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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뚝딱거리는 신체들의 낮과 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의 주인공 영태(박송열)와 정희(원향라)는 30대 부부로 현재 일정한 직업이 없다. 영태는 영상작업자, 정희는 초등학교 특활교사지만 경력을 살려 일하기가 쉽지 않다. 생활을 유지하느라 둘은 공사장, 택배, 대리운전, 마트, 식당 등 가리지 않고 ‘알바’를 해왔다. 육체적으로 지옥을 맛보거나 심리적으로 자존감이 무너지는 일들이었다. 게다가 영태는 오토바이 배달을 하다 다리를 다쳐 이제 막 회복된 참이다. 영화의 오프닝부터 대화의 내용은 암담하다. 부부는 좁은 부엌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집주인이 재계약 때 전셋값을 올릴까봐 걱정한다. 경제적 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급기야 정희는 사채를 쓰고 영태는 믿었던 선배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넘지 말자 했던 ‘선’들을 넘게 된다.

부부의 상황만 놓고 보면 빈곤의 우울과 그에 대응된 폭력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영화는 코믹한 톤과 거리를 둔 차분함을 결코 잃지 않는다. 여러 상황이 악화일로를 걷는 가운데서도 둘 모두 주변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를 잃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영태는 경제적 곤궁과 불안정 속에서도 사람들 사이에서 교류하며 살아야지 고립되면 안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빌린 카메라를 돌려주지 않는 선배가 자신의 전화를 무시하는 것을 직접 목격할 때까지 그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장모님 생신 선물을 챙기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정희는 후배 미선이 급작스럽게 빌린 돈을 갚아달라고 하자 생활비로 아껴둔 현금을 바로 송금하고 일자리를 소개시켜준 그가 자신의 실수로 해를 입을까봐 노심초사한다. 둘은 당장의 자기 이익보다는 주변을 먼저 챙긴다. 그들에 따르면 사회는 상호의존으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삶의 질은 왜 중요한가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의 존엄과 돌봄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둘은 생활비가 모자라자 난방비를 아낄걸 그랬다고 후회하지만 곧 삶의 질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또한 집에 있던 위안화를 환전해 대출이자를 내고 남은 돈으로는 각자 먹고 싶었던 것들을 사먹으며 생존을 넘어서 최소한의 욕망을 실천한다. 둘은 무조건 착하거나 무른 이들이 아니다. 영태는 사업을 제안한 친구가 사실은 다단계 포섭이 목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불같이 화를 내고, 정희는 영태에게 회사 면접에서 그에게 잘 맞는 회사인지 꼼꼼하게 질문하라고 선택의 여지를 준다. 영태가 선배에게 자기 몰래 팔아버린 카메라 값인 300만원을 돌려받고도 정당한 것 같지 않아 100만원을 돌려주는 것 역시 자존감과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둘은 돈을 목적이 아닌 생활을 돌보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쪼들리는 상황에서도 돈에 자신들을 팔지 않는다. 자기 돌봄은 그들이 최소한의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돌려준다. 그 일을 할 때 감수하는 대가의 한계는 어디인가? 내가, 우리가 만들어놓은 한계선을 넘을 때 잃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과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 즉 돈으로 교환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도덕적 선을 넘어선 자기 돌봄의 역량은 타자 돌봄, 더 나아가 상호 돌봄까지 가능하게 한다.

미루어 짐작건대 이러한 태도는 둘의 대화 속에 잠깐 언급된 여러 ‘알바’들을 해보면서 터득한 것일 것이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특정 노동양식에 대한 영화다. ‘알바’, ‘파트타임’, ‘비정규직’, ‘프리랜서’라고 불리는 불안정한 노동계급, 즉 프리케리아트(precariat)로서 가족경제와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고, 노동은 신체에 어떠한 리듬을 부여하며, 도덕적인 것은 어떻게 형성되는지 등이 영태와 정희를 통해 질문되고 묘사된다. 가장 큰 특징은 기약 없는 기다림과 변덕스러움이다. 영태와 정희는 낡고 오래된 빌라이긴 하지만 전셋집을 보유하고 있으며 둘 다 고학력자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일정한 수입 없이 일거리가 들어오길 마냥 기다려야 하며 생활과 신체의 리듬을 외부 조건에 맞출 수밖에 없다. 정희는 강의계획서를 만들어 학교에 지원서를 보내보지만 회답이 올지, 온다면 언제 올지 모른다. 그래서 일상은 기다림의 시간이 된다. 영태는 대리운전을 하고 정희는 플랫폼 음식배달을 한다.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기다리며 그 시간 동안 생계를 위해 또 다른 비정기적인 일을 한다.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기다림, 현재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종류의 노동, 먹고 쉬는 일상의 시간들은 구분되지 않고 뒤섞인다. 박송열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변덕스러운 날씨에는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며 맞출 수밖에 없다. 날씨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거추장스럽게 겉옷이나 우산을 준비하고 다녀야 한다. 지속적인 외부의 간섭과 그에 바로 대처해야 하는 환경은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계획은 세우지 못한 채 걱정과 불안이 많은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정희가 미선이 소개시켜준 일회성 특활수업에 지각했던 것은 불안정한 노동의 리듬 때문이다. 정희는 갑자기 낯선 장소에서 낯선 담당교사 및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한다. 매번 새로운 상황을 익히고 적응해야 하는 삶이다. 오랜만에 하는 수업이었기에 정희는 잔뜩 긴장하고 그 때문에 장소를 착각하게 된다. 영화 초반, 둘의 삶은 늘 함께 밥을 먹고, 문제가 생기면 토론해 합의에 이르고, 동네 개천에 나가 산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영태가 밤에 대리운전을 하고 정희는 낮에 배달을 하면서 둘의 일상의 시간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각자 밥을 먹고, 각자 침대에 누워 한숨을 쉬고, 각자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공동체는 그렇게 서서히 무너진다. 프리케리아트의 일상의 리듬(앙리 르페브르가 <리듬분석>에서 말한 ‘시간-공간-에너지’의 변증법적 리듬)은 날씨에 그때그때 대응하는 삶을 살게 만든다. 물론 이 리듬에는 노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태와 정희는 ‘삶의 질’이라고 명명한 최소한의 자기 돌봄을 실천해야 삶을 지속할 수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빈곤의 수위가 올라가고 점점 선택의 여지없이 구석에 몰리면서 둘은 그 선의 붕괴를 체험한다. 그 선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그들의 생활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의 감독 박송열과 프로듀서인 원향라는 각각 영태와 정희를 연기한다. 뿐만 아니라 박송열 감독은 촬영, 조명, 사운드, 편집까지 맡았다. 박송열과 원향라는 부부로 제작비 1천만원으로 3개월간 촬영을 했다고 한다. 거의 가내수공업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기업의 투자는 물론이고 공공기관의 제작지원을 받지 않고 ‘알바’를 하며 오직 두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낸 이 영화의 제작양식은 영태와 정희의 삶과 닮아 있다. 이 영화는 ‘독립영화는 지금 시점에서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답을 보여준다. 박송열과 원향라의 제작양식은 독립영화란 무엇이며,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라는 계속 비겁하게 회피하게 되는 난해한 질문에 ‘이런 것도 가능하다’라는 하나의 선을 그려준다. 외부의 지원을 받지 않아 자유롭거나 초저예산의 미니멀한 방식으로 찍었기 때문에 ‘독립’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박송열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오히려 그 반대다. 완벽한 자유와 독립이란 허상이다. 지금 영향을 받고 있는 날씨, 즉 외부의 요인을 응시하고 경청하며 창의적으로 영화에 기입하는 것이야말로 ‘독립’의 방식이 될 수 있다. 하나의 노동으로서 말이다. 외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미니멀한 방식과 그 한계 내에서 최선의 창의적 양식을 찾아내는 노력은 자기 돌봄의 영화 제작으로 볼 수 있다.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모든 것을 가능케 한 부부 감독

여기서 일차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풍부한 사운드다. 음악이나 별도의 극적인 효과음이 없음에도 베란다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생활소음이나 개천가의 자연의 소리는 영화를 입체적으로 만든다. 박송열 감독은 다른 영화 현장에서 동시녹음기사로 일해 오면서 보유한 장비로 사운드를 풍부하게 채집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촬영과 편집이다. 직접 촬영을 맡은 박송열 감독은 자신이 출연하는 장면에서 실시간으로 오퍼레이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고정 앵글로 홀로 세워놓고 화면 내에 인물이 이동하고 멈추는 곳에 미리 초점을 맞춘 다음에 시간차를 두고 연기하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당연히 카메라는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고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개천가 공원에서 영태와 정희가 환전한 돈으로 대출이자를 갚고 셰이크를 사 마시는 장면을 보자. 두 사람 뒤로 저 멀리 산이 보이고 물줄기가 대각선으로 펼쳐져 있다. 이미 초점은 오른쪽 아래 구석에 위치한 잘 정돈된 바위에 맞춰져 있다. 이때 오른쪽에서 영태와 정희가 프레임에 들어오고 정확히 초점이 맞춰져 있는 바위 위에 앉는다. 이러한 촬영방식이 영화 내내 반복된다. 때로는 초점이 살짝 오락가락할 때도 있다. 이러한 방식은 이 영화의 제작환경, 즉 배우와 스탭을 모두 합쳐 둘밖에 없는 조건을 기입한다. 날씨가 사람에게 그렇듯 제작조건의 한계는 미학에 영향을 미친다. 자원이 없을수록 그 영향은 커진다. 여기서 두 창작자는 그 영향에 압도당하거나 종속되지 않고 자기 미학을 돌볼 수 있는 최소한의 선택의 여지를 만든다.

이러한 방식은 영화적이면서도 신체적인 리듬을 만들어낸다. 화면 밖에 있는 카메라, 카메라가 갖고 있는 자동 촬영과 포커스 기능, 네모난 프레임은 한계 내에서 고유의 존재감을 소리 높여 외친다. 이후에 연결될 인물 숏을 준비하기 위해 조금은 어색하게 바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설정 숏과 시간차를 두고 프레임에 진입하는 인물 사이에는 기다림 혹은 대기의 시간이 있다. 기다리는 행위자는 화면 내 개천과 바위와 풀들과 저 멀리 보이는 집들과 산, 그리고 카메라다.

관객은 카메라가 인간 없이 오퍼레이팅이 가능한 자동기계임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인물이 화면 내에 있는 채로 숏을 시작하기보다는 멜리에스나 포터 시대의 초기영화 기법처럼 화면 밖에 있다가 프레임 인 하는 것을 선호하는 양식은 프레임의 한계 혹은 역량을 물질화한다. 영태와 정희의 나눠찍기에서도 종종 이러한 방식이 사용된다. 어머니의 생신 선물을 챙기지 못한 것을 두고 말싸움을 하는 장면을 보자. 영태는 앞쪽에 정희는 뒤쪽에서 걷고 있다. 카메라는 수평 앵글로 고정되어 있다. 영태가 건축물의 담을 배경으로 빈 화면의 프레임에 들어오며 정확히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곳에 선다. 그는 프레임 밖을 향해 뒤를 돌아보고 정희에게 ‘선물을 미리 챙겨야 했다’고 잔소리를 한다. 영태가 프레임 아웃한 뒤 시간차를 두고 정희가 같은 화면에 프레임 인 한 뒤 “누가 먼저라고 할 건 없지”라고 말하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리고 정희도 프레임 아웃 한다. 미묘하게 시간차를 두고 프레임 인과 아웃이 이뤄지는 이 숏 구성과 편집 리듬 그리고 어색하게 멈춰서 대사를 치는 연기는 각 영화적 요소들의 물질성을 각인시키며 ‘배우/사람/화면 안’과 ‘카메라/기계/화면 밖’이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마가 뜨다’라는 말이 있다. 일본어에서 유래한 방송 은어로 대화 중에 정적이 흐르거나 오디오가 비며 말의 흐름이 끊어지는 상황을 뜻한다. 지금은 많이 쓰지 않지만 오래전 방송계에서 관용어로 종종 사용되어왔다. 기다림의 시간 속에 있는 프리케리아트의 일상이 그렇듯 이 영화는 ‘마가 뜨는’ 리듬, 즉 단속(斷續)의 리듬을 갖고 간다. 환경에 맞춰 접속되었다 끊어졌다 하는 삶, 그래서 늘 어색하고 긴장되고 잘 들어맞지 않으며 뚝딱거릴 수밖에 없는 신체들의 일상이 촬영과 편집의 리듬으로 물질화된다. 이러한 체제의 리듬은 시간, 공간, 연기하는 신체 모두의 심연에서 일관되게 생성된다. 그들의 일상의 시간은 점점 더 들어맞지 않고 일정한 규칙 없이 밤, 낮, 새벽을 오간다. 먹고 잠자는 시간도 일정치 않다. 대화와 만남 사이에는 ‘마’가 뜬다. 영화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가 삭제하길 원하는 이 ‘마’의 시간성을 물질화한다. 둘의 집은 먹고 자는 일상의 공간이고, 일을 기다리는 대기의 공간이며, 정희가 영어 공부를 하는 자기 계발의 공간이고, 사랑과 믿음의 공간이기도 하다(이 영화의 제작사 명칭은 ‘사랑하자’이다). 그리 넓지 않은 집에서 둘은 점차 각자의 시간 속에서 각자의 공간으로 나눠지게 된다. 그래서 둘이 방에서 나와 중간 지점에서 종종 명확한 의미 없이 스쳐지나가며 악수를 하는 장면들은 더없이 소중하다.

박송열과 원향라는 극적이고 자연스러운 연기가 아닌 어색하고 뚝딱거리는 연기를 수행한다. 지시하는 오퍼레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화면 안에 적절하게 들어오고 초점이 맞는 자리에 위치하기 위해 멈칫멈칫하는 둘의 신체적 움직임과 표정 그리고 대사들은 주어진 환경에 잘 들어맞지 않아 계속 부딪히고 넘어지며 부상을 당하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슬랩스틱 코미디는 종종 급변하는 노동양식에 들어맞지 않는 탈구된 몸들을 그려온 전통이 있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1936)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노동양식과 불화하는 몸짓을 만들어낸 것처럼, <우리 시대 미학의 범주>의 저자 시엔느 은가이가 미국 고전 시트콤 스타 루실 볼의 캐릭터를 중산층 여성의 가사노동 적응 실패로 그리고 <케이블 가이>(감독 벤 스틸러, 1996)의 짐 캐리를 신자유주의적 서비스 노동에 적응하지 못한 남성성의 징후로 분석한 것처럼, 또한 한국의 로맨틱 코미디 <결혼 이야기>(감독 김의석, 1992)와 할리우드의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감독 폴 피그, 2011)이 포스트페미니즘 시대 여성 노동 주체의 이중억압을 고통받는 신체극으로 풀어낸 것처럼 말이다. 이 슬랩스틱 코미디들은 모두 변화된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웃기고 슬픈 몸들을 전시한다.

이유 있는 뚝딱거림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어떤 것도 예측 불가능한 단속된 리듬 속에 놓인 프리케리아트의 신체성을 수행한다. 이 수행은 캐릭터와 제작방식 모두에 적용된다. 여기서 관여와 해석은 구분되지 않는다. 인간과 자동기계는 이곳저곳에서 연결되었다 분리되며 그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그 상호작용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자를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는 정희의 어머니 집까지 찾아온다. 그러나 심각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고 어머니가 문제를 해결한다. 영태는 빌려간 카메라를 몰래 팔아 돈을 챙긴 선배에게 300만원을 받았다 100만원을 돌려주지만, 그 밤에 소셜 미디어에서 선배가 새 차를 자랑하는 포스팅을 보게 된다. 선배뿐 아니라 도덕성을 유지하려 했던 스스로에 대한 신뢰마저도 무너진다. 연결된 정보와 끊어진 마음은 영태를 분노에 가득 차게 만든다. 영태는 집 안을 서성여보지만 분노는 가라앉지 않는다. 결국 영태는 한밤에 선배의 차를 찾아나서고 폭력의 선을 넘기 직전 그는 멈춰 서고 프레임 아웃된다. 영태와 정희는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선을 넘지만 파국으로 향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 선은 간당간당하고 언제까지 영태와 정희가 상호 돌봄 없이 자기를 돌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불안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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