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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벤느망'의 몰입도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저항하고 싶은 이유는

스크린에 새겨진 육체의 고통

영화가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나 극장 출구를 향해 나가는 다른 관객들을 보면서 저이들은 어떻게 저런 힘이 남아 있나 싶었다. 그것이 질문의 시작이었다.

<레벤느망>을 처음 본 날 탈진하고야 말았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몸이 축나버린 느낌이 들었다. 한 인물이 겪는 육체적 경험을 스크린 밖에서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다니. 극장을 나온 이후로도 한참 동안 손끝이 떨렸고, 이 영화를 반복해 본다 해도 두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감각이 그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듯했다. 영화를 관람하던 어느 순간부터 주먹을 너무 꽉 쥐었던 탓일 테다. 언제부터 몸이 긴장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주인공 안(안나마리아 바르토로메이)이 임신 중단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뜨개질 바늘을 몸 안으로 넣으려는 때, 객석의 여기저기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올 때, 나 또한 꼭 쥐고 있었던 주먹을 요란스럽게 떨며 안의 육체가 전하는 전압을 견뎌보려 했으니 말이다.

단어와 감정의 육체화

<레벤느망>은 1963년 프랑스 앙굴렘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안의 생기로운 일상들로 순조롭게 시작하지만, 그 일상의 풍경들이 예사롭지는 않다. 1:37:1 비율의 좁은 화면 안에는 주인공 안을 비롯한 동료 문학도들의 성적 욕망과 이를 금기시하는 시대적 분위기, 학문을 향한 열정과 낙제에 대한 불안,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의 계급 차가 밀도 있게 들어차고,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관능적인 기운이 넘쳐흐른다. 그래서 이상한 긴장감마저 감도는데 그것은 기우가 아니었던 듯하다. 주인공 안의 현실은, 생리혈이 묻어나지 않은 속옷을 확인한 후 노트에 적는 “4월29일 없음. 오늘도 또”라는 메모와 함께 임신한 그녀의 몸 안으로 함몰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녀의 시간은 제대로 흘러가지 못한다. ‘3주차’, ‘7주차’, ‘9주차’, ‘12주차’라는 자막과 함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억눌리고, 중절 수술이 불법이었던 시대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영화는 안의 이 혼란스러운 시간 속에서 임신 중단을 선택한 그녀의 절박한 몸짓과 시선에 온전히 몰입한다. 아니, 몰입이라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오로지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방식이 영화의 유일한 규율인 것처럼, 카메라는 안의 신체와 그녀의 시선이 미치는 반경을 결코 넘어서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몸에 대한 주권조차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안의 생생한 불안과 필사적인 투쟁을 모조리 담아낸다.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유리된 현재의 불안과 학업을 중단해야 할지도 모르는 미래의 위협 속에서 안의 얼굴 위로 표출되는 감정의 민낯을 비출 뿐 아니라, 중압감에 시달리는 상태에서도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그녀의 본능과 죽음을 불사하며 불법 중절 수술을 받는 과정까지 그녀가 시도하는 위험천만한 행위들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데에도 망설이지 않는다.

요컨대 이 영화의 원작인 <사건>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니 에르노가 “삶과 죽음, 시간, 도덕과 금기, 법을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경험, 육체를 통해 극과 극을 오간 경험으로 여겼던 사건을 단어들로 표현한 일을 끝냈다”라고 말한 바처럼, 오드리 디완 감독은 영화에서 아니 에르노가 표현한 ‘단어들’을 다시 ‘육체’로 강렬하게 재현하며 <레벤느망>을 무서울 정도로 투명한 영화로 만들어낸다. 아마도 안의 선택과 감정들, 그녀가 처한 혹독한 현실을 그녀의 육체로 관통해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집념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닌 투명성은 어딘가 위험해 보인다. 완강한 태도로 우리의 시선을 재현된 이미지에 결속시키며, 주인공 안의 상태를 낱낱이 체험하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적극적인 유도가 이 영화의 진정한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욕망과 자유, 자신의 몸에 대한 주도권을 지키려는 여성의 의지를 우회 없이 표현하되, 동시에 안의 몸과 제스처, 표정으로 촉각적인 감흥을 안기는 이 영화의 몰입도에 찬사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레벤느망>을 온전히 껴안을 수가 없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에 저항하고 싶다는 충동마저 느낀다. 물론 그런 충동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이는 것도 아니며 그 이유가, 이 영화가 낙태를 옹호한다거나 중절에 대한 안의 죄책감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의 편협한 의견에 동의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일말의 인간성만 있다면, 누구라도 제 몸에 잉태한 생명을 작은 한점 따위로 치부할 수는 없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뱃속에서 형태를 갖춰가는 태아의 상태를 가볍게 여길 수는 없는 법이다.

견고한 프레이밍이 지닌 이중적인 힘

이를테면 우리는, 안이 불법 중절 수술을 받고 태아를 몸 밖으로 보내는 순간 차마 자신의 손으로 탯줄을 자르지 못하는 그녀를 지켜보면서 그녀의 선택을 섣불리 재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이 영화에 대한 저항감은 영화의 서사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이 영화의 진정한 강점이라 할 수 있는 견고한 프레이밍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 영화의 프레이밍은 이중적인 힘을 지니고있다. 하나는 주인공 안의 모든 몸의 활동을 투명하게 비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레임 안에 우리 시선의 활동을 철저히 가두는 것이다. 말하자면 강고한 태도와 사나운 기세로 우리의 시선과 온몸의 감각을 프레임 안에 머물게 하며 주인공 안의 현실을 우리의 체험으로 확산시켜나가는 이 영화의 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사실 또한 있다. 그것이 이중적인 힘이든, 동전의 양면이든, 이 영화의 본질적인 힘이든, 관객에게 한 인물의 경험을 체험하게 만들 수 있는 궁극적인 힘의 원천은 배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우선은 안을 연기한 안나마리아 바르토로메이의 탁월한 연기력이 이 영화에 공헌한 바를 말해야 할 테지만, 그녀의 연기력은 이미 많이 거론되었으니 우리는 다른 두 배우에게 주목해보아도 좋을 것 같다. 한명은 안의 엄마를 연기한 상드린 보네르이고 다른 이는 안의 주치의를 연기한 파브리지오 롱기온이다. 사실 두 배우는 너무나 유명하고 연기에 대해서라면 덧붙일 말이 더더욱 없는 배우들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존재만으로도 상기시키는 영화들이 있기에 첨언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오드리 디완은 안나마리아 바르토로메이가 역할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레벤느망>과 비슷한 형식의 몇몇 작품들을 보길 추천했고, 그중에는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1999)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알다시피 파브리지오 롱기온은 다르덴 형제의 거의 모든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이며, <로제타>에서는 선택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을 맡았었다. 상드린 보네르는 아녜스 바르다의 <방랑자>(1985)에서 세상 모든 체제에 저항해 홀로 거닐고 죽어가며 스크린에 육체성을 새긴 모나를 연기했다. 두 배우가 연기했던 캐릭터들은 <레벤느망>의 안과 다시 만난다. 한명은 선택의 화두로 다른 이는 거울상으로. 나는 어쩌면 내 시선이 잡아먹히는 고된 여정 안에서도, 지극히 개인적인 인상일지라도 이런 만남의 순간이 있었기에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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