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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 담긴 공포의 실체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이 영화가 포착하는 진정한 공포의 실체에 가까워지기 위해 글을 썼다.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은 오프닝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장면들이다. 참혹한 살인이 벌어지는 현장. 한 소녀가 겁에 질린 채 그 광경을 훔쳐보고 있다. 살인을 마친 살인마는 유유히 희생자의 집 밖으로 빠져나와 담배를 피운다. 바로 그 순간 실수로 인기척을 낸 소녀. 소리를 감지한 살인마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희생자의 집 문을 두드린다. 짐짓 정체를 숨긴 채. “문 열어. 경찰이다.” 장면이 전환되면, 신입 수사관 셰르(아스카르 일리아소브)가 경찰서에 첫 출근한다. 그가 선배 경찰들에게 꾸벅 인사한다. “수습으로 일하게 된 셰르입니다.”

이 인상적인 장면에서 ‘경찰’은 살인마가 새로운 희생자를 찾기 위해 꺼내든 미끼이자, 셰르가 조심스레 소개하는 자신의 정체성이다. 이때 경찰이라는 단어는 살인마와 신입 수사관 사이를 단숨에 관통하며 그들을 하나로 연결짓는다. 그러나 이 연결은 불쾌하다. 살인마와 수사관. 서로 붙지 말아야 할 것들이 진득하게 엉겨 붙기 시작한다. 이 장면이 유발하는 불쾌감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그 감각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으므로. 그렇게 영화는 서로 다른 것들을 슬그머니 이어 붙이며 어딘가 수상하게 시작된다.

분리되고 싶지만 분리될 수 없는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가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한다. 스네기레프 경위(이고리 사보치킨)는 자꾸만 셰르에게 들어오기 전에 노크하라고 경고한다. 자신의 방에 불쑥 들어오지 말라는 것인데, 그는 이 부분에 유독 예민하다. 또 살인 피해자의 방을 둘러보던 셰르는 피해자의 옷장 문이 열린 것을 보고서 그것을 살포시 닫아주기도 한다. 얼핏 무의미해 보이는 이 행동들은 모두 ‘분리된 상태’를 지향한다. 그들은 자꾸만 선을 긋고 경계를 만들며, 외부와 분리된 공간을 마련하고자 한다. 다나(사말 예슬랴모바)의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을 잃지 말라’는 그녀의 마지막 말은, 동생 셰르가 매일 접하는 악(惡)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고 자신을 지켜내기를 바란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들은 모두 주변으로부터 안전하게 분리된 공간에 머물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누나의 바람과 달리 셰르는 주변에 쉽게 물든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쉽게 주변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인물이다. 셰르는 경찰 조직 질서에 빠르게 녹아들고, 사수로부터 들은 말(“일하다보면 이럴 때도 있어”)을 그대로 외워 누나에게 말하기도 한다. 범죄자들과 마주칠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범죄자에게 맞아서 코가 깨지고, 살인자가 키우는 개에 어깨를 물리는 등 매번 범죄자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실패한다. 그들이 가한 폭력의 흔적은 셰르의 몸 곳곳에 새겨져 흔적으로 남는다.

그러니 이 영화의 결말도 사실은 놀랍지 않다. 누나의 죽음 뒤, 그의 눈빛은 점차 살인자 알렉의 그것과 닮아가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완벽히 겹친다. 셰르와 살인범 사이의 경계는 무너지고, 둘을 구분하기 힘들어질 즈음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런 결말이 좌절스러운 이유는 (사법 시스템에 의한 처벌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던 시기에) 알렉을 향한 복수심을 가까스로 누르며 경찰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비로소 대면하게 되는 얼굴, 피철갑을 한 셰르의 얼굴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살인자를 잡으러 온 경찰, 그를 직접 심판하는 폭행범, 혹은 희생된 가족을 둔 무고한 시민,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첫 장면에서 보았던 순진한 표정의 사내는 더이상 여기에 없다. 셰르는 끝내 (자신을 잃지 말라는) 누나의 말을 따르는 데 실패한다. 그러니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악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하던 남자의 실패를 그린 영화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셰르는 살인자 알렉을 두고 “너는 사형이나 무기징역형을 받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사회로부터 영영 격리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조롱이라도 하듯 알렉은 결코 완전히 격리되지 않는다. 범죄자는 자꾸만 사회로 돌아오고, 경찰은 범죄자를 닮아간다. 섞이지 말아야 할 것이 뒤섞이고, 넘어오지 말아야 할 것들이 범람하는 혼탁한 세계.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그런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살인범과, 국가와, 경찰과, 시민이 서로를 분리하지 못한 채로 기형적으로 엉겨 붙어 있다. 무자비한 살인마의 얼굴은 제거되지 않은 채로 이리저리 악령처럼 떠돌다 무고한 이들의 몸에 들러붙는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진정한 공포는 악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완벽히 분리될 수 없으리라는 절망적인 자각에서 온다.

이런 인식은 영화의 안팎을 관통한다. 박루슬란 감독은 실제로 1970년대 소비에트연방(소련) 시절 카자흐스탄에서 연쇄살인을 저지른 범죄자가 현재 교도소가 아닌 정신병동에 수감되어 있다는 실화에 착안해 영화를 만들었다. 최근까지도 살인범은 자필 서한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생생히 드러냈다. 과거의 참상은 역사 속에 머물지 못하고 자꾸만 현재로 범람하며, 박루슬란은 카메라를 통해 그런 현실을 재현한다. 도려내지 못한 폭력은 영화와 현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곳곳에 배어들어 악취를 풍긴다.

문득 멈춰 두리번거리다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연쇄살인을 소재로 한 스릴러물이지만 <살인의 추억>(2003)이나 <추격자>(2008), <세븐>(1995)과는 결정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살인의 추억>이 또렷해 보였던 범인의 얼굴을 점점 흐릿하게 만들어 시대의 풍경 속에 박제시킨다면, <추격자>는 얼핏 비슷해 보이는 두 남자를 한자리에 데려와 대결시키고, <세븐>은 사건의 외부에 머물던 한 남자를 사건 안으로 끌고 와서 결단을 요청한다.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또 다르다. 이 영화는 양극단에 서 있던 두 남자를 대면시키고 가까워지게 만들다, 기어이 둘을 섞어버린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을 응시한다. 그 때문에 연쇄살인 사건을 쫓는 듯하다가도, 문득 멈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이 영화만의 독특한 리듬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니, 사실 영화는 애초부터 긴박하게 내달릴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셰르와 알렉이 싸우는 마지막 장면에서 유일하게 빠르고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이 음악조차 마치 둘의 상태를 조소하는 듯 느껴진다. 그러므로 어딘가 썰렁하고 한기가 도는 이 영화만의 특별한 리듬을 서스펜스의 부족으로 보는 것은 오독이다.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살인 현장을 어슬렁거리는 듯하다가 옆에 선 이의 얼굴을 빤히 뜯어보는 영화다. 그 시선에는 시대의 부조리와 사회의 통증을 포착하려는 집요함이 너울거린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을 하나 고르라면, 셰르 역할을 맡은 아스카르 일리아소브의 얼굴이라 하겠다. 그의 말간 얼굴은 세계의 폭력을 감지하는 깨끗한 리트머스 종이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검붉은 피로 뒤덮인다. 국가의 침묵 아래 음습하게 퍼져나간 폭력으로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드는 곳. 지금 이곳에 안전지대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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