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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종종 감춰진 진실을 찾아 끝내 드러내곤 하지만, 누군가 감춘 적이 없는데도 알려지지 않은 현실을 성실히 전하기도 한다.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2019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바쿠라우>는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기생충>이 한국의 반지하 문화를 모르더라도 세계 관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오늘날의 현실이라면, <바쿠라우>는 브라질의 정치사회적 실상을 모를 경우 존 카펜터 혹은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영향을 받은 유혈 복수극으로만 보일 수 있다. 실태를 알고 보면 <바쿠라우>는 지금 거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야만의 현장이다. 중요한 점은, 이게 브라질 안에서만 끝나고 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브라질 동북부를 비추는 도입부에서 비포장길을 달리는 급수 트럭에 테레사(바바라 콜렌)가 타고 있다. 테레사는 백신 몇병을 구해 고향 마을 바쿠라우로 가는 길이다. 길에는 관을
'바쿠라우'가 브라질의 현실을 투영한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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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자마>를 처음 보았을 때 약간은 당혹스러웠다. 영화가 끝날 무렵 자마(다니엘 지메네스 카초)에게 가해지는 비쿠냐(마데우스 나츠테르가엘레) 무리의 느닷없는 처형. 이 장면의 서사도, 정서적인 흐름도 갑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영화를 거듭 보며 깨달았다. <자마>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음을.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서사도, 정서도, 다른 무엇도 아닌 감각이라는 것을. 이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건’이라기보다 ‘자연현상’에 가까워서, 머리로 이해하거나 납득하는 대신 순수하게 관찰하고 감각할 것을 요청해온다. 그것들을 따라가며 체험하는 것만이 영화에 제대로 접속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 <자마>가 소환해 일깨우려는 감각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스멀스멀 다가오는 미지의 무언가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자마가 이곳에서 힘과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가 원주민의 뺨을 때
'자마'가 소환해 일깨우려는 감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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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엔 감독의 <남색대문>(2002)은 정서적으로 한창 예민한 17살 세 청춘들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그것이 첫사랑이든 짝사랑이 됐든,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잘 담아낸 청춘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요즘 제철인 아오리 사과가 떠올랐다. 초록색을 띠고 있어 시각적으로 여름과 잘 어울리는 과일이지만 사각거리는 식감과 풋풋한 향기를 갖고 있어 과일의 단맛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익숙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아오리 사과처럼 <남색대문>이 다른 청춘영화와 달리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아직 설익은 풋풋한 사과처럼 서툴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청춘들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돋보이는 것은 여고생 멍커로우가 첫사랑의 감정을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 느끼면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키스하지 않아도 알고 있던 것
영화
20년 만에 개봉한 대만 청춘영화 '남색대문'이 감정을 보여주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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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 메네게티 감독의 <우리, 둘>은 니나(바르바라 수코바)와 마도(마틴 슈발리에)라는 두 인물을 단일한 존재로 상정한다. 이들이 함께일 때 비로소 성립된다면, 한쪽이 허물어질 때 다른 한쪽은 어떤 영향을 받는가. 영화는 이를 질문하는 과정에서 공간을 중요한 기제로 설정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두 인물이 한 아파트에서 좁은 복도를 사이로 맞은편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긴밀히 연관된다. 외견상 이들은 각자 독거노인이자 서로 막역한 이웃 사이쯤이지만, 실상 한 침대를 공유하는 레즈비언 커플이다.
요컨대 이들은 분리와 결합이 혼거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 점을 토대로 범박하게 축약한다면, <우리, 둘>은 정주와 탈주의 가능성을 모두 지닌 이중적 장소로서의 집을 탐구하는 영화다. 물론 이 점은 본편이 퀴어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힘이 실리는 모티프다. 퀴어에게 있어 스스로를 타인과 대면시킬 일차적인 방법으로 커밍아웃이 있다면, 이는 단어가 그대로 지시하듯
'우리, 둘'이 이동의 감각을 주요하게 다루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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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남측 차량에 탄 한신성(김윤석)의 표정을 창밖에서 건조하게 비추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화면이 어두워지더니 크레딧이 오른다. 여기서 끝났으면 하는 생각을 한 것은, '여기서 끝내지 못하는 영화'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 영화들은 이야기를 여기가 아닌 다른 곳까지 이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주인공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하자면 일상으로 돌아간 주인공의 다음 선택에 생긴 변화를 보여주는 에필로그로 끝을 낸다. 주로 편견으로 가득 찬 인물이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시대극의 경우에는 시계를 현재로 돌리기도 한다. 예로 <국제시장>은 황정민을, <택시운전사>는 송강호를 분장까지 시켜가며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모가디슈>의 ‘여기서 끝나는’ 엔딩과, 그렇지 않는 다른 엔딩을 두고 어떤 게 더 좋다, 나쁘다 섣불리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영화들에서
류승완 감독이 선택한 '모가디슈' 엔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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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두 번째 장편영화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일을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016년 첫 번째 장편 <로우>로 관객에게 자기 이름만큼은 확연히 각인시켰을 감독 줄리아 뒤쿠르노의 얘기다. 현재까지 언론을 통해 얼마간 알려진 수상작 <티탄>에 관한 정보는 어린 시절 사고로 머리에 티타늄을 심은 알레시아가 괴기한 욕망에 따른 기행을 벌이다 10년 전 실종된 아들을 찾는 뱅상과 만나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는 것 정도다.
이 짤막한 정보만으로도 <티탄>에서는 뒤쿠르노의 전작과 같이 신체에 대한 과도한 탐닉과 변형, 훼손, 성 집착, 피칠갑의 향연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 주인공이 자동차와 성적 관계를 맺고 임신을 하며 휘발유로 수유한다는 SF 장르의 면모도 엿볼 수 있다고 하니 그 기이함은 상상 이상일 것으로 판단되면서도, 전작 <로우>를 성장통에 관한 우화로 본 시선을 호기롭게 무력화는 데서 오는 통쾌함도 느낀다.
성장이
올해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티탄'을 기다리며 '로우'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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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영화들에 있는 두개의 심각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몇년 동안 떠들고 다녔는데, 지겹지만 이번에도 거기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이걸 빼먹으면 <블랙 위도우>라는 영화가 설명이 안된다. 하나는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멤버 구성이다. 이건 눈치 없이 시대를 따라잡지 못한 결과가 아니다. 마블 코믹북 유니버스에서 어벤져스가 이렇게 백인 남자로만 구성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건 심지어 마블의 기존 이미지와도 맞지 않는다. DC가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을 추구하는 회사라면 마블은 늘 격변하는 시대를 반영하는 회사로 알려졌다.
어벤져스가 얼마나 이상한 모양인지 알려면 역시 같은 회사에서 나왔고 코믹북에서는 같은 우주를 공유하며 심지어 몇년 일찍 나온 <엑스맨> 시리즈를 보면 된다. MCU를 만든 사람들은 그냥 눈치 없었던 게 아니었다. 이것은 의도적인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혐오 행위다. 이렇게 10년 가까이 단물을 빼먹고 절대로 당연시
'블랙 위도우'로 블랙 위도우를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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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이 영화를 보았다. 당시에는 벽화 속의 말 그림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진부한 욕망의 기표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보니 조금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시각화에 있어서는 여전히 아쉽지만 장점이 훨씬 더 많이 보인다. <죽어도 좋은 경험: 천사여 악녀가 되라>(이하 <죽어도 좋은 경험>) 는 김기영 필모그래피의 원형(archetype)이라 할 수 있는 <하녀> (1960)의 뒤를 잇는 작품으로, 물질의 화신인 남성 캐릭터의 세계로 그로테스크한 혼동의 여주인공이 침입하는 서사를 지녔다. 이른바 ‘악녀’와의 조우다. 하지만 <하녀>의 주인공이 ‘자본주의’라는 거대 유령과 싸웠던 것과 달리 이번 주인공은 처음부터 악이었거나 혹은 악의 영역으로 서서히 침범하는 다른 여성 캐릭터와 다투고 있다.
연출자 김기영의 단호한 목소리
김기영의 남성주인공은 아무리 권위 있는 자라 해도 결코 정신의 영역
'죽어도 좋은 경험: 천사여 악녀가 되라'에서 인간의 극단적인 열망이 드러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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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말을 하지만, 루카(제이콥 트렘블레이)만큼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소년은 바다에서는 초록색 생물이고, 육지에서는 인간이다. 그는 바다에 살면서 육지 위의 세계를 동경한다. 루카 안에는 여러 가지 정체성이 있고 그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자식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엄마에게, 오래 살며 여러 꼴을 목격했던 그녀에게 자식의 호기심은 공포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녀는 미지의 세계를 투박하고 자극적인 용어들로 환원해 자식의 호기심을 잠재우려 한다. 괴물. 위험. 우리를 죽이러 오는 자들. 그럼에도 어린 소년은 이세계(異世界)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을 감추지 못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낯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내면에 다양한 정체성을 품고 있고, 누군가는 당신의 여러 조각들 중 하나를 싫어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스스로를 적당히 감추고 사회에 녹아들기
'루카'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대면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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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신체의 감각을 차단하는 방식을 영화의 주된 설정으로 잡은 영화들이 있었다. <버드 박스>(2018)의 사람들은 미지의 존재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눈을 가린다. <런>(2020)에선 삐뚤어진 모정으로 인해 딸이 다리의 감각을 잃고 휠체어를 탄다. 눈과 다리를 쓸 수 없다는 것은 다름 아닌 이동 제한을 의미한다. 차단된 감각으로 인해 심해지는 답답함은 생존과 탈출에 대한 압력을 높이게 만든다. 영화는 종국에 주인공의 감각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버드 박스>에선 주인공이 어떤 장소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 안심하며 안대를 벗는다. 전보다 자유롭지만, 여전히 새장이다. <런>은 지팡이를 짚고 걷게 된 딸이 자신을 가뒀던 어머니가 있는 감옥에 면회를 가 복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이 감시를 받았다는 입장에서 시각을 오감 중 최종 심급으로 여기고 있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것은 곧 통제를
'콰이어트 플레이스2'가 공포를 구축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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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죽었다. 직업 군인 마르쿠스(매즈 미켈슨)는 훈련을 마치고 기지로 돌아온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군인의 표정과 걸음걸이만 보고도 그 사실을 직감한다. 이는 수년간 타지에서 가족과 떨어진 상태로 단체 생활을 했던 그가 보고 들은 수많은 사례를 통해 얻게 된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마르쿠스가 처음 겪는 일이다. 결과를 인정할 수 없는 마르쿠스는 영화 초반부 아내에게 ‘일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을 어기고 아내에게로 향하고, 그렇게 아내의 손을 만져보고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한 뒤에야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같은 이야기를 겪고 있는 두 번째 시선이 있다. 그 시선은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된다. 아빠와 통화하고 있는 엄마의 표정만 보고도 아빠가 집에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틸드(안드레아 하이크 가데버그)는 아빠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사고를 겪은 마틸드 역시 마르쿠스처럼 주어진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가 보여준 명확한 오프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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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길레스피의 <크루엘라>는 몇년 전 나온 <조커>와 습관적으로 비교되는데, 유명한 악역 캐릭터의 전사를 다룬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이 둘은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조커>를 보면, DC 캐릭터를 80년대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 보다 정확히 말해 <코미디의 왕>스러운 유사 리얼리즘의 렌즈를 통해 들여다본다는 착안이 독창적으로 여겨지지만, 이 캐릭터를 구성하는 재료는 이미 수많은 코믹북과 각색물을 통해 꾸준히 만들어졌다.
미래의 조커가 아서 플렉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우린 이 남자의 내면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택한 길은 조커를 통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지만(<다크 나이트>에서 크리스토퍼 놀런은 조커에게 어떤 사연도 주지 않는 보다 영리한 길을 택했다) 그래도 익숙한 캐릭터가 나오는 익숙한 길이다.
성장할 수 없는 주인공
<크루엘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다. 영국 작가 도
'크루엘라'를 <101마리 강아지>의 프리퀄이라 말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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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장커 감독은 전작 <산하고인>(2015)에서 멜로드라마 형식을 빌려 중국 인민들이 급격한 산업화를 겪으며 자본주의에 잠식되어가는 과정을 한 여성의 일생(1999년부터 2025년까지)을 통해 비판적으로 다뤘다. 이번 영화 <강호아녀>(2018)에서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아내이자 뮤즈인 자오타오를 내세워 현대 중국 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멜로드라마 형식에 더해 갱스터 또는 필름누아르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감독은 왜 다시 과거(2001년)에서 영화를 시작하는 것일까? 이는 <강호아녀>가 감독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로 만들어진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독의 전작들이 겹치기 때문이다. 특히 <임소요>(2001)와 <스틸 라이프>(2006)의 그림자를 지워버릴 수 없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비슷한 머리 모양과 의상을 입고 재등장한다.
장르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지아장커의 '강호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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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동안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왜 하필 그녀는 ‘국수’를 택했을까. 다른 식당에 갈 수도, 혹은 새로운 음식에 도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 영화에는 단 한 차례, 그녀의 국수 먹기가 주저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후반부에서 진아(공승연)는 툭 끊긴 국수 가락을 삼키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결말을 향한 도약을 진행한다. 가족의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았던 그녀가 작은 식당에서 무너지는 것이다. 관객은 이 지점에서 일상적 삶의 균형이 깨어진 것을 깨닫는다. 조금이라도 귀찮아질 여지가 있는 것은 모두 차단한 그녀였지만, 반복되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기면서 그간 이룩한 ‘혼자 살기의 법칙’은 뿌리까지 흔들린다.
내부의 평온함, 외부의 두려움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는 특이점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매일 걷는 복도의 끝에 위치한 그녀의 공간, 그녀가 머무는 방 안의 디자인이 특별하다. 의도적으로 거실을
<혼자 사는 사람들>이 ‘사랑’을 노출하지 않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