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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품고 있는 리듬을 담은 영화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공간과 그 안의 사물들과 사람들, 그들의 물질성과 운동이 자아내는 리듬이 하나의 세계를 이뤄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으로 이름 지어졌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미야케 쇼는 느린 걸음으로 세상을 응시하며 온몸의 감각으로 느낀 세상의 리듬을 영화 속으로 흘려보낸다. 그러고선 도쿄에 자리한 아담한 복싱 체육관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리듬을 형성하고, 전철의 기척을 알리는 소리가 도시의 순환하는 리듬을 일깨우며, 도심지의 소음과 작은 동네의 고요함이 개별적인 리듬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부드럽게 각인시킨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깊고 단단하며 신비롭다. 이 영화엔 사사롭지만 눈길을 끄는 장면들과 주인공 게이코(기시이 유키노)의 세계를 이루는 순간들이 느슨하게 들어찬다. 영화는 복싱 선수 게이코뿐만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게이코의 삶과, 그녀와 이어진 인물들과 그들이 스쳐가는 사람들과 공간의 모습들까지 모든 풍
[비평] 너의 눈에 시간을 새긴다는 것,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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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당시 대학생 한지원은 <코피루왁>이라는 24분(!) 분량의 단편(!)애니메이션을 발표했다. 비유와 상징, 함축 등의 기존 독립 단편애니메이션의 미학에서 벗어나 드라마 연출의 정공법을 택하면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담뿍 담아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10대 후반 주인공들은 주저 없이 질주했다. 넘치는 에너지와 탄탄한 기본기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작품이었다. 기본기와 연출력은 그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추진력일 뿐이라는 듯, 2013년 <학교 가는 길>은 현실과 환상 사이를 오가는 간극을 한껏 벌리면서 한지원만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각인시켰다. 반려견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한지원의 작품들 속 청춘이 겪는 현실 사회의 풍경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것일지니. 학교와 가정이라는 (안정적이면서도 억압적인) 울타리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막연한 기대를 꿈꾸지만, 정작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 그러고는 쉼표도 없이, 대학원 준비생의 고민을 다룬
[비평] ‘그 여름’, 지극히 마술적인, 또한 사실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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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는 더이상 집이라고만 부를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것이 개인의 경제적 성공에 따른 신분이 드러나는 지표이고, 또한 그 경제적 가치를 재생산하기 위한 투기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공통의 감각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여기에 투사되는 선망과 원한은 동시대의 문화적 감정구조에 있어 핵심이다. 지난해 가장 문제적 작품이었던 <안나>와 <작은 아씨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투쟁적 계급의 개념은 유효하지 않으며 그 자리를 회복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자연화된 ‘신분’이 차지한다. 주어진 신분의 극복이 중심 모티프로 작용하는 두 시리즈 모두에서, 아파트는 그에 따른 갈등 상황을 첨예하게 만드는 서사적 장치로 사용된다. <안나>에서 정체가 탄로날 위기에 처한 안나(수지)는 가짜 신분으로 통행증을 얻은 셈인 자신의 아파트 건물에서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숨어 다닌다. <작은 아씨들>의 인주(김고은)가 다가올 어떤 위험도 감수하기로 마음먹
[비평] ‘드림팰리스’, 욕망의 성취도, 연대도 실패한 자리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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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개봉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결말에서 이 영화는 안데르센 원작의 비극이 지닌 공허함을 단호하게 포기하는데, 아마도 30년 전의 문화적 분위기가 동화 속 ‘불가능한 사랑’을 옹호하지 않았기에 관객 다수가 이 애니메이션의 제안을 환영했던 것 같다. 동화란 원래 구전되거나 문서화되며 상황에 맞게 변화되는 특징을 가진 장르다. 따라서 영화화 과정에서 원형의 일부가 훼손되거나 변형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일부 비평가들의 언급처럼, 과거 디즈니의 영상화 작업은 안데르센 특유의 ‘뒤틀린 욕망’이 지닌 환영을 타파해낸 성과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성공했다. 그리고 의도주의 비평의 관점에서, 이러한 개작의 문제는 도덕적으로 텍스트의 합리성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원주의적 해석이 관심을 받으면서 작품 스스로의 ‘지각가능성’ 여부가 창작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실사화된 <인
[비평] ‘인어공주’, 가장 숭고한 사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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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에는 조명이 깜빡거리고, 남자는 나이 든 여성 동료에게서 약을 받는다. 꺼질 듯하던 전기가 드디어 제대로 들어오고 여성이 화면 왼편으로 나가면, 거기에는 한밤중 노대의 풍경이 담겨 있다. <카일리 블루스>는 <지구 최후의 밤>과 달리 대부분 낮을 배경으로 촬영되었지만 도입부는 밤의 서늘하고 음산한 공기를 충분히 각인한다. 빛을 기다리면서 정작 밤으로 향하는 연로한 여성의 걸음을 따라가며 시작하는 영화는 이처럼 유장한 패닝으로 연결된 흐름 안에 여러 차례의 역설을 배치한다. “오늘이 무슨 날이에요?”, “그냥 평일이야”라는 모호한 뉘앙스의 대화, 혹은 ‘하루에 세번’을 약 복용 주기가 아니라 정전의 횟수로 알아들은 천성(진영충)의 오해, 문과 밤과 빛과 불…. 영화는 단일한 숏 안에서 혼잡하고도 역설적인 정보를 거의 남용하듯 선보인다.
데니스 림은 비간의 롱테이크에 관해 “한숏 안에 쌓이는 강도를 우리가 아는 형태로서 현실의 보호벽이 파열되기 직전 그 한계
[비평] '카일리 블루스', 나의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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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이하 <가오갤3>)가 주는 감동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같은 수사적인 표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가오갤3>의 감동을 설명하는 것에는 말 그대로 물리적인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퀼(크리스 프랫)이 우주에서 돌처럼 굳어가다 아담(윌 폴터)에 의해 극적으로 살아나는 장면이 더 뜨겁게 느껴지는 까닭을 (전편을 보지 않은)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에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던 욘두(마이클 루커)의 모습까지 덧붙여 이야기해야 할 텐데, 문제는 그걸로도 여전히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욘두와 퀼의 길고 긴 사연을 추가로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것이 반드시 설명되어야만, 극 후반 사랑으로 감화되는 아담이라는 캐릭터의 상징성이 제대로 전달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비평]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언어화하기 곤란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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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소년들이 맞닥뜨리는 세계의 균열을 극도로 섬세하게 그려내면서도, 끝내 여린 소년의 죄의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마는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루카스 돈트의 <클로즈>를 반복해 보며 체념하듯 되뇌었다. 영화를 거듭해 보아도 매 장면에 대한 감응은 다르게 반향하지 않았고, 이 가련하고도 가혹한 영화를 끌어안고픈 마음과 마냥 그럴 수만은 없는 양가적인 감정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마음에 걸려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장면은 감상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데, <클로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그 생명력의 근원을 날카롭고도 사려 깊은 시선과, 개인의 얼굴에 무섭도록 집중하면서도 사회상을 영민하게 반영하는 지능적인 면모에서, 단순하게는 관객과 인물을 밀착시키는 강력한 동화력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소년의 세상이 흔들리기 때문만이 아니다. 영화 후반부부터 서사가 도식적으로 구조화되고, 소년이 연약
[비평] ‘클로즈’, 상실이 자아내는 큰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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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이 받은 혹평 중에는 이병헌 감독의 장기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극한직업>(2018), <바람 바람 바람>(2017) 등 전작에서 선보인 시원한 유머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확실히 웃음 측면에서 <드림>은 전작들과 결이 다른데,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이병헌표 웃음’이 줄었다는 것이다.
집의 부재가 가져온 변화
이병헌표 웃음은 뭘까. 그의 인물들은 뻔뻔한 소리를 또박또박 쉴 새 없이 떠들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주로 불리할 때) 어이없는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 때때로 고함에 상욕까지 시원하게 쏟아낸다. 그들은 속물스럽지만 귀엽다. 그러나 이병헌 코미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조적인 유머’다. 그들은 자신의 한심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에 대해 물색없이 떠든다. 상황의 엿같음을 폭로하면서도 별일 아니라는 듯 능청을 떤다. <드림>에서 소민(아이유)이 “페이가 열정을 못 따라와서 열정을 페이에 맞췄다”고
[비평] 그럼에도 '드림'을 긍정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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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윅4>는 게임 같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급기야 1인칭 시점 운운하는 반응까지 나온다. 몇몇 신에서 내가 놓친 시점숏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하드코어 헨리>처럼 1인칭 시점이 강조된 영화가 아니다. 3시간 가까이 총을 쏘는 주인공의 몸을 내가 보고 있는데 무슨 시점숏이란 말인가. 그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도 마찬가지다. 게임에 들어왔다고 착각할 수는 있다. 여기서도 인물이 게임적 상황을 돌파하는 걸 바라볼 따름이지 내가 캐릭터의 시점이 되어 장애물을 통과하지는 않는다. <존 윅4>에서 게임을 표방한 부분은 제8구역의 한 건물에서 벌어지는 액션 시퀀스인데, 여기서 카메라는 지상에서 유리돼 계단을 따라 부상하며 부감숏으로 인물의 동선을 일목요연하게 따라가며 보여준다. 거대한 설계도 위로 인물이 안무하듯 총을 쏘는 장면은 전형적인 객관적인 숏이다.
<존 윅4>가 게임 같은
[비평] ‘존 윅4’ 아름다운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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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에서>를 보는 내내 떠올렸던 것은 초점 없는 이미지를 이렇게나 신중하게 응시하는 경험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었다. 비경제적 이미지, 시행착오, 상영 환경에 대한 불신을 촉발하는 화면, 그리고 이 모든 혐의들과 평행선을 그리면서 그저 재생되고 있을 뿐인 영화. 그러나 이 글은 초점이 나간 채로 촬영되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물안에서>가 개봉될 수 있는 영화의 조건(그런 게 있다면)을 파격적으로 변절했다거나, 영화를 어렵게 만든다는 식으로 과장하는 반응들과는 거리를 두기로 한다.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이런 질문이다. 왜 하필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영화’가 이렇게 촬영되어야 했을까. 스스로의 삶을 영화를 향해 굴절시키는 홍상수 감독의 작업 방식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거의 매 영화를 빼놓지 않고 출현하는 사건이지만 정작 영화 제작 현장은 영화를 둘러싼 반응들 속에서 불투명하게 남아 있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물안에서>에는 촬영 현장이 등장한
[비평] ‘물안에서’, 결정되지 않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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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비평은 마치 내게 평론은 여기서 끝나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하 <슬램덩크>)가 개봉 후 흥행을 이어간다는 소식에 시큰둥했던 건 사실이다. ‘29년이 지난 이제 와서 굳이 왜?’ 하는 마음이 앞섰고, 흥행은 일부 추억에 젖은 <슬램덩크> 열혈 팬들이 보여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이 글을 쓰지 않았다면 끝까지 보지 않았을 것이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경향신문>에 연재하는 칼럼에서 <슬램덩크> 흥행의 이유를 분석한다(‘강유정의 영화로 세상 읽기’-“중요한 건 변하지 않은 마음”, 2023년 2월10일자). 거의 최초로 문화를 주체적으로 향유하던 이른바 X세대가 향수를 바탕으로 젊은 시절 즐겼던 문화 콘텐츠를 소환했고, 아래 세대에게 전파했다는 것. 또 이런 현상은 <탑건: 매버릭> 때부터 기미가 보였고, 그 배경에 부조리하고 힘겨운 현실이 있다는 점까지. 훗날 오늘의
[비평] 당신의 전성기는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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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의 얼굴을 내도록 지켜보면서도 마음이 이리 비어버려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아도 <소울메이트>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긴 어렵다. 원작인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2016)의 잔상이 아른거리고, 서사적 결함이 눈에 밟힌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빽빽하고도 헐겁다. 두 친구의 진한 우정과 다사다난한 인생사를 빼곡히 채운 이야기는 반전의 반전을 거듭한 끝에 온전히 드러나는데, 그 뒷맛이 씁쓸하다. 종국에 드러나는 서사의 평이함 때문인지 이야기가 주가 된다기보다는 반전이 안기는 충격이 핵심인 것 같고, 반격을 가하는 스토리텔링에 강한 집착마저 보인다는 인상이 남는다. 물론 서사의 기본 구조는 원작에서 빌려온 것이며, 서사 전달에 긴장감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매도될 일은 아니다. 다소 투박하지만 야심만만한 구조 안에서 감성 짙은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도 감상자에 따라서는 다양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 반응을
[비평] '소울메이트', 여성 서사와 모성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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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열리는 문이 있다. 혹은 문이 열렸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건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이 그리는 세계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사람이 죽는 일이 있다. 혹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의 선율이 되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선율’은 나의 표현이 아니라 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표현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자신의 영화를 직접 소설화한 책 <스즈메의 문단속> ‘작가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38살 때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내가 직접 피해자가 된 건 아니었으나 그 일은 내 40대를 관통하는 일상을 지배하는 선율이 되었다. (중략) 왜. 어째서. 왜 그 사람이. 왜 내가 아니라. 이대로 끝인가. 이대로 도망칠 수 있을까. 계속 모르는 척하고 살 수 있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신
[비평] ‘스즈메의 문단속’, 애도의 방법으로서의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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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셰린의 밴시>에는 그냥 지나치기 수상한 구석이 있다. 이곳의 인간들은 종종 너무 과격하다. 그렇지 않은가. 기어이 피를 보겠다는 남자와 지지 않고 응수하는 남자라니. 처음에는 마틴 맥도나 감독 특유의 우화적이고 연극적인 연출이라 여기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런 과격함은 영화의 마지막, 파우릭(콜린 패럴)의 결단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한다. 파우릭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한 것일까? 단순한 복수인가, 윤리적인 응징인가. 혹은 여태 눌러놓은 서운함과 분노가 폭발한 것일까? 더 의아한 것은 그런 결단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반응이다. 게다가 그 순간을 은은하게 감싸고 도는 경건한 공기라니. 이런 이상함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마틴 맥도나의 작품들을 경유해 하나의 가설에 이르렀고, 그 가정은 지금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파우릭의 결단을 설명하기 위해 쓰여질 것이다. 그것이 기행이 아니라 성스러운 의식이며, 영화의 숭고한 목적지임을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도 말할 수
[비평] ‘이니셰린의 밴시’, 재앙은 어떻게 제의가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