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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를 가운데 놓고 이제 양옆으로 푸른색을 띤 영화들이 있다. 그 영화들은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2017)와 <블루 아워>(2019)다. 3편의 영화들이 칠하는 푸른색의 농도는 짙게 시작하여 옅어진다. 영화가 그리는 그러데이션 속에 일본의 젊은이들이 서있다. 여기서 푸른색은 ‘새벽’이란 시간을 의미한다. 새벽은 미지의 가능성을 품은 시간이다. 언뜻 영화 속 청춘들은 이 시간대에 갇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들은 새벽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맞이한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의 마지막에서 주목할 것은 신지(이케마쓰 소스케)와 미카(이시바시 시즈카)의 얼굴 숏보다 하나의 대상을 함께 바라보는 시점숏이다. 프레임의 절반이 가려진 신지의 시점숏은 미카의 시점숏에서 개안한다. 이들이 바라보는 대상인 꽃은 전보다 클로즈업된다.새벽을 지나 핀 꽃은 신지가 말했던 ‘
‘힐링’이라는 단어에 다 담기지 않는 <블루 아워>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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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1944년에 출간된 책 <픽션들>에 수록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보르헤스는 가상의 인물 피에르 메나르가 어떻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다시 썼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농담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는, 피에르 메나르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일부분을 글자 그대로 똑같이 써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피에르 메나르의 텍스트는 단 한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 하지만 소설 속 화자는 세르반테스보다 300년 후의 프랑스인 피에르 메나르에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외국어’인 동시에 ‘고어체’여서 같은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동일한 텍스트라도 그 텍스트를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는 무엇이든 다 가능
'트랜짓'이 현재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과거의 사건을 진행시키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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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 카링 아이노스는 링컨센터에서 열린 시사회 관객과의 대화(GV)에서 <인비저블 라이프>를 “열대지방의(tropical) 멜로드라마”로 규정했다. 극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극적 서사 전개보다 캐릭터에 집중됐던 그의 전작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이 작품의 특징을 담아내기에 이 단어는 아주 적절해보인다. 브라질 밀림의 푸른 녹색과 인간의 정념을 상징하는 원색 계열의 강한 색감이 화면 전체에 일렁인다. 또 그는 평소 자신은 관객의 감정을 조작한다고 생각해 배경음악 사용을 극도로 꺼렸지만 이 작품에서만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고백했다. 현란한 라틴 선율의 클럽 음악과 주인공 에우리디스(카롤 두아르트)의 내면을 대변하는 강렬한 피아노 선율이 시종일관 귀를 울린다.
‘멜로드라마’는 ‘웨스턴’이나 ‘뮤지컬’과 달리, 소재나 형식의 공식화를 통해 유사한 플롯과 연출 기법을 재생산하는 시스템적인 장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극단
'인비저블 라이프', 멜로드라마가 눈물 대신 피와 땀을 선택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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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소녀>의 결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교 투수 구속 130km/h. 프로에 진출하기엔 아쉽고 포기하기엔 아깝다. 국내 유일의 여성 고교 야구선수 주수인(이주영)은 이처럼 설정부터 경계적 인물이다. <야구소녀>는 이로부터 주수인이 프로 2군에 들어가는 결말까지, 좁은 복도에 선 첫 시퀀스부터 널따란 프로구장 마운드를 딛는 엔딩에 이르기까지, 경계 위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나아가 경계 자체를 묻는다. 여성과 남성은 다른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가. 그 경계는 어디인가. 그걸 경계라고 부르는 일은 온당한가. “여자건 남자건 그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라는 대사처럼 이 영화는 적극적으로 성별 이분법을 벗어난다(10대 남자애들이 우글거리는 고교 야구부라 하기엔 극중 공간 배경의 수컷성 또한 의도적으로 배제돼 있다. 프로팀 구단주도 마초가 아니다). 여전히 ‘교사’와 ‘여교사’를 분리해 말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이 세상에서, <야구소녀>가 던지는
'야구소녀'가 던진 젠더 사회학적 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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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다. 그는 경찰이고 아내와 두 아들을 가족으로 둔 가장이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밤이 지나고 그의 삶이 뒤바뀐다. 이제 그는 초등학교 교사고 아내와 아들이 없는 미혼의 남자다. 남자는 자신을 전자의 인물로 기억하는데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를 후자의 인물로 여긴다. 남자의 설움은 그 간극에서 비롯된다. 영화가 절반쯤 진행됐을 때 등장하는 형구(조진웅)의 이같은 돌연한 ‘변신’은 영화를 전혀 다른 방향과 색채로 이끌어가며 관객을 혼돈 속으로 밀어넣는다. 이제 형구의 목표는, 그리고 영화의 관심사는 수혁(배수빈)과 이영(차수연) 부부의 사고사나 이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은밀한 비밀이 아니다. ‘왜’ 형구의 삶이 바뀌었는지 혹은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는지, 다.
경찰이었던 남자가 교사가 되어 끝나는
‘왜’ 혹은 ‘어떻게’에 대한 답을 고민하기 전에 ‘무엇’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은 두 가지 직업에 대한 것이었다. 경찰과
'사라진 시간' 속 형구의 삶은 왜 바뀌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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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이 화면 가득 차 있고, 소녀가 조심스레 프레임 안으로 걸어들어온다. 소녀는 좁다란 무언가의 위를 걷고 있는지 양팔을 들어 균형을 잡는데, 흡사 여린 날개를 펼쳐드는 작은 새의 몸짓처럼도 보인다. 아이는 이내 무언가를 보았는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다시 프레임 밖으로 유유히 걸어나간다. 그런데 아이는 어느 곳을 걷고 무엇을 본 것일까. 영화 오프닝부터, 맑고 강단 있어 보이는 이 작은 존재가 우리의 시선을 견인해가는 <나는보리>는 선한 품성을 지닌 영화다. 이야기는 가족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보리(김아송)와 그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영화엔 보리네 가족공동체를 뒤흔들 만큼 해악을 끼치는 인물도, 위협이 될 만한 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다.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를 구성했다는 김진유 감독은 애초부터 장애를 특별한 서사 장치로 이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장애를 영화적인 소재로 소비시켜선 안된다는 상식화된 신념을 실천할 수
농인과 청인의 다른 문화를 가로지르는 '나는보리'의 성취와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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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걷는 소년>의 기본 공간 배경은 제주도지만, 주인공인 김수(곽민규)를 중심에 놓고 좀더 세분화해서 살펴보면 크게 세개의 장소, 그러니까 인력사무소, 서핑클럽, 김수의 집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저 너머에 이상향처럼 엄마가 살고 있는 중국, 하이난이 (엽서처럼) 있다. 거친 단순화를 용서한다면 공간적 배경으로만 놓고 볼 때 <파도를 걷는 소년>은 김수가 이 세 장소를 번갈아 헤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이주노동자 2세인 김수의 세계엔 원래 두개의 장소밖에 없었다. 엄마가 하이난으로 떠난 후, (혹은 그전부터) 김수는 인력사무소에서 일을 받아 외국인들을 불법이주시키고 취업을 알선해주며 수수료를 받아왔다. 그러다 (자세한 이유는 영화 속에서 설명되진 않지만) 어떤 폭력사건에 휘말렸고, 얼마 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또 다른 장소인 그의 집은 미루어보건대 엄마와 함께 살던 곳인데, 엄마가 떠나간 후 간신히 잠만 자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아마도 그는 바로 이
'파도를 걷는 소년'을 보고 남은 의구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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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상에서 드라마 <부부의 세계>와 <인간수업>을 말할 때 자주 발견되는 표현은 ‘사이다 전개’ 그리고 ‘마라맛’이다. 마라맛은 강하고 자극적인 막장의 ‘매운맛’에서 진화해 어딘가 고급스럽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감상을 맛에 비유하기 시작한 것은 말초적인 자극에 익숙해진 요즘의 창작-소비의 형태를 표상한다. 하이라이트 구간을 인터넷 클립이나 밈으로 흡수하기 좋은 상황에서 화제성을 노리는 드라마들은 이 맛의 지표에 의거한 채 폭력과 가학에 둔감해지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의 하이퍼리얼리즘을 내건 두편의 드라마 <부부의 세계>와 <인간수업>을 보면서 캐릭터 재현과 폭력 묘사에 관한 오래된 질문을 다시 제기하고 싶어진 이유다. 여기에 한국 막장 드라마의 필수 요소처럼 여겨지는 것들-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적 부의 묘사, 여성을 향한 멸시 등이 버무려지면 사방에서 폭죽처럼 불편함이 터져나온다. 여기저기, 해로운 것을 장르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
'부부의 세계'와 '인간수업'이 재현하지 말았어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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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적인 것과 자연스러운 것은 다르다. 사실적인 것이 자연스럽게 되려면 편집이 필요하다. 박석영의 영화들은 사실적이지만 자연스럽지 않다. 예를 들어 <재꽃>(2016)에서 사기를 당한 명호(박명훈)는 분노에 가득 차서 철기(김태희)를 잡겠다고 쇠지레(빠루)를 들고 다닌다. 그런데 명호는 계단에서 쇠지레의 무게와 길이 때문에 쇠지레를 놓치고 쇠지레는 계단을 굴러가고, 명호는 떨어진 쇠지레를 줍는다. 쇠지레를 놓치고 허둥거리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며, 관객이 명호가 지금 느끼는 분노의 감정에 몰입할 수 없게 한다. 연출되지 않은 배우의사실적인 연기를 통해 관객이 영화와 거리두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관객은 명호의 사실적인 행동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우며 인위적인가를 느끼게 된다.
<재꽃>에는 자연과 인위의 대립이 있으며, 이는 수직과 수평이미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초원이나 강물과 같은 수평의이미지들 뒤로 풍경을 압도하는 송전탑이나 아파트와 같은 수직의 이미지가
'바람의 언덕', 박석영 감독의 전작 '스틸 플라워' '재꽃'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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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쇼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중반부엔 뜻밖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나’(에모토 다스쿠)와 사치코(이시바시 시즈카), 시즈오(소메타니 쇼타)가 청춘의 활기로 스크린을 감전시켜놓는 클럽 신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다. 세 인물은 밤이 되면 한데 모여 취하고 웃고 떠들며 가슴 벅찬 시간을 보내지만, 낮이 되면 각자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같은 서점에서 일하는 ‘나’와 사치코는 저마다의 노동을 한다. 실업 상태인 시즈오는 집안일을 하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실은 시즈오의 일상은 단편적으로만 비쳐지기에 우리로서는 그의 일상을 모두 직조해볼 수 없다. 서점에서 일하는 ‘나’와 시즈코의 일상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지만, 한낮에 시즈오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는 없다.
한낮의 시즈오는 어디에 찍힐지 모를 유동하는 점과 같다. 가령 그는 직선으로 뻗은 길 위에서조차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걸어간다. 특히 클럽 신 이후에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미야케 쇼가 담아낸 것과 그것을 위한 시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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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타이거 킹: 무법지대>(이하 <타이거 킹>)는 섬뜩한 정보에서 시작한다. 지구상에는 감금되어 사육되는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이 야생의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보다 많다. 미국에서만도 5천 마리에서 1만 마리 사이의 대형 고양잇과 동물들이 사육되고 있는데, 야생 상태의 동물들은 기껏해야 3천 마리가 조금 넘는다. 동물원이 이들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위험하고,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쓸모도 없는 동물들은 왜 감금되어 있는 걸까? 이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면 몇년의 시간을 투자해 탐구해볼 가치가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리고 그건 <타이거 킹>이 올바른 작품이었다면 갔어야 할 길이다.
유감스럽게도 시리즈는 그 길로 가지 않는다. 이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큐멘터리는 소재와 주제를 선택할 수 있지만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제할 수 없고, 종종 의도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이야기에 휩
'타이거 킹: 무법지대'의 관찰하는 카메라의 윤리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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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不義)한 세계에서 박해받는 영웅의 수난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근 ‘다큐-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다큐-드라마’라 함은 그의 근작들 대다수가 실화 사건에 토대하거나, 심지어 <15시 17분 파리행 열차>(2018)처럼 현실의 인물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스트우드가 그런 이야기의 기저에서 발견하는 것은, 공동체의 안위와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궁극적인 좌절 혹은 배반이라는 쓰라린 현실이다. 애틀랜타올림픽 캠페인이 한창이었던 1996년, 센테니얼 공원에서 파이프 폭탄이 담긴 배낭을 발견한 경비원의 실제 스토리에 기초한 <리차드 쥬얼>(2019)은 이런 경향의 연장에 있다. 공원 벤치 아래에서 의심스러운 배낭을 발견한 경비원 리차드 쥬얼(폴 월터 하우저)은 그가 배운 매뉴얼대로 상황을 통제하여 수백명의 목숨을 구한다. 호사가들의 이야깃거리로 구미를 당기는 리차드의 무용담은 TV토크쇼의
<리차드 쥬얼>에서 ‘이스트우드 페르소나’가 초(超)자연적 신화의 힘으로 작동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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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오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이장>을 보기 전에 우연히 포스터를 먼저 보게 됐다.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하다”라는 타이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세기말’이라는 단어를 접한 게 오랜만이라 그렇기도 했겠지만, ‘가부장제에 작별’이라는, 20자평에나 등장할 법한 이 단정적인 선언의 무게를 과연 영화가 얼마나 버텨낼 것인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포스터의 저 문구가 일종의 ‘선언’이었다면 영화는 그 선언에 대한 하나의 ‘행동강령’ 처럼,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진행된다. 여기서 방점은 그 강박적인 ‘오차 없음’ 에 있다.
다섯개의 사연에 너무 짧았던 1박2일
이 ‘강박’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마 이 장면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모인 오남매와 큰아버지 내외는 이장 전 마지막 제사를 준비한다. 이장 후 동생의 묘를 제대로 쓰지 않고 화장한다는 결정을 한 조카딸들에게 잔뜩
어느 한 인물도 충분히 말하지 못한 '이장'의 안타까운 무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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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하우스>의 감독 로버트 에거스의 전작 <더 위치>(2015)는 전세계 호러 팬들에게 극찬을 받은 영화다. 고립된 한 가족의 공포를 다루고 있지만 정작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무섭게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의 공포는 죽음보다 무서운 것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고, 그 설명할 수 없음이 무서운 공기를 만들어낸다. 이 영화가 무섭다면 어떤 사건이나 존재 때문이 아니라 무서워하는 자들이 내뿜는 공기가 무서운 것이며, 그렇기에 무서워하는 자들은 다시 무서운 자들이 된다. <라이트하우스>도 <더 위치>처럼 고립된 공간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4주간 섬에서 등대지기를 하는 토마스(윌럼 더포)와 그의 조수 에프라임(로버트 패틴슨)이 고립된 생활을 하는 동안 점점 더 광기에 사로잡힌다는 이야기이며, 고립과 광기라는 점에서 <더 위치>와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더 위치>와는 근본적으로 이야기의 결이 다르다. <더
'라이트하우스'의 흑백이 의미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