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은 볼 수 있어도 향기는 맡을 수 없다. 피부에 닿는 감촉과 존재의 무게 역시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시각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뇌로 전달해 인지와 수용을 거쳐 감정과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지각 과정이다. 움직이는 영상과 음향으로 이루어진 영화를 받아들일 때 그래서 가장 먼저 강조되는 감각 체계는 시각과 청각이다. 영화에서 타인의 꿈이 펼쳐지거나 정신분열을 예견하는 이명의 사운드는 들려올 수 있어도 냄새나 감촉은 후각과 촉각의 감각경험으로 전달될 수 없다. 오늘날 영화적 체험을 보다 많이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까. 스크린X와 아이맥스에서 강조하는 압도적인 시각 스케일이나 4D 상영처럼 눈으로 보는 동시에 신체의 다른 외부감각을 자극하려는 ‘체험’적 관람은 영화의 선천적 결핍을 메워보려는 스크린 바깥의 기술적 시도다. 시각과 청각 외 감각의 증폭과 확장으로 향하는 영화(기술)의 열망은 인간의 오감을 모두 아우른 뒤에야 멈출 수 있는 것일까. <프렌치 수프>와 <원더랜드>는 2차원의 화면과 사운드로 영화에 결핍된 감각을 상기시키며 일깨운다. 두 영화는 모두 존재의 상실을 다루면서 영화에 부재할 수밖에 없던 감각을 어떻게 스크린 위로 되살릴 것인지, 혹은 어떻게 잊으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아는 것의 기억, 알지 못하는 것의 잔상
역사영화가 집단의 경험과 기억을 건드린다면 음식영화가 건드리는 것은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한 미각과 후각적 기억, 그리고 그 상상이다. 트란 안 훙은 <그린 파파야 향기>를 통해 계절의 정취와 시시각각 변하는 인물의 마음을 사운드와 음악으로 전달하지만 가장 전하고 싶었던 것은 그 계절의 향기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환청(幻聽)이나 환시(幻視)처럼 냄새에도 환후(幻喉)라는 것이 있어서’ <프렌치 수프>는 이미지를 통해 맛과 냄새의 흔적을 보는 이의 기억과 상상에서 끌어내려 한다. 물론 그 환영적 감각은 의지에 의해 발현되는 것도 아니며, 보이는 것만으로 보는 이에게 환후를 경험하게 할 수도 없다. 결정적으로 환청이나 환시의 영역과는 달리 환후의 감각에는 영화의 표현 방식에서 고정된 사운드 기호가 없고 양식화된 이미지에는 그 다양성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냄새를 맡는 행위 외에 후각적 환영을 화면에 등장시키고자 하는 <프렌치 수프>의 강렬한 의지는 후각 경험의 완전한 환영 대신, 유령 아닌 유령과 환상이나 기억 아닌 어떤 잔상을 등장시킨다. 이 영화에는 영화 속 인물이 보는 환영도 환상도 아닌 동시에 회상도 아닌 어떤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잔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누군가의 회고나 환영이 아니면서 동시에 그것과 겹치는 인물의 플래시포워드로 보이기도 해서다. <프렌치 수프>에서 맛의 기억은 이미 경험한 것과 앞으로 경험하게 될 것을 미지의 것을 나누어 말한다. 어린 소녀 폴린(보니 샤그뉴 라부아르)은 도댕(브누아 마지멜)이 건넨 부르기뇨트 소스를 처음 맛본다. 폴린은 자신이 아는 맛의 기억을 더듬으며 재료를 읊는데 이때 소스가 만들어지는 장면이 함께 교차편집된다. 폴린이 알고 있는 재료( “와인” )는 그가 미처 몰랐던 재료( “불붙인 와인” )가 등장하는 장면과 뒤섞이면서 이 조리 장면은 폴린이나 다른 누구의 기억도 아니며 환영도 아닌, 미지의 잔상으로 보이게 된다. 폴린이 맛본 부르기뇨트 소스는 누구의 상상도, 회고도 아닌 듯한 바로 그 미지의 잔상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지금 알지 못하는 맛과 영화에 부재한 미각과 후각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영화의 이런 점 때문에, 외제니(쥘리에트 비노슈)의 어떤 동작은 훗날 도댕이 떠올리게 될 감각의 회고를 예견하는 의미로 다가온다.
하루를 마무리하던 어느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외제니는 도댕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그에게 차마 닿지 못하고 그 손길을 거둔다. 내민 손으로 만지지 못하고 멈춰버린 움직임은 끝을 예감한 외제니가 자신이 사라진 미래에 도댕이 떠올릴 감각의 기억을 의식한 가슴 아픈 멈춤이 아닐까. <프렌치 수프>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다시 교차한다. 외제니를 잃은 부엌을 카메라가 360도 패닝하는 동안 이 장소의 계절과 시간의 빛이 시시각각 변화한다. 들려오는 음성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말들로 시작해 점차 환영으로 번진다. 열린 부엌문으로 다가올 장면은 아직 모르는 채다.
디지털 동영상, 그 완전한 영원
<프렌치 수프>가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감각을 그리려 했다면 <원더랜드>는 AI가 복원한 죽은 자의 영상을 살아 있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원전으로 끌어올린다. 사실 ‘원더랜드’사가 제공하는 영상통화 서비스 프로그램은 지나치게 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인셉션>에서 인간의 인식과 기억에서 꿈으로 재현해낸 사랑했던 이는 그 실재가 가진 완전성과 불완전성을 닮을 수 없는 것처럼 <원더랜드>의 AI 캐릭터는 가족들과 상호작용하여 데이터를 축적하면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성장한다. 생존했던 인물을 기반으로 생성한 가상 캐릭터와 실재 사이의 진실성과 이질성, 컴퓨터그래픽으로 구현한 이미지와 음성의 리얼리티를 향한 의문보다도 앞서는 건 <원더랜드>의 무감함이다.
이들은 상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서비스를 결제하고, 이전과 같은 모습에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죽은 이를 만날 수 없음을 비관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제아무리 영화가 촉감과 존재의 무게를 전할 수 없는 매체라 하더라도 영화 안의 현실 세계 사람들조차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캐릭터가 실재를 완벽하게 대체할 것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상황은 믿기 힘든 픽션이다. <원더랜드>는 곁에 함께했던 이의 실재함에서 오는 온기와 무게, 촉감의 흔적을 그 세상에서 깨끗이 지워버린다. 원더랜드와 그 바깥을 오가는 탁구공처럼 실재 없이 이미지와 소리만 있는 <원더랜드>의 현실은 최소한의 물성과 최대한의 이미지가 남겨진 곳이다.
무게와 촉각의 경험이 중요치 않은 그 현실에서는 이 영상통화 화면만 있다면 몸을 가졌던 존재의 상실을 체감할 새가 없다. 어느 때고 연결될 수 있는 원더랜드 서비스는 잠들지 않고 영원히 재생되는 디지털 동영상이다. 게다가 그 영상은 보는 자의 발화를 경청할 수 없던 영화의 결핍마저 메우고 있다. 곁에서 사라진 존재의 자리를 성장하는 AI 캐릭터의 영상화면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이 바로 상실에 관한 이 따스한 드라마가 마음 깊숙이 파고들지 못하는 이유다. 나와 대화하는 디지털 동영상이 지닌 진정한 비극은 모습을 볼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나, 끝내 두팔을 뻗어 끌어안을 수 없다는 사실임을 영화가 모르는 체하기 때문이다.
<프렌치 수프>는 우리 곁에 있지만 영화에 부재한 감각인 후각을 스크린 안에서 붙잡아보려 했고, <원더랜드>는 존재의 상실을 다루면서 우리 곁에 명백히 있는 감각인 촉각을 놓아버렸다. 이 두 영화를 묶어 바라보는 일에 유효한 의미가 있다면 영화만이 가진 수단과 화법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 한계는 어디까지인지를 말해볼 기회 정도가 될 것이다. 영화에 부재한 감각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에 대한 물음은 시청각 감각 이외의 신체를 자극하려는 스크린 바깥의 기술 영역이 아닌 스크린 안을 겨냥한다. 이에 대한 답은 멀티플렉스 영화 상영에 최적화된 과도한 음향의 영화가 관람자의 몸을 진동하게 만드는 햅틱 경험과 반대 지점에 있는 몰입의 영화 경험으로 향하게 만든다.
<원더랜드>는 바이리(탕웨이)가 죽음을 자각하기 시작하고 디지털 사막을 떠나려는 장면에서 아주 미약하게나마 영화적 생동을 전한다. 가상공간에 모래 폭풍이 몰아치는 장면은 그것이 블록버스터의 스펙터클을 연상시켜서가 아니라, 촉감과 무게가 없던 세계 안에서 자동차 앞 유리에 부딪히는 모래알로 이 영화가 내내 잊고 있던 물질과 그 무게를 드러내고 있어서다. 하지만 <원더랜드>가 정말로 혼동해버리고 만 것은 존재에서 느껴지던 촉감도, 무게도 사라졌으나 그 상실이 괴롭지 않은 픽션의 현실 세계를 그리면서 촉감과 무게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픽셀 이미지의 가상 세계가 관람자의 몸을 가공할 스펙터클과 사운드로 진동시킨다는 점에 있다.
환후(幻喉)를 그리며
<프렌치 수프>는 카메라와 움직임으로 시각 이외의 동시성을 성취하려 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보는 이에게 직접 냄새를 전하려는 가장 적극적인 시도는 스크린 밖의 영역에 있었다. 영화 <훈의초: 라벤더>는 스크린에 라벤더 꽃밭이 펼쳐질 때 객석에서 꽃향기를 맡을 수 있는 4D 상영을 선보였다. 지금 목격하는 것과 동시에 시각 이외의 체험을 경험하게 하려는 기술적 열망은 <프렌치 수프>의 화면 안에서 카메라의 보는 행위와 동작의 동시성으로 전환된다. 볶고, 굽고, 끓이고, 국물을 따라내고, 채소를 삶고, 향채를 버무리는 몸짓을 카메라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담는 동안에 그와 박자를 맞춘 배우들의 연기와 동선의 교차가 함께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도댕이 말한 “갖고 있는 것을 계속 열망하는” 태도는 스크린 밖으로 담아낼 수 없는 감각을 다루는 이 영화 스스로가 추구해온 답변으로 다가온다.
오감 만족의 체험으로 향하려는 영화기술의 욕망은 바라보는 것에 머무를 수 없었던 인간의 욕망에 빗대어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단지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면 왕자를 따라 뭍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한 인어 공주의 이야기는 없었을 것이고, 잠복근무 중에 망원경으로 대상을 멀리서 지켜보던 <헤어질 결심>의 해준(박해일)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서래(탕웨이)에게 성큼 다가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의 미래 상상도를 그려볼 때 앞을 볼 수 없는 공포는 흔히 언급되어도 최적의 영화 관람을 위해 마련된 영화관에서 원치 않는 햅틱 경험으로 인한 몰입의 와해는 말해지지 않는다. 객석에 앉은 신체를 자극하는 체험의 영화는 개인의 역사와 기억을 등에 업은 몰입의 반대편에 있다.
<프렌치 수프>에서 여섯명의 미식가는 멧새 요리를 두손으로 먹는 품위 없는 모습을 서로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하얀 냅킨을 머리에 커튼처럼 두른다. 그 장면에 담긴 것은 얼굴을 가린 채로 홀린 듯 각자의 세상 안에서 감탄하며 맛을 음미 중인 여섯명의 허기진 유령이다. 버터를 둘러 익힌 요리의 짭짤하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하얀 냅킨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코끝을 맴돌고 있을 것만도 같다. 기술적으로 과시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퇴보하지 않은 영화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려 할 때, 어떤 영화의 미래가 있을 자리는 바로 그곳임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