 신부를 배제하고 오로지 프레디만 비추고 있다. 이것은 딸의 결혼식에 대한 축사가 아니라 방금 밀항한 거칠고 낯선 자에 대한 은밀한 환영사이자 훈령이며 누구보다 프레디가 그 말뜻을 본능적으로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영국의 영화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평자 그래엄 풀러가 쓴 짧은 글이 위의 장면을 포함하여 우리가 앞으로 거론할 장면들 중 일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안타깝지만 그가 그 장면들을 생각할 때에 길을 종종 잘못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다. 예컨대 풀러는 랭카스터가 감옥에서 돌아온 프레디를 맞아 잔디밭에서 뒹구는 장면을 두고 그들의 “잠재의식적 동성애”가 묘사된 장면으로 파악함으로써 이 장면의 핵심 또는 이와 연계된 다른 장면들과의 맥락을 완전히 놓친 것 같다. 서로 호감을 지닌 동성의 육체가 껴안고 뒹구는 모습에서 동성애를 유추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우린 이 영화 스스로 적극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다른 근거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반문해보자. 프레디가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하는 랭카스터의 모습이 잠재의식적 동성애를 드러내는 장면이라면, 랭카스터가 경찰에게 끌려갈 때 그들에게 달려드는 프레디의 모습도 잠재의식적 동성애의 일각이라 말해야 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뉴욕에서 랭카스터가 이론적 반론가를 만나 모욕당한 뒤 프레디가 나서서 그를 폭력으로 제압하고 돌아왔을 때의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때 랭카스터가 프레디에게 하는 훈계의 요지는 “짐승 같은 짓은 하지 말 것” 이다. “배고프다고 자기 똥을 먹어서야 쓰나”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우리는 랭카스터가 교주로 있는 코즈의 주요 교리를 다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여러 차례 들어 알고 있다. ‘사람은 동물(짐승)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레디는 그런 내용이 녹음된 설교를 듣고 있는 여인에게도 “나랑 할래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그는 거의 동물이다(자유를 반납하고 갇힌 프레디를 가여워하며 지칭한 말이었지만, 이후경 기자도 프레디를 “수족관에 갇힌 돌고래”라고 표현하며 그의 동물성을 직감했다(<씨네21>, 912호)).

특히 프레디는 아무 데서나 성욕을 드러내는 데 부끄러움이 없는 야생동물이(었)다. 그는 차라리 개다. 폭력성에서도 그렇다. 주인 랭카스터에게 반론을 걸어오는 자가 있으면 기꺼이 달려가 사납게 물어버리고 그 주인이 경찰에 끌려갈 때에도 역시나 사정없이 덤벼들어 그들을 공격한다. 소설가 김영하 역시 이 장면을 두고 “충실한 개처럼 주인(마스터)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에게 달려든다”(<씨네21>, 913호)고 묘사했다. 그러니 본래 사납지만 자신에게만은 충복한 개(프레디)가 돌아왔을 때 주인이 잔디밭에서 그 개와 뒹굴며 즐겁게 한판 놀아주는 것은 당연한 환영인사다.

랭카스터에게 프레디란 무엇인가. 프레디는 랭카스터의 애완동물, 아니 랭카스터의 개, 아니 더 정확히는 랭카스터의 용, 애완용이 된, 애완 용(龍)이다. 물론 이때의 핵심은 단순한 애완의 감정을 넘어선다는 데 있다. 정신분석학자 레나타 살레클이 이 부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결정적으로 넓혀주었다. 살레클은 프로이트를 경유하여 말하기를, 배설물에 대한 혐오감은 인간의 사회화 과정이 남긴 결과임을 지적한다. 그러니까 배고프다고 해서 자기 똥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랭카스터가 말할 때 그는 덜도 더도 아닌 프레디의 미숙한 사회화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살레클은 더 중요한 말을 하고 있다. “왜 우리는 우리의 애완동물들을 그토록 사랑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예컨대 개나 고양이에게 옷을 입히는 등- 그들의 안녕을 무시하면서까지 행동하는 것인가? 이러한 사랑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인간이 동물에게서 인간 자신이 더이상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상실된 자유, 야생성, 동물성 등을 본다는 것이다.”(<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랭카스터는 이성을 강조하는 사람인데 그가 저 동물의 동물성을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사실이겠는가 반문한다면 랭카스터를 주의 깊게 보지 않은 것이다. 랭카스터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곧잘 보여주는 행동들, 즉 뉴욕에서 이론적 반론에 처했을 때, 프레디가 감옥에서 랭카스터에게 대들 때, 코즈의 동반자 헬렌이 책의 중대한 표현이 바뀌었음을 지적할 때, 그가 모두 이성을 잃은 욕지거리 아니면 분노로 그 사태를 마감했다는 사실만 지적해도 될 것이다. 랭카스터에게는 동성애가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야수성과 동물성이 잠재되어 있다. 게다가 그는 교리의 일환으로 위장한 음담패설의 일인자이고 독주 이상의 독주를 몰래 사랑하는 음주가다. 물론 그가 위장하고 몰래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프레디는 랭카스터가 마음껏 물어뜯고 싶은데 못 무는 놈들을 알아서 물어주고 랭카스터가 마음껏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을 실컷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랭카스터의 말을 믿자면, 프레디와 랭카스터는 전생에 둘 다 비둘기라는 동물이었다.

랭카스터가 프레디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동성애적 사랑이기보다 자신이 본래적으로는 갖추었으나 지금은 다수 희박해져버린 야생적 자유를 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공격 성향의 애완 용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우린 말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한 두개의 숨겨진 관계의 비대칭성 중 하나이며 랭카스터는 프레디의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관한 작은 답이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엇일까. 그는 무엇을 두려워(해야)하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응시자

프레디가 감옥에서 돌아온 직후 랭카스터 가족의 식사 풍경을 보자. 사위인 클락이 나서서 먼저 고자질을 시작한다. 프레디가 랭카스터의 교리를 의심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딸 엘리자베스가 나서서 프레디가 자신과 사랑에 빠진 것 같다며 두려움을 표시한다. 정확히는 자신에게 욕정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여 무섭다는 뜻이었을 거다. 이미 한 차례, 그가 말릴 길 없는 알코올 중독자라는 이유로 프레디를 내쫓자고 건의한 바 있는 랭카스터의 아내 페기 역시 이 분위기에 동참한다. 랭카스터는 우리가 그를 돕지 않으면 그를 버리는 것이라며 이 상황을 겨우 수습해낸다. 프레디를 치료하는 20여분의 길고 기이한 치료 장면이 이후부터 시작된다.

하여간에 이 장면에서 확실해진 건 랭카스터의 측근들이 프레디를 쫓아내지 못해 다들 전전긍긍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랭카스터에게 있어 그 치료과정이란 사실 프레디를 낫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즉 그를 사람으로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가 쫓겨나지 않도록 시간을 버는 빌미이자 자구책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치료는 결국 실패하고 프레디는 알아서 도망친다. 그들은 왜 랭카스터에게 당신의 애완동물을 버려야만 한다고 윽박지른 것일까. 우리는 그들의 말을 순순히 믿어야 하는 것일까. 그가 교리를 믿지 않아서 혹은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여서 혹은 난폭한 폭력배여서 혹은 성적으로 문란해서 그리하여 어느 쪽이든 그 집단에 어울리지 않고 해를 입히는 자이므로 그러한 것일까. 프레디는 정말 못 말릴 정도로 이 집단의 신성에 해를 입히는 자일까. 그것이 아니라 혹시 프레디로 하여금 그들이 숨겨놓은 치부에 가까운 진실이 발각될까 두려워 각자의 변명을 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선상의 결혼식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아버지의 괴상한 축사만큼이나 괴상한 딸의 시선이 있다. 결혼식의 말미에 엘리자베스는 신랑과 입을 맞추더니 문득 하객쪽으로 시선을 던진다. 그 시점숏의 반응자는 다름 아니라 프레디다. 그가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슬며시 피한다. 결혼식장의 신부는 난데없이 신랑을 보지 않고 하객에 끼어 있는 한 낯선 사내에게 시선을 준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행동은 노골적으로 담대해진다. 랭카스터의 이론적 동반자 헬렌이 필라델피아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자리에서 엘리자베스는 프레디의 옆에 슬며시 앉더니 그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급기야 그의 성기에 손을 가져간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프레디가 그 손을 받아들인 것 같고 그들의 행위가 끝나 엘리자베스가 유유히 자리를 뜨자 그녀의 남편 클락이 뒤늦게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프레디쪽을 바라본다. 뒤이어 랭카스터는 “금발머리에게 휘둘리지 말자”는 메시지의 노래를 부른다.

평론가 풀러는 페기, 엘리자베스, 클락이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이 “프레디의 섹슈얼리티”라고 지적하고 있다. 엘리자베스의 일련의 장면들을 보자면 의미있는 지적인 것 같다. 만약 그가 주장하는 동성애론까지 겸한다면 어쩌면 페기도 프레디에게 남편을 빼앗길까 고민 중이라고 가정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논리를 끝까지 신임하는 것은 망설여진다. 풀러가 프레디의 섹슈얼리티가 문제라고 말할 때 그 핵심은 프레디의 성적 유혹의 능력이 이 집단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과연 그의 성적 유혹능력이 이 정황의 진위일까.

<마스터>의 짧지만 섬뜩한 장면 중 하나인, 페기가 랭카스터의 수음을 돕는 장면이 우리로 하여금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게 한다. 아무래도 이 장면은 ‘여보, 저도 당신의 성욕을 만족시킬 수 있어요’라는 식의 메시지가 들어 있지 않다. 단지 페기가 랭카스터의 성욕을 채워주는 장면으로 여긴다면 우린 너무 많은 것을 놓치게 될 것이다. 이때 페기가 하는 말과 행동을 유심히 보자. 페기가 하는 말의 요지는 명료하면서도 위협적이다. 요컨대 “내가 모르는 누구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 단, 내가 아는 사람들이 모르게 하라. 그리고 프레디를 내쫓아라”이다. 무슨 짓을 해도 좋지만 우리의 네트워크 안에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행동은 더 분명하고 더 위협적이다. 페기는 사람은 동물과 다르다며 이성을 강조하는 교주의 아내답게 근엄하고 정숙한 자세로 찻잔을 앞에 놓고 이 말을 하고 있지 않다. 세면대 앞으로 갑자기 다가와 다그치는 것처럼 수음을 해준다. 아니 시킨다. 이 행동은 무성의할 뿐 아니라 싸늘하고 난폭하다.

우리의 네트워크에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메시지를 기계적이고 난폭하고 무성의한 행위를 동반하여 전할 때, 이 수음이 성적 쾌락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엄중한 경고 또는 체벌로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너의 어떤 면모가 가짜이고 환상이고 상징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 너도 그걸 잊어서는 안되며 우리가 쌓은 질서를 함부로 깨지 말라는 경고와 같은 말과 행위다. 말하자면 유독 순진한 클락만 제외하면 랭카스터의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야말로 랭카스터의 신성을 믿지 않는다. 딸은 아버지의 교리 시간에 간음을 원하고 아들은 공공연히 아버지의 말이 다 꾸며진 거라고 말한다. 이 일련의 장면들 이후에 감옥 장면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니 감옥에서 프레디가 그토록 화를 내는 이유도 가장 가까운 이들이 이 남자를 믿지 않는 게 빤한데 그런 그만이 자신을 아껴주고 자신도 그만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설명되지 않고 갑갑해서였을 것이다.

페기의 말과 행동에 진위가 있다. 환상과 상징이 발휘되지 않는 종교는 없을 것이다. 랭카스터와 코즈는 환상이며 기껏 허술한 종교이론으로 위장된 상징일 뿐이다. 그러므로 도무지 상징의 질서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안중에도 없이 날뛰고 있는 동물 프레디가 필요 이상으로 오래 소속되어 있을 때, 게다가 그를 도리어 이 상징의 가장 우두머리이자 상징의 상징인 랭카스터가 깊이 교감하는 모순이 벌어질 때, 그 교감 때문에 이 상징적 네트워크는 교란되고 찢길 것이다. 그게 찢기면 바깥세상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 영화가 세심하게 코즈의 관련자 이외의 대중들은 거의 만나지 않는 설정을 두고 있다는 점을 우린 생각해야 한다. 바깥의 사람들은 코즈와 랭카스터를 무엇이라 보는가. 미친놈, 정신병자. 환상과 상징이 무너지면 랭카스터가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이라는 진실이 밝혀진다. 그러니까 교리에 대한 불신도, 알코올 중독도, 폭력도, 섹슈얼리티도 아닌, 바로 그것이 프레디가 두려운 이유고, 랭카스터가 그를 두려워(해야)하는 이유다. 랭카스터가 정신병자라는 진실이 밝혀지는 것.

앞서 했던 질문을 반복해보자, 랭카스터에게 프레디는 무엇인가. 말장난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데, 프레디는 랭카스터의 ‘그 무엇’이다. 바깥으로부터 온 괴물? 코즈라는 상징적 질서의 빈틈이 만들어낸 상태? 실재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그 거대한 개념은 우리의 빈약한 맥락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차원에 있을 것이다. 다만 실재라는 개념이 언급될 때 외상, 악몽, 외설, 침입, 교란, 통제 불능, 초과 등이 함께 말해지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코즈의 세상에서는 프레디가 그와 같은 불길한 ‘그 무엇’이라는 생각은 든다. 요컨대 지금 눈앞에 있는 그가 그들의 질서를 뚫었다는 것이며 그런데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고 감당이 안될 뿐 아니라 두렵고 불길한 진짜라는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페기는 진실을 짚지 않았던가. “그가 진짜 누구인지 모른다는 게 문제예요. 도움도 필요없는데 왜 여기 있는 건가요?”

그러니 랭카스터가 프레디를 다시 불러들이는 후반부 영국 장면. 이건 사실 앞뒤가 안 맞는 장면이다. 이미 스스로 떠난 자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 자네만이 도울 수 있다”는 이유로 돌아오게 해놓고는 그 급한 일에 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리고 프레디의 어떤 의사표시도 있기 전에 너는 뱃사람이니 자유를 찾아가라며 성급하게 다시 보내는 것은 실로 이상한 상황이다. 이 장면은 서사의 필요로 덧붙인 장면이 아니라 마침내 상징적 질서에 온전히 남기로 작정한 랭카스터가 프레디에게 내려야 하는 자기만의 근사하고 권위적인 작별의식이자 제식의 제스처로 보인다. 너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다, 그렇다 해도 너는 나의 제식을 거쳐 떠나가주려무나, 여기 남아 있을 나를 위하여. 랭카스터 본인은 프레디를 내치는 결단을 최후까지 미루지만 결국 그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감행하고 만다. 하지만 그때 랭카스터가 부르는 노래는 적어도 진심일 것이다. 사랑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의 그 무엇에 바치는 마지막 뜨거운 노래.

그러고 보니 프레디의 직업은 사진가였다. 랭카스터의 부름을 받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말하지 않았던가. 마스터의 이 사진을 내가 찍었노라고. 프레디의 직업이 사진사인 것은 극을 위하여 설정된 것이겠지만 그 결과 랭카스터를 응시하는 유일한 응시자가 프레디다. 그런데 페기의 말에 따르면 이 유일한 응시자의 진짜 정체를 아무도 모른다. 어디서 무엇이 보는지 모르지만 분명 응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실재의 영역인 것인가. 그렇다면 세계의 진정한 것이 실재인 것처럼 <마스터>의 진정한 마스터는 프레디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랭카스터는 프레디를 사랑하지만 두려워할 수밖에 없고 두려워해야 한다. 적어도 상징 안에서는 그가 마스터여야 하므로.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한 관계의 비대칭성의 나머지 실체다.

세 가지 부정교합

한 가지가 더 남아 있다. 형식의 부정교합이라 부를 만한 것들에 대해 말할 차례다. 이 형식이 관계의 비대칭성에 큰 몫을 발휘한다는 건 물론이다. 앞선 몇몇 장면을 통해 부분적이고 우회적으로 언급되긴 했지만, 말뜻 그대로 어떻게든 서로 이가 물리지 않고 어긋나는 상태로 맞붙는 이 형국에 대해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말들이 불가피하다.

우선은 구조 및 공간이동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 <마스터>의 뼈대에 해당하는 구조가 하나 있다면 그건 돌아오고 떠나가는 것이다. 이건 서사 구조가 아니라 행위 구조다. 그래서 사연이 없는 대신 행위들만 있다. 프레디가 그 수행자다. 그러다보니 공간이동도 곧잘 있는데, 그중에서도 프레디가 도리스를 찾아가는 두번의 장면이 가장 기이하고 아름답다. 김혜리는 두번의 장면 중 처음을 가리키며 “사랑하는 이웃소녀와의 추억장면에서는 프레디가 현실의 모습 그대로 과거에 뛰어든 것처럼 보인다”(<씨네21>, 913호)고 세심하게 표현했다. 이 영화의 시간성이 혼란스럽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실은 우리도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다만 이 시간성의 혼란은 연도표기 및 시점의 부재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정해진 구조를 따라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할 때 장면이 결합 또는 교합되는 그 방식의 효과인 것 같다. 비유하자면 직선에 이어 붙은 곡선, 트임 직후의 막힘, 조임 이후의 풀림이 급격하게 덜컥 엇갈려 마주 붙으면서 생기는 어떤 현기증이라고 해야 할까. 이때 공간은 갑작스럽게 비약하고 뒷장면은 갑작스럽게 삽입된다. 그때 질주하는 앞장면과 느리기 이를 데 없는 뒷장면의 완연한 속도와 리듬의 차이 등이 현기증을 낳고 갑자기 시간성을 상실시키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현재인지 과거인지 망설여지게 한다. 예컨대 프레디가 도리스를 찾아가는 첫 장면은 프레디의 감정과 표정으로 질주한 다음 이내 공간 이동하여 한없이 느리게 걷는 프레디의 뒷모습으로 도리스의 집을 방문하고, 두 번째 장면에서는 오토바이의 물리적 속도로 끝없이 질주한 다음 같은 방식으로 느리게 진입한다. 그 격차 속에서 우린 시간에의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반면에 이미 팩트로 확정된 어떤 정황들을 우리의 의식 속에서 부정교합되도록 재유도하는 방식도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극장에서 프레디가 랭카스터의 전화를 받는 장면을 보자. 프레디는 랭카스터의 전화를 받는다. 전화를 끊은 다음 장면에서는 다시 자고 있다. 그런데 랭카스터를 만났을 때 프레디는 “내 꿈에서” 당신이 나를 불렀다고 말하고 랭카스터도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프레디가 전화를 받은 건 그의 꿈속에서다. 하지만 우리가 혹시라도 프레디의 “내 꿈에서”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적어도 이 장면은 영화적으로 꿈인지 아닌지 결론 내릴 근거가 없다. 전화를 끊고 그가 다시 잠든 장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꿈이라고 말하여 꿈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밖에 꿈이나 환상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더라도 정녕 꿈이나 환상이었던 장면이 과연 없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찾아온 이 복병이 앞장면들의 팩트를 뒤흔든다. 그러니까 오해가 있어서는 안되는데, 팩트를 뒤집는 것이 아니다. 뒤집히면 반전이라는 명료함이 형성된다. 여전히 팩트는 팩트인데 팩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추가된다고 표현해야 옳다. 솔직히 고백하면 프레디의 꿈장면이 등장하기 이전부터도 이미 다음과 같은 느낌들 때문에 많이 난감했다. 이건 정말 현실에서 벌어진 일인가, 하는. 가령 랭카스터의 딸 엘리자베스는 프레디의 허벅지에 정말 손을 얹은 것일까(심지어 엘리자베스는 프레디가 도리어 자신을 유혹했다고 말하고 있다). 프레디는 도리스를 정말 찾아가긴 한 것일까. 아니 더 나아가 프레디에게 도리스라는 소녀가 있기는 했던 것일까. 그 어떤 확정적 표식도 없이 지나가고는 그것이 실은 꿈이었다고 말하는 이 영화에서 우린 어떤 장면이 꿈이고 현실이고 또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시 이와 같은 방식은 이 영화가 시간을 현세에 국한시키지 않고 전생에서 지금으로 흐르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려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여하튼 보는 내내 잠정적이고 유보적인 인상을 받았던 건 프레디가 말한 그 꿈의 논리가 영화 전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인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빤히 목격했지만 불가사의한 감정만 안은 채 해명은 뒤로 미뤄야 하는 부정교합의 현장도 있다. 말하자면 이 계와 저 계가 아귀가 맞지 않는 방식으로 방문하고 내통하는 순간을 엄연히 포착했는데도 그 아귀가 맞지 않는 이유로 실은 해명이 불가능한 장면이다. 일부러 대강 말하고 지나간, 랭카스터가 교인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고 그 사이에 프레디가 환시를 겪는 그 장면이다. 우선은 여기 노래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나치기 쉽지만 랭카스터의 노래(혹은 도리스의 노래)는 <마스터>에서 강력한 최면의 효과 또는 환상의 힘을 지녔다. 노래가 등장하는 순간 특별한 시각적 환상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 노래의 힘으로써 하나의 환상적 껍질이 씌워진다. 게다가 이 장면은 그걸 훨씬 뛰어 넘는 복잡한 환상 작용이 일어난다.

연설이 끝나고 랭카스터가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노래의 내용은 결혼식 장면에서 했던 용에 관한 이야기만큼이나 이상하다. “금발머리 예쁜이에게 휘둘리지 말자” 정도가 이 음탕한 노래의 전언이다. 그런데 프레디가 방금 금발머리 예쁜이(엘리자베스)에게 휘둘린 직후여서 랭카스터의 그 노래를 들으며 우린 당연히도 프레디의 앞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랭카스터는 프레디의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연인가. 이것은 메시지인가. 이내 프레디의 환시가 시작되면 남자들은 그대로이고 여인들만 모조리 나체가 되어 있다. 랭카스터의 노래는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노래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랭카스터는 프레디쪽을 바라보며 코와 귀를 손으로 비빈다. 그는 프레디를 처음 만났을 때 뭐라 했던가. 자네의 독주가 마시고 싶으면 코와 귀를 손으로 부비겠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는 지금 프레디의 환시, 그렇다면 이 순간은 프레디가 랭카스터의 그런 행동을 환시로 겪고 있는 것인가, 프레디의 환시 안으로 실제의 랭카스터가 들어와 정말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인가.

물론 랭카스터는 남의 꿈에도 들어가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더 괴이한 일은 그다음이다. 랭카스터가 코와 귀를 비비는 행동이 끝나기 무섭게 카메라는 오른쪽으로 초점을 옮겨 저 멀리 앉아 있는 페기에게 맞춘다. 그때에 페기는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랭카스터가 아니라) 프레디의 시선을 정면으로 쏘아본다. 페기도 벌고 벗고 있으니 그녀도 프레디의 환시 안의 대상물에 불과한데 그러나 저 응시, 랭카스터가 프레디에게 신호를 보낸 직후 프레디를 보는 질책하는 것 같은 응시, 그것도 프레디의 환시 안의 영역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 것인가. 프레디의 환시 속에 페기의 단순 응시가 있는 것이라고 확언하기 어렵다. 마치 페기가 프레디의 환시 전체를 그의 환시 안에서 질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더 맞겠다. 이 기괴함을 더이상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해명이 불가능한 순간들이 이 영화에는 도처에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장면은 가장 과격하다. 영화의 불가사의함은 본래부터 언어적 해명의 논리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어서 이 장면을 이렇게 최대한 자세히 묘사하는 것만이 지금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고백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렇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와서 부정교합의 장면들까지 통과하고 보니 적어도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게 됐다. 기원과 연대기가 부재한 한 사내의 기형적 신체, 데칼코마니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비대칭인 두개의 복잡하게 숨겨진 관계망, 그것들이 이 부정교합의 형식들과 묶여 있는 상태의 영화가 바로 <마스터>다. 그러니 합리, 논리, 순차, 정형, 대칭, 정합 등은 주인공의 신체에서도 관계에서도 형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그런 것들은 <마스터>라는 세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개념들이다. 그렇게 <마스터>는 기형이고 울퉁불퉁하고 어긋나고 찌그러져 있는 애매한 덩어리다. <마스터>는 비정상이다.

정신현상의 왜상이 되고자 한 영화

유년 시절에 친구에게서 들었고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실없는 농담 하나가 있다. 정신병원의 복도에서 두 환자가 마주쳤다. 한 사람은 낚싯대를 메고 있다. 낚싯대가 없는 사람이 묻는다. “자네, 낚시 하러 가나?” 대답. “아니, 나 낚시하러 가네.” 그러면 다시 응답. “아, 난 또 낚시하러 가는 줄 알고.” 이 농담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머리에 남아 있는 건 전적으로 외우기 쉽게 반복되는 그 운율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문득 <마스터>를 보고 나서 이 유년의 재미없는 농담이 떠올랐다. 그런데 <마스터>를 생각하고 난 뒤에는 이 농담이 그다지 웃기지 않고 조금 꺼림칙하다. 그 낚시란 무엇이었을까. 우리에겐 정의될 수 없고 소통될 수도 없으며 이야기될 수도 없는 그것이 그들 사이에서는 원활하게 교감되었던 것이라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우린 아마 잘 모르는 것이라 웃겼던 것일 텐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차라리 불길하다.

정신의 병을 정신병이라고 하고 그걸 앓고 있는 병자를 조금 험하게 들리지만 치장없이 불러 정신병자라고 할 때, 의학적 소견에 바탕하지 않은 채 그들의 영화적 존재론만으로 추론한 결과, <마스터>는 알려진 것처럼 한명의 정신병자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두명의 정신병자의 교감에 관한 영화다. 그들의 교감 어딘가에 해명이 불가능한 낚시라는 사건이 있을 것이다. 아니 그들의 교감 어딘가에 해명이 불가능한 ‘주인’이라는 사건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영화에서는 오가지 않았지만 우리가 임의로 만들어 상상해봄직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 영화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물음. “자네가 내 주인인가.” 대답. “아니, 내가 자네 주인이네.” 다시 응답. “난 또, 자네가 내 주인인 줄 알고.”

<마스터>는 프레디와 랭카스터라는 두 개의 작은 비정상이 이뤄낸 거대한 비정상이다. 다만 앤더슨은 그 비정상의 성질을 이야기로 설명하거나 명확하게 그려서 보여주려 들지는 않는다. 앤더슨은 그게 불가능하거나 성공한다 해도 미진할 거라고 판단한 것 같다. 우린 대신에 앤더슨이 영화 그 자체가 비정상이 되도록 했다고 말하고 싶다. 앤더슨은 <마스터>를 아예 그 비정상의 상으로 만들어 해석 불능의 지점에 가고 싶어 한 것 같다. 말하자면 비정상적 왜상이다.

왜상의 가장 유명한 예로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The Ambassadors)의 그 해골 이상이 없지만, 그 그림 속 찌그러진 해골은 실은 소통을 원하고 있고 오른쪽 상단이라는 특정한 자리에서 보면 제대로 된 형체에 가깝게 보이는 특정한 시점을 포괄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해석되기를 원하는 소극적인 왜상이다. <마스터>라는 왜상에는 그런 자리가 없다. 어디서 본다 해도 이 왜상의 ‘정상’을 보긴 어렵다. 어디서 어떻게 보아도 형체가 잡히지 않고 찌그러져 있다고 말한다면 그게 이 영화에 관한 가장 호의적인 평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마스터>는 고통받는 프레디의 심리, 내면의 고통 혹은 프레디와 랭카스터의 우정 또는 사랑 등에 관한 영화가 아닌 것 같다. 누군가 이 영화를 보며 슬프거나 고통스럽다기보다는 뭔가 막연하고 두렵고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린 그의 감상에 공감하고야 말 것이다. 우린 비정상이 진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야 할 것 같다. 왜상화법이라는 것도 진실이 무엇인지를 더 극단적인 방식으로 일깨우기 위해 발명된 화법이 아니었던가.

랭카스터의 새로운 이론이 담긴 <쪼개진 칼>이 발표된 직후에 <쪼개진 칼>에 적힌 내용쯤은 전단지 서너장으로도 축약할 수 있다고 불평하는 한 남자를 건물 바깥으로 데려간 프레디는 길가에서 사정없이 그의 따귀를 때린다. <마스터>를 본 다음 이 영화의 내용쯤은 종이 몇장으로 축약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는 이에게 당신은 프레디처럼 행동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 그의 말처럼 이 영화의 내용은 몇줄로도 축약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영화 <마스터>가 바로 <쪼개진 칼>이거나 그 한 챕터가 아니라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 것인가. 때때로 이 영화 자체가 랭카스터의 그 막연한 이론을 실제로 수행에 옮긴 결과물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도 그래서 무리는 아니다. 이제 우리는 <마스터>의 내용을 축약할 수 있다고 하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그래도 미스터리는 축약되지 않는다, 진짜 불길한 왜상은 어디서 어떻게 봐도 왜상일 수밖에 없다, 고 말해주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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