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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유럽의 두 가지 질서는 영화와 강제수용소에 있다. 영화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기록하는 특권적인 재현 체계라면, 절멸의 수용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기록을 은폐하고 소각한 체계적 기관이다. 한쪽에선 이미지를 구현하고, 다른 한쪽에선 이미지를 말살한다. 영화가 역사를 창조한다면, 강제수용소는 역사에 구멍을 낸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두 체계는 그러나 유사성을 공유하면서 대립한다. 영화와 강제수용소는 시야 바깥에 있던 세계를 내부로 가져와 관측하고 편집하고 분류하는 절차로 만들어진다. 열차의 도착과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행렬을 상징적 기원으로 삼는 영화와 수많은 희생자를 열차로 태워 나르며 노역과 학살을 강제한 강제수용소는 제국주의의 열망이 깃든 발명품이자 세계를 포획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장 뤽 고다르가 지적한 것처럼 영화는 강제수용소의 현장에 존재하지 않았고, 이는 표상과 기록장치로서 영화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말해지곤 했다. 수용소 내부의 이미지는 영화에 남겨진 공백
[비평] <존 오브 인터레스트>, 수용소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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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은 볼 수 있어도 향기는 맡을 수 없다. 피부에 닿는 감촉과 존재의 무게 역시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시각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뇌로 전달해 인지와 수용을 거쳐 감정과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지각 과정이다. 움직이는 영상과 음향으로 이루어진 영화를 받아들일 때 그래서 가장 먼저 강조되는 감각 체계는 시각과 청각이다. 영화에서 타인의 꿈이 펼쳐지거나 정신분열을 예견하는 이명의 사운드는 들려올 수 있어도 냄새나 감촉은 후각과 촉각의 감각경험으로 전달될 수 없다. 오늘날 영화적 체험을 보다 많이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까. 스크린X와 아이맥스에서 강조하는 압도적인 시각 스케일이나 4D 상영처럼 눈으로 보는 동시에 신체의 다른 외부감각을 자극하려는 ‘체험’적 관람은 영화의 선천적 결핍을 메워보려는 스크린 바깥의 기술적 시도다. 시각과 청각 외 감각의 증폭과 확장으로 향하는 영화(기술)의 열망은 인간의 오감을 모두 아우른 뒤에야 멈출 수 있는 것일까. <프렌치 수프>와
[비평] 부재하는 것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프렌치 수프>와 <원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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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8개 부문을 수상했고, 오스카 시각효과상까지 거머쥔 <고질라 마이너스 원>은 결국 국내 극장에 걸리지 못했다. 물론 이는 괴수물이 꾸준히 국내 관객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몬스터버스의 다섯 번째 영화 <고질라X콩: 뉴 엠파이어>는 북미에서의 성공과 달리 국내에선 51만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앞선 세편의 몬스터버스 고질라 영화도 100만 관객 동원에 실패했다. 2016년 개봉 당시 일본 흥행 2위를 기록한 <신 고질라>는 국내 관객 7592명이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았다. 봉준호의 <괴물>이나 심형래의 <디 워>, 혹은 피터 잭슨의 <킹콩>처럼 흥행에 성공한 괴수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의 흥행이 하나의 현상처럼 여겨졌음을, 나아가 <고질라> 시리즈와 같은 전통적인 ‘거대 괴수물’의 흥행이 없다시피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
[비평] ‘고지라’의 타임 패러독스, <고질라 마이너스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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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도시의 발생 이전에 살았던 이들이 경험했을 소리의 세계를 상상해본다. 기계의 소음보다 자연의 음향이 친숙했을 세계. 거리를 거닐면 물론 그때도 사람들은 떠들고 장난치고 싸웠겠지만, 철도가 발명되고 공장이 세워지면서 도시가 갖게 된 음역과는 차원이 달랐을 터다. 이 추측은 활자와 사진을 통해 짐작할 따름이라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대자연이라는 원형으로 섣불리 감응하고 낭만화한다는 한계가 있겠다. 그럼에도 “귀가 먹먹해지는 시대”(데이비드 헨디)의 도입에서, 세상에 없던 것의 소리가 불현듯 우리를 침범하던 순간 인류가 느꼈을 당혹스러움에는 의심이 들지 않는다.
여기에는 당연히 증기기관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있다. 영화의 시원적 피사체라 부를 만한 열차는 수많은 (서부)영화에서 반복되어온 이미지다. 우리는 열차의 거친 운동, 위아래로 혹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액션’(action)의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칙칙폭폭, 덜컹덜컹, 이 격렬한 공간이
[비평] 전기 바깥의 전기, <차이콥스키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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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이 곧 무기가 되는 삶. 누군가가 여기 존재한다는 단순한 현실이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는 이미지는 저항의 수단이 된다. 르포르타주는 사회적인 현실에 대해 보고자의 주관을 섞지 않은 객관적 서술과 그 자료들을 가리키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어두운 이면을 탐사하는 이미지는 결코 객관적인 상황만을 보여주도록 길들여지지 않는다. 19세기 뉴욕 로어 이스트사이드를 촬영한 제이컵 리스의 사진은 단순히 빈민가의 실태를 알린다는 목적을 넘어 그 자체로 정치적 효과를 자아내고 있었다. 어둠으로부터 가려져 있는 것을 드러내려는 이미지는 필연적으로 저항적인 성격을 띤다.
낸 골딘의 삶-투쟁을 다초점의 이미지로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가 향하는 곳 또한 어둡고 눅눅한 암실이다. 70년대 뉴욕 바워리의 밤, 지하 클럽에 모여 취해 있는 사람들, 어둠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음악과 함께 슬라이드 쇼가 시작되면 관객들은 사진에 등장한 자신
[비평] 암실, 영화, 그리고 몸에 남는 것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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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필요>. 자꾸 다시 읽어보게 된다. 어쩌면 의도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필요’도 사실 어색하다. ‘요구’가 좀더 어울리지만 가장 적당한 건 영어 단어 ‘니즈’(Needs)다. 어느새 한글보다 익숙한 이 외래어에서 프랑스 대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모습이 엿보인다. 영화 속 그녀의 모습에 대다수의 관객은 아낌없는 환대를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어색함을 남긴다. 모종의 이질감이 <여행자의 필요>가 지닌 감각의 덩어리다. 홍상수 감독은 근린공원을 비롯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흔해 빠진 풍경 속에 이방인 이자벨 위페르를 배치하고 익숙지 않은 감정 들을 끌어올린다. 그의 방식은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 이리스의 프랑스어 수업 방식과 흡사하다. 그녀의 수업은 수강생에게 상처를 내는 방식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첫 번째 수업에 등장한다.
수강생(김승윤)은 손에 났던 상처에 새살이 돋은 것을 이리스에게 말한다. 얼핏 보면 잉여
[비평] 소통의 과정, 소통의 방식, '여행자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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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나는 한 대입 학원에서 자율학습을 감독하는 일을 했다. 한국 입시 산업의 핵심에 위치한 그곳에서 나는 매시간 학생들의 핸드폰 제출 여부를 체크했고, 학생이 자습실에서 졸거나 인터넷강의 이외의 용도로 태블릿을 사용하면 경고 조치를 취했다. 그곳은 남녀의 자습실이 구분된 것은 물론 식당에서도 이성간의 대화를 방지하도록 구역이 분할돼 있다. 흥미로운 점은 공부를 제외한 일체의 교류가 금기시된 그곳의 매뉴얼을 학생들이 반기는 것은 물론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부담 또한 내게 위탁된다는 점이었다. 가령 자습실에서 대화가 금지돼 있으므로 학생들은 옆자리 학생이 소음을 내도 직접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는 대신, 내게 주의를 주라고 요청했다. 그외의 상황에서도 학생은 오직 공부에 충실한다는 자기계발의 윤리를 체화한 채 여타의 모든 사회적 관계가 유발하는 부담과 책임으로부터 면책됐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 <모르는 이야기>를 논하는 지면을 다소 뜬
[비평] 지킬 건 환상만 남은 세대의 반짝이는 비명, <모르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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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의 한 장면, 마야와 아사코는 사진전에 입장하려 하지만 전시회 직원은 입장이 마감됐다며 저지한다. 마야는 아직 전시 시간이 남았다며 따지고, 직원은 규정을 들먹이며 실랑이가 오간다. 그 순간 료헤이가 끼어든다. “앗 죄송합니다! 그런데 저희 이 전시 보려고 교토에서 왔거든요. 일찍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고속버스라는 게 늦을 때도 있잖아요. 부탁드립니다! 자 너희도 공손히 부탁드려!” 일행이 고개를 90도로 숙이면, 다음 장면에서 그들은 전시회장에 입장해 있다. 서사적으로 사소하지만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사람에 대한 기대와 명랑한 적극성을 잃지 않는 저런 태도를 현실에서 언제 마지막으로 봤더라? 경직된 관료적 형식주의에 속박된 우리는 내심 저런 순간을 염원해왔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인간적 존엄성을 발휘하는 용기 있는 순간들. 지난 몇년간 하마구치의 영화가 열광적 호응을 얻은 현상은 이런 순간이 알알이 맺혀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평] 윤리를 넘어 기교의 영역에 도달한 자기객관화 능력,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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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루리아의 무덤에서 훔친 여신상에 대한 경매가 진행되고 있던 스파르타코(알바 로르바케르)의 배에서 아르투(조시 오코너)는 여신상의 해체된 머리 부분을 갑작스럽게 바다로 던져버린다. “살아 있는 자들이 보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탈리아(카롤 두아르트)의 말을 실현시키듯 두상은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의 시야로부터 멀어지면서 바다로 잠긴다. 밑바닥에 닿은 두상이 흙먼지를 일으켜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거기에 몽타주되는 것은 베니아미나(일레 야라 비아넬로)의 얼굴 클로즈업이다.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것은 또한 에우리디케의 얼굴이었을까. 하데스로부터 에우리디케를 돌려받기 위한 여행이 끝나갈 무렵 오르페우스는 주어진 규칙을 어기고 뒤를 돌아본다. 로마의 시인들은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또는 그를 둘러싼 죽음에 압도되어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시인 체사레 파베세는 이 신화에 대해 다른 견해를
[비평] 전락하는 자의 꿈, <키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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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논란(?)이 되었을 장면부터 말해보자. 아홉 번째 에피소드에서 외계 기계를 서로 차지하려고 최선만(류승룡)과 고백중(안재홍), 유인원 박사(유승목)와 그의 조카 유태만(정승길), 그리고 ‘백정 닭강정’에서 일하는 외계인 4명의 세 무리가 대치한다. 이때 외계인 4명은 지구인에게 겁을 줄 요량으로 지구인이 가장 무서워할 만한 네 가지를 몸으로 연기한다. 잘 알고 있듯 미사일, 핵,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사슴, 세계적인 인기 그룹 BTS가 그것이다. 진보한 과학기술과 정신세계를 구축했을 외계 존재가 정말 지구인을 이해하지 못해 그러한 발상으로 어처구니없는 몸짓과 말을 보여준 일은 터무니없고 실소를 자아내지만 작품과 인물은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이 한명 한명 진지하게 말 그대로 공연을 벌인다. 이 장면이 놀랍다면 감독의 지난 연출 스타일이 언어유희와 슬랩스틱코미디가 주를 이뤘던 데서 한뼘 더 비켜나 생경함을 주었기 때문이다. 유치원 장기 자랑에서나 볼 법한 이 장면은
[비평] 이병헌 코미디의 특이점, 불화와 화합 사이, <닭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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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것들>을 보며, 이상했다. 영화는 시종 벨라(에마 스톤)를 화려하게 비추지만, 진짜 보여주려는 건 따로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뭔가가 더 있다는 묘한 기분. 영화의 숨겨진 이면을 보기 위해, 한 여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영화의 초반, 벨라의 사랑스러운 순수는 돋보인다. 그런데 벨라의 순수함을 좀 유심히 뜯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순수는 물들지 않은 공백의 상태. 그러니까 무언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벨라에게 없는 것은 무엇일까? 즉각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녀에게 없는 것은 과거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있는 자신만의 역사가 벨라에겐 없다. 그러므로 지식과 교양도 없다. 세상을 모른다. 이것은 <가여운 것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축으로 작동한다. 벨라는 좌충우돌하며 세상을 알아가고, 그 과정에서 코미디와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표면에 드러난 벨라의 공백이다.
매력적인 몸을 가진 성녀, 벨라
하지만 그게 다인가?
[비평] 반복된 것이 본질에 가깝다, <가여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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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라이브즈>는 영화의 의도적 성취와 무관하게 동시대 영화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아날로그적 감각을 소환한다. 멀티버스를 통한 부활을 종용하고, 모든 것을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려는 영원주의의 강박은 영화의 생애주기를 무한에 가까이 연장하면서 영화산업을 언제나 젊은 것으로 가장하려 할 뿐 아니라 화면에 출현하는 죽음마저도 불확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반대로 <패스트 라이브즈>는 인연이라는 불교의 메타포에 기대고 있기는 하지만 관계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가능세계를 뒤에 두고 빠져나온다. 이러한 순응의 태도를 아날로그적 감각의 (재)출현이라 부를 수 있을까.비슷한 맥락에서 겹쳐보고 싶은 것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심도>다. <심도>의 마지막 장면에서, 함께 떠날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은 결국 엇갈린다. 한 사람은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다른 사람은 건너편 차선을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남자가 그의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비평] 아날로그적 영원을 헤아리기, <패스트 라이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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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과 만질 수 없는 것’을 믿지 못하는 관객의 굳은 선입견을 점잖게 훈계하는 대사를 초반부에 배치하고 시작하는 <파묘>는 바로 그 전제에 고통받는 척하면서 뻔뻔스럽게 그 전제를 배반하고 심지어 거기에 고상한 명분을 칠하면서 영화적 자살과도 같은 과도한 장식의 전시로 나아가는데, 오컬트에 특화된 재능의 소유자로 주목받던 장재현 감독은 이로써 오컬트와 괴수물을 난폭하게 결합했는데도 상찬받으며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흥행 기록을 경신하는 영광의 월계수를 쓰게 되었다. 내게는 얼빠진 소리처럼 들리는 이 영화에 대한 온갖 고급한 비평적 담론과 SNS를 통해 넘쳐나는 진영 논리에 기반한 (좌파 반일영화라는 모 다큐멘터리 감독의 비난에 대한 대중의 응징이라는 투의) 찬가를 존중하면서도 이 영화에 대한 보다 담백한 접근이 필요한 건 아닐까라는 의문에서 이 글을 쓴다.
싸움의 비장한 명분
<파묘>는 변칙이라고 지적해도 무방한 과격한 서사의 뒤틀림
[비평] 악의 존재를 전면화한 쾌락의 후유증, <파묘>가 내세우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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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 말할 필요 없이 <파묘>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화두는, 오니의 출현을 기점으로 서사가 급격하게 굴절된다는 점이다. 영화를 비판하는 측은 이 비약을 용인하지 못하며, 호의적인 측은 이 비약을 납득시키는 감독의 과단성에 매혹된다. 나는 후자에 해당하지만, 비평이란 예술가의 의도를 곧이곧대로 긍정하는 대신 작품의 구체적 효과가 그 의도를 정당하게 납득시키는가를 논하는 작업이므로 감독의 뚝심이 기특하다는 식의 말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여기서는 <파묘>의 도발적인 전략이 지니는 시의성을 논하려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잠시 우회해 그 전략을 시의성 있게 만드는 동시대 픽션의 상황을 간략하게 점검해보자.
앙드레 바쟁은 새로운 매체와 예술이 부상하면, 그것이 기존의 예술과 상호 간섭하며 새로운 스타일을 창출한다고 말했다. 가령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냉엄한 문체가 카메라를 연상하는 비인간적인 객관주의를 체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미디
[비평] 있어선 안될 존재를 직시하는, 알려지지 못할 싸움에 대하여, <파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