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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이 창궐한 시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집과 근무지 사이만 맴도는 생활을 하다 보니 변화라는 건 당최 감지할 수가 없다. 영화만이 변화를 인지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도 그 통로의 갈래 중 하나였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변하는 것들을 문득 떠올리게 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덕수궁 돌담길 같은 것이다. 돌담길 곁을 수없이 지나는 동안 어린아이는 키가 좀더 자랐고, 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여러 차례 바뀌고, 청년은 노인이 되고,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다시 돌아왔다. 변하는 것들은 박형서 작가의 산문집 제목 <뺨에 묻은 보석>의 보석처럼 여느 때는 알지 못하다가 덕수궁 돌담처럼 변하지 않고 계속 버티고 서 있는 존재를 의식할 때 뺨을 한번 훑어보면 언제 어디서 흘렸는지 없어져 있다. 공연히 애꿎은 빈 볼만 매만질 때 느끼는 감정은 기쁨이나 환희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회한, 그리움, 씁쓸함에 더 가깝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이별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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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산골영화제는 2019년부터 상영작에 대한 비평적 지지를 통해 영화제의 생산적 역할을 강화하고, 영화비평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비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영화평론가상"을 신설했다.
2021년 제9회 무주산골영화제의 세 번째 영화평론가상 수상의 기쁨은 이동우 감독의 <셀프-포트레이트 2020>에게 돌아갔다.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남다은, 이나라, 이도훈 평론가는 영화제 이후 수상작을 포함하여 이란희 감독의 <휴가>와 권민표, 서한솔 감독의 <종착역>에 대한 비평을 각각 작성했다.
씨네21는 무주산골영화제가 보내온 영화평론가상의 결과물인 3편의 비평을 소개한다. 동시대 한국영화를 대표할 만한 3편의 영화를 깊이 들여다보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2021년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으로 이동우의 <셀프-포트레이트 2020>이 선정되었다. 심사과정에서 이 영화와 함께 최종까지 언급된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남다은 평론가의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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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산골영화제는 2019년부터 상영작에 대한 비평적 지지를 통해 영화제의 생산적 역할을 강화하고, 영화비평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비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영화평론가상"을 신설했다.
2021년 제9회 무주산골영화제의 세 번째 영화평론가상 수상의 기쁨은 이동우 감독의 <셀프-포트레이트 2020>에게 돌아갔다.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남다은, 이나라, 이도훈 평론가는 영화제 이후 수상작을 포함하여 이란희 감독의 <휴가>와 권민표, 서한솔 감독의 <종착역>에 대한 비평을 각각 작성했다.
씨네21는 무주산골영화제가 보내온 영화평론가상의 결과물인 3편의 비평을 소개한다. 동시대 한국영화를 대표할 만한 3편의 영화를 깊이 들여다보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프롤로그
어떤 영화들은 우리의 시선에 사라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남긴다. 이동우의 영화가 그렇다. 펑크밴드 스컴레이드의 멤버이기도 한 이동우의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셀프-포트레이트 2020> : 불타는 우정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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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착역>의 초반부는 전학생 시연(설시연)이 사진 동아리 ‘빛나리’ 부원인 세 친구 틈으로 합류하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시연이 동아리실로 들어서고, 화면의 왼편에서는 눈에 처음 렌즈를 끼느라 긴장한 송희(한송희)와 렌즈를 직접 끼워주는 연우(배연우), 그리고 그들 사이에 서서 상황을 중계하는 소정(박소정)이 있다. 렌즈가 떨어져 세 친구가 교실 바닥을 헤매자, 멀찍이 자리에 앉아 있던 시연이 그들쪽으로 다가가 휴대폰으로 빛을 더해준다. 덕분에 렌즈를 찾은 이들은 하던 일에 마저 돌입하고, 소정이 시연의 옆자리에 (그러나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으면서 한 프레임 내에 네 친구의 형상이 나란히 이어진다. 시연이 세 친구의 자리에 완만하게 입장하는 이 장면은 이들이 넷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이 거리 조절이라는 일상적인 방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증한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끼는 행위는 사춘기 여중생들이 미용에 갖는 관심을 드러내는 익숙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
'종착역'이 네명의 주인공을 담아내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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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넷플릭스는 극장과 대결한 적이 없었다. 심심한 저녁에 넷플릭스를 보는 관객의 기대와 극장을 찾아가는 관객의 기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넷플릭스 드라마의 흥행 요소는 영화보다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그것과 유사하다. 텔레비전 드라마의 강점은 많은 집중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것은 비교적 예측 가능한 서사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는 <오징어 게임>이 가진 장점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반복되는 기시감과 클리셰들은 텔레비전 드라마로서 크게 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징어 게임>은 단순한 서사와 눈을 끄는 미장센, 끝내 다음 화를 보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이유에서 이 드라마에 팝콘 무비 이상의 의미를 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오징어 게임>의 장르적 단순함을 지적하고 싶다. <오징어 게임>은 <도박묵시록 카이지>나 <라이어 게임>과는 결이 다르다. <오징어 게임&g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 '인간수업' 때처럼 회피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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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산골영화제는 2019년부터 상영작에 대한 비평적 지지를 통해 영화제의 생산적 역할을 강화하고, 영화비평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비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영화평론가상"을 신설했다.
2021년 제9회 무주산골영화제의 세 번째 영화평론가상 수상의 기쁨은 이동우 감독의 <셀프-포트레이트 2020>에게 돌아갔다.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남다은, 이나라, 이도훈 평론가는 영화제 이후 수상작을 포함하여 이란희 감독의 <휴가>와 권민표, 서한솔 감독의 <종착역>에 대한 비평을 각각 작성했다.
씨네21는 무주산골영화제가 보내온 영화평론가상의 결과물인 3편의 비평을 소개한다. 동시대 한국영화를 대표할 만한 3편의 영화를 깊이 들여다보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한 편의 작품을 해석하기 위해 동원되는 용어들이 도리어 낭패를 부르는 경우가 있다. 권민표, 서한솔 감독이 공동 연출한 <종착역>이 그렇다. 이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이도훈 평론가의 <종착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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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하 <샹치>)에서는 샹치(시무 리우)와 케이티(아콰피나)가 친구들 앞에서 지난 일을 얘기하는 장면이 두번 나온다. 한번은 영화 초반 샹치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 샹치와 케이티의 학창 시절을 말하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말미 샹치와 케이티가 영화를 관통하면서 겪은 무용담을 말하는 장면이다. 흔한 수미상관의 형식인데, 두 장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앞선 대화의 내용은 오로지 샹치와 케이티의 말로만 전해지지만 두 번째 대화의 내용은 관객도 같이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두 번째 대화에 이르기 전까지 모든 장면을 하나의 긴 플래시백으로 볼 여지도 있다.
이 판단은 <샹치>가 많은 플래시백을 품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 영화는 나아갈 만하면 한번씩 뒤를 돌아본다. 자주 뒤돌아보다 보니 샹치와 케이티가 친구들 앞에서 무용담을 얘기하는 장면이 지나갈 찰나 방금 전까지 보았던 것도 모두 플래시백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의 플래시백이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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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병영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들을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D.P.>가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까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세대를 불문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모양새다. 최근 공군과 해군에서 연이어 성범죄 피해자들이 극단적 선택을 함에 따라 국민적 공분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에서 드라마가 출시되었다는 점, 더불어 사실에 기반을 둔 김보통 작가의 탄탄한 시나리오가 큰 반향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탈영병 잡는 군무 이탈 체포조 안준호 이병 역을 맡은 배우 정해인의 연기 변신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가 전작 멜로드라마에서 보여주었던 달달한 연기와 다소 거리가 있는 무거운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는 세평이 있다. 그런데 사실 정해인은 이미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통해 군인 연기를 선보인 적 있다. 군대 내 인권침해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징역살이를 하는 유정우 대위 역을 잘 소화했다는 점에서 안준호 이병 역도 잘 소화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촬영이 시작될 무렵,
'D.P.'를 보며 군대가 좋아졌다는 착시에 대해 거듭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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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P.>가 재미있게 잘 만들어진 드라마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군 내부에 고착화된 부조리를 성공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D.P.>의 장점은 명확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군 내부폭력에 대한 신랄한 고발을 통해 공감과 호응을 일으킨다는 것. 여기에 버디물과 형사물을 섞어놓은 D.P.요원 안준호(정해인)과 한호열(구교환)의 활약상이 보는 재미를 더한다.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다양한 군인 캐릭터, 군대 내 참으로 다채롭게 서식 중인 빌런들을 통해 끊임없는 잔재미를 선사하는 것도 즐거움의 요소 중 하나다. 한편 일부에서 제기되는 아쉬움들은 대부분 동전의 앞뒷면마냥 장점과 연결된다. 우선 군대 내 폭력을 전시하듯 반복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D.P.>에는 폭력적인 상황 그 자체를 전시, 과시하는 것 같은 태도가 깔려 있다.
이렇게 재미있어도 괜찮은가
'D.P.'가 너무 많이 보여주는 것과 끝내 드러내지 못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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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종종 감춰진 진실을 찾아 끝내 드러내곤 하지만, 누군가 감춘 적이 없는데도 알려지지 않은 현실을 성실히 전하기도 한다.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2019년 칸국제영화제에서 <바쿠라우>는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기생충>이 한국의 반지하 문화를 모르더라도 세계 관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오늘날의 현실이라면, <바쿠라우>는 브라질의 정치사회적 실상을 모를 경우 존 카펜터 혹은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영향을 받은 유혈 복수극으로만 보일 수 있다. 실태를 알고 보면 <바쿠라우>는 지금 거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담한 야만의 현장이다. 중요한 점은, 이게 브라질 안에서만 끝나고 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브라질 동북부를 비추는 도입부에서 비포장길을 달리는 급수 트럭에 테레사(바바라 콜렌)가 타고 있다. 테레사는 백신 몇병을 구해 고향 마을 바쿠라우로 가는 길이다. 길에는 관을
'바쿠라우'가 브라질의 현실을 투영한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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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자마>를 처음 보았을 때 약간은 당혹스러웠다. 영화가 끝날 무렵 자마(다니엘 지메네스 카초)에게 가해지는 비쿠냐(마데우스 나츠테르가엘레) 무리의 느닷없는 처형. 이 장면의 서사도, 정서적인 흐름도 갑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영화를 거듭 보며 깨달았다. <자마>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음을.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서사도, 정서도, 다른 무엇도 아닌 감각이라는 것을. 이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건’이라기보다 ‘자연현상’에 가까워서, 머리로 이해하거나 납득하는 대신 순수하게 관찰하고 감각할 것을 요청해온다. 그것들을 따라가며 체험하는 것만이 영화에 제대로 접속하는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 <자마>가 소환해 일깨우려는 감각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스멀스멀 다가오는 미지의 무언가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자마가 이곳에서 힘과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가 원주민의 뺨을 때
'자마'가 소환해 일깨우려는 감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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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엔 감독의 <남색대문>(2002)은 정서적으로 한창 예민한 17살 세 청춘들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그것이 첫사랑이든 짝사랑이 됐든,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잘 담아낸 청춘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요즘 제철인 아오리 사과가 떠올랐다. 초록색을 띠고 있어 시각적으로 여름과 잘 어울리는 과일이지만 사각거리는 식감과 풋풋한 향기를 갖고 있어 과일의 단맛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익숙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아오리 사과처럼 <남색대문>이 다른 청춘영화와 달리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아직 설익은 풋풋한 사과처럼 서툴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청춘들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돋보이는 것은 여고생 멍커로우가 첫사랑의 감정을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 느끼면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키스하지 않아도 알고 있던 것
영화
20년 만에 개봉한 대만 청춘영화 '남색대문'이 감정을 보여주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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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 메네게티 감독의 <우리, 둘>은 니나(바르바라 수코바)와 마도(마틴 슈발리에)라는 두 인물을 단일한 존재로 상정한다. 이들이 함께일 때 비로소 성립된다면, 한쪽이 허물어질 때 다른 한쪽은 어떤 영향을 받는가. 영화는 이를 질문하는 과정에서 공간을 중요한 기제로 설정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두 인물이 한 아파트에서 좁은 복도를 사이로 맞은편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긴밀히 연관된다. 외견상 이들은 각자 독거노인이자 서로 막역한 이웃 사이쯤이지만, 실상 한 침대를 공유하는 레즈비언 커플이다.
요컨대 이들은 분리와 결합이 혼거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 점을 토대로 범박하게 축약한다면, <우리, 둘>은 정주와 탈주의 가능성을 모두 지닌 이중적 장소로서의 집을 탐구하는 영화다. 물론 이 점은 본편이 퀴어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힘이 실리는 모티프다. 퀴어에게 있어 스스로를 타인과 대면시킬 일차적인 방법으로 커밍아웃이 있다면, 이는 단어가 그대로 지시하듯
'우리, 둘'이 이동의 감각을 주요하게 다루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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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남측 차량에 탄 한신성(김윤석)의 표정을 창밖에서 건조하게 비추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화면이 어두워지더니 크레딧이 오른다. 여기서 끝났으면 하는 생각을 한 것은, '여기서 끝내지 못하는 영화'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 영화들은 이야기를 여기가 아닌 다른 곳까지 이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주인공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하자면 일상으로 돌아간 주인공의 다음 선택에 생긴 변화를 보여주는 에필로그로 끝을 낸다. 주로 편견으로 가득 찬 인물이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시대극의 경우에는 시계를 현재로 돌리기도 한다. 예로 <국제시장>은 황정민을, <택시운전사>는 송강호를 분장까지 시켜가며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모가디슈>의 ‘여기서 끝나는’ 엔딩과, 그렇지 않는 다른 엔딩을 두고 어떤 게 더 좋다, 나쁘다 섣불리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영화들에서
류승완 감독이 선택한 '모가디슈' 엔딩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