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 등장하는 최악의 인간은 일단 두 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율리에(르나트 라인제브), 다른 하나는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다. 그러나 두 사람이 최악이 되는 사정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에이빈드의 경우, 그 사정은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에 꼭 들어맞아 보인다. 그는 파티에서 율리에를 마주치고, 사랑에 빠진다. 영화의 6장(‘핀마르크 고원’)에서 쓰인 3인칭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에 따르면, 에이빈드는 사랑에 빠진 것이 애인인 수니바(마리아 그라지아 디 메오)를 배신하는 일이지만, 그래서 자신이 최악의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르웨이어 원제인 <Verdens verste menneske>, 즉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을 뜻하는 이 말에는 사랑과 관련한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어쩌면 당연한 말일 테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의도한 최악의 인간은 다른 누구보다도 율리에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악의 인간이 된 이유
프롤로그에서 영화는 율리에의 ‘나쁜’ 선택들이 쌓여온 간략한 역사를 보여준다. 좋은 성적으로 의대에 진학했지만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더니 뒤이어 사진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하기까지, 그가 행한 선택들 자체가 이미 유난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들의 이유로부터 율리에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더욱 분명해진다. 그가 전공을 바꾼 이유는 의학을 공부하는 것이 자기답지 않다고 느껴서이고, 사진을 정식으로 배우면서 비로소 자신이 고향에 온 것 같다고 생각한다. 3인칭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전달되는 이 이야기는, 영화의 8장(‘율리에의 자아도취적 곡예’)에서 에이빈드에게 사랑이 아닌 고마움을 표현하는 율리에의 대사로부터 되울린다. “너랑 함께 있으면 완전한 내가 돼.” 에이빈드와 달리 무엇보다도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되기를 바라는 율리에에게 ‘사랑’은 부차적인 문제로 보인다. 그러므로 갈등의 순간에 그는 에이빈드에게 “너는 50살까지 커피나 나르고 싶겠지만 난 더 많은 걸 원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10장 ‘1인칭 단수’).
율리에는 이렇듯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최악의 인간이 되는 데 스스럼이 없다. 그가 악셀(앤더스 다니엘슨 라이)이 아닌 에이빈드를 선택한 이유 역시도 마찬가지다. 극적 서사로서 문제의 제시가 이루어지는 1장 ‘다른 사람들’에서부터 4장 ‘우리만의 가족’까지, 율리에와 악셀은 서로 다른 인생의 단계에서 만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 상황에 부딪힌다. 표면적으로는 아이를 가질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드러난 그 갈등에서, 악셀은 율리에와 함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를 희망한다. 율리에는, 악셀에 의하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여전히 무언가를 기다리고만 있다. 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악셀이다. 1장의 바닷가에서 율리에는 사진을 찍는다. 그의 옆에는 여자들이 선베드에 기대 앉아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있고, 다이빙대 위에서는 남자들과 아이들이 차례로 바다에 뛰어든다. 여기에서 율리에가 무엇을 찍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진이 찍힌 어느 장면에서도 그는 제외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율리에로부터 제시되는 이 제외의 감정은 1장 마지막과 2장 ‘바람피우기’의 시작 부분에서 고스란히 반복된다. 1장의 마지막에서 율리에는 밤사이 싸운 부부가 멀리 바닷가의 다이빙대 위에서 화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리고 발길을 돌려 별장쪽으로 향하자 이번에는 전면 유리창으로 들여다보이는 별장 안의 공간에서 아이들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악셀의 모습이 보인다. 율리에에게 악셀은 ‘다른 사람들’에 속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2장의 시작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악셀은 그의 출판기념회에 온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율리에는 그런 악셀을 멀리서 바라보며, 자신도 사진을 찍고 글을 쓰지만 직업을 물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서점 직원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악셀보다 먼저 그 자리를 빠져나온 율리에는 해가 지는 거리를 혼자서 걷는다.
하지만 그는 악셀의 생각처럼 그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율리에는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어느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뛰어들고, 그곳에서 에이빈드를 만난다. 그는 더이상 제외의 감정을 느끼게 만들지 않는, 게다가 자신을 ‘참아’주는 상대로서 율리에에게 고마운 사람이다(8장).
영화에 부여된 음악성과 시간성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율리에는 선택의 순간마다 도시와 도시의 하늘을 바라본다. 앞서 언급한 에이빈드를 만나기 직전의 해질 무렵, 그리고 도시 전체가 멈춰서고 에이빈드와 둘만의 시간이 흐른 뒤에 아침 해가 뜰 때, 다시 말해 악셀을 떠날 것을 선택했을 때, 마지막으로 악셀의 죽음이 닥쳐왔다는 사실을 인식한 채 밤거리를 헤매고 나서 다시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볼 때. 이때 율리에는 에이빈드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기로 마음먹는다. 이 세번의 순간, 세번의 이미지는 영화의 극적인 세 가지 국면, 문제의 제시, 전도, 파국의 순간에 구두점을 찍으면서, 동시에 이 영화에 일종의 음악성이라고 부르고 싶은 무엇인가를 부여한다. 물론 사운드 차원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레이션과 대사, 그리고 음악의 구성이 인물들의 동작과 숏의 지속시간을 제어하며, 이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많은 부분의 감각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사운드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음악성은 이미지의 반복을 통해 얻어지는 리듬감에 가깝다. 이를테면 영화의 가장 첫 장면, 난간 너머로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가운데 담배를 피우는 율리에의 옆모습이 2장의 시작과 함께 다시 등장할 때, 또는 파티에서 처음 만난 율리에와 에이빈드가 각각 변기와 의자에 걸터앉아 마주 보는 숏이 율리에와 악셀이 이별을 앞두고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숏으로 변주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세번의 순간에서 굳이 음악적인 무언가를 떠올린 것은, 아마도 율리에가 바라보는 도시와 하늘의 이미지가 시간에 대한 감각을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떠오르고 지는 해의 이미지가 제시하는 자체의 시간성이 있다. 또한 만남과 헤어짐, 완전한 이별로서의 죽음의 서사가 그 시간성의 층을 두텁게 만든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영화 안에서 30살로 명시된 율리에의 시간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 필연적이기에, 그 종말에 대한 감각이 따라온다. (이것은 44살인 악셀이 자신과 자신의 세대의 시간이 끝장나고 있음을 이야기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된 감각일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도 끝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선택의 시간들도 언젠가는 지나가고 말 것이다. 영화는 그러므로 나쁜 선택이란 없다고 말한다. 그 이후의 시간이 다시 이어질 뿐이다. 에필로그의 율리에가 결국 완전한 자기 자신을 느끼며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영화 촬영 현장의 스틸 사진 기사로 일하고 있고, 12장(‘모든 것엔 끝이 있다’)에서 죽음을 앞둔 악셀의 얼굴 사진을 찍는 것처럼, 배우의 얼굴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