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보스톤>(이하 <보스톤>)은 역사적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거미집>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며,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하 <천박사>)은 웹툰을 각색했다. 추석 시즌에 개봉한 이 세편의 영화는, 지금의 한국영화가 스토리를 발굴하는 세 경향을 보여준다. 공교롭게도 세 영화의 흥행 스코어를 모두 합해도 300만명에 못 미친다(한주 늦게 개봉한 <30일>과 <크리에이터>를 합해도 400만명이 안된다). 그러니까 추석부터 이어진, 흥행에 꽤 유리한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들 영화는 관객을 유혹하지 못했다. 추석영화 모두가 손익분기점을 못 넘긴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는 했지만 그 결과가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지금의 이 흥행 스코어가 극장이나 한국영화의 미래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들 작품이 지금 한국영화계의 어떤 변화를 미약하게나마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복제된 배우, 캐릭터의 퇴마의식
<천박사>를 보면서 뜬금없이 <밀수>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두 작품 모두가 ‘외유내강’에서 제작한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밀수>에서 권 상사(조인성)가 벌이는 엄청난 격투 신. 류승완 영화 특유의 몸과 몸이 맞부딪히며 생성되는 쾌감이 한껏 담긴 그 장면에서, 권 상사가 춘자(김혜수)를 동업자로서 보호하는 것 이상의 감정이 담기기 시작할 때, 나는 그 이전 상황을 되새김질해야 했다. 권 상사와 춘자가 감정적으로 발전할 단서가 있었던가, 그것을 내가 놓쳤단 말인가, 하며 말이다. 어쨌든 권 상사의 시선이 춘자를 향하며, 나는 저 여인을 사랑해왔노라고 감정적 억지를 부리던 그 장면이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설득력을 가졌다면, 나는 그것이 전적으로 ‘조인성’이라는 배우 덕분이었다고 믿는 쪽이다. 때로 배우의 힘은 우리를 서사적 결함에 눈감게 하는 요술을 부린다. 이야기가 좀 샜지만 나는 <천박사>가 이와 유사한 전략을 펼친다는 생각을 했다.
<천박사>는 (캐릭터가 아니라) ‘배우’에 의존하는 작품이다. 원작 웹툰을 읽지 않았지만, 웹툰을 영화적으로 각색한 것이 아니라 ‘배우’에 맞춰 각색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천박사>는 철저하게 배우 강동원의 이미지를 복제하여 캐릭터 위에 덧입힐 뿐, 배우 강동원은 좀처럼 천 박사의 캐릭터로 스며들지 못한다. 천 박사를 연기하는 배우 강동원이 자신의 숙주를 지워버린다. 어쩌면 이러한 사태는 <기생충>에서 지하실 부부로 등장했던 두 배우(박명훈, 이정은)가 잔디가 넓게 펼쳐진 저택의 주인 부부로 등장했을 때부터 예고된다. 이들의 등장에 극장에서는 관객의 웃음이 터져나왔는데,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이 반응이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천박사>의 서사나 인물에서 비롯된 웃음이라기보다는 <기생충>의 인물을 복제한 결과다. 이들 부부가 <천박사>가 아닌 <보스톤>이나 <거미집>에 등장했다면 관객의 반응이 과연 달랐을까? 선녀무당을 연기한 박정민 역시 마찬가지다. 박정민은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맡았던 트랜스젠더 유이(박정민)의 연기 패턴을 반복한다. 나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박정민이라는 좋은 연기자를 소모적으로 활용함을 지적한 적이 있는데, <천박사>는 그 문제마저 그대로 답습한다. 이동휘 역시 드라마 <응답하라 1988>과 <아가씨> 등에서 보여준 예측 가능한 연기를 그대로 복제할 뿐이다.
물론 이를 좋게 이야기하면 적절한 캐스팅의 사례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우가 영화 속 인물을 압도하고 삭제하는 사태를 초래할 때, 우리의 시선은 복제된 배우에 머물 뿐이다. 배우에 가로막힌 관객의 시선은 인물에 닿지 못한다. 배우가 주는 재미는 있지만 인물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것은 상업용 광고이지 영화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천박사>의 사례를 두고 웹툰의 영화화가 아닌 웹툰의 배우화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웹툰에 배우의 몸을 입히는 영화, 그렇다면 웹툰의 배우화 시대에 연출이란 무엇인가? 지금, 감독은, 영화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
<1947 보스톤>, 바통을 놓친 이어달리기
스포츠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이 반드시 이겨야 하는 사연을 스포츠 경기 안에 어떻게 녹여내는가, 하는 것이다. 시합에 참가하는 선수든, 아니면 <머니볼>처럼 한 구단을 운영하는 단장이든 간에, 스포츠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기 자체보다 그 경기에서 이김으로써 성취하고자 하는 각자의 사연이다. <보스톤> 역시 뜀박질이라는 육체적 행위를 영화적 서사로 변환시키기 위해 ‘핍박받는 민족의 서사’를 그 속에 새기려 한다. 그러니까 서윤복(임시완)은 ‘핍박받는 민족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려야 한다.
영화의 구성만 놓고 본다면 <보스톤>은 마라톤보다는 ‘장거리 계주’에 더 가깝다. 손기정(하정우)과 남승룡(배성우)이 앞서 달린 뒤 보스턴대회에 임박해 서윤복에게 그 바통을 넘긴다. 한마디로 베를린올림픽의 아픔을 보스턴대회에서 극복하는 서사가 <보스톤>이다. 계주를 해본 사람은 바통을 주고받는 그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나 잘 알 것이다. 앞선 주자와 후발 주자의 호흡이 맞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다. 하지만 <보스톤>은 손기정(그리고 남승룡)과 서윤복의 서사간의 바통 터치가 매끄럽지 않다. 한편에는 손기정과 남승룡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어야 했던 역사적 서사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그 자리에 성조기를 달고 달려야 하는 서윤복의 서사가 있다. 얼핏 보면, ‘빼앗긴 태극기’라는 공통의 요소가 ‘핍박받는 민족’이라는 연속적 서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각 시대의 민족을 핍박하던 적대자가 같지 않다는 점이다. 관객을 손쉽고 간편하게 설득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적대자가 서윤복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구를 적대자의 자리에 위치시켜야 하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보스톤>은 역사적 사실(미군정은 서윤복의 보스턴대회 참가에 협조적이었다)을 윤색하면서까지 미군정을 그 자리에 앉힌다. 문제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일본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미군정의 시기를 그리려 할 때 핍박받는 민족의 서사가 휘청거린다는 점이다. <보스톤>은 서윤복의 서사(미군정) 대신 손기정의 서사에 더 집착하면서 이를 극복하려 한다. 즉, 이미 사라진 것을 기억하며 그 시대의 설움을 억지로 현재(미군정)에 이어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스톤>은 강제규를 닮은 영화다. 강제규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성공을 떠올렸겠지만, 이미 그 시대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그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정서를 반복한다. 그렇기에 <보스톤>은 이미 사라진 것을 붙잡으려는 허망한 시도에 머물고 말았다.
<거미집> 후반부에서 김열(송강호)은 플랑 세캉스로 영화의 엔딩을 만들겠다고 한다. 2류 감독 취급받던 김열에게 플랑 세캉스는 그 자체가 일종의 신분 상승, 달리 말해 자신이 꽤 대단한 예술적 감독임을 과시하는 하나의 징표였을 것이다. 나는 플랑 세캉스에 대한 김열의 욕망이, 어쩌면 앞으로 극장영화를 꿈꿀 감독들의 욕망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극장영화를 굳이 왜 하려고 그래?”라고 물으면, 그저 “나는 해야 할 것 같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시대. 허울 좋은 예술적 징표로서의 극장영화. 어쩌면 그 시대의 조짐이 벌써 시작됐는지도.
<거미집>, 우리는 정보를 감상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미집>은 참으로 웃기면서도 서글픈 영화다. 김열과 배우들이 죽을 고생을 해서 완성한 그 장면이 플랑 세캉스든 아니든 그것이 지금의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난 그 장면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미학적 시도가 무의미해진 지금의 이 시대에 대해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일본의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는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지금의 관객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OTT로 영상물을 보는 관객에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OTT와 극장 관객이 따로 있지 않다면 OTT로 영상을 관람하는 습관이 극장영화를 선택하거나 관람할 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이나다 도요시는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시대의 영화는 미학이 아니라 정보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정보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이는 영화의 어떤 장면이 플랑 세캉스로 찍혔든 몽타주로 잘게 이어 붙였든 간에 그저 모두 불타버렸다, 라는 말 한마디로 환원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의미다. 중요한 것은 불타버렸다는 정보이지, 그것을 어떻게 찍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걸작을 찍겠다는 김열의 집념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진 까닭은 <거미집>이 놓인 현재가 그것을 원하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2000년대 초반에 <거미집>이 개봉했다면, 더 좋은 평가와 흥행이 가능했을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가 정보가 아닌 감상이었던, 그리고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기꺼이 정보를 찾던 시대, 정보가 감상에 종속되었던 시대. 하지만 영화가 정보로 환원되는 시대의 <거미집>은 영화를 설명하거나 즐기기 위해서 너무 많은 정보를 찾아야 하는 ‘성가신 작품’에 불과하다.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대로 관객은 <거미집>을 외면했다. 평가가 나쁘진 않지만 <거미집>은 관객의 선택을 빗겨났다. <거미집>은 더 많이 알아야 재밌는 영화다. 1970년대 한국영화 배우의 연기 스타일을 알고, 한국 영화산업을 옥죄던 유신시대의 검열과 그 시대의 영화 제작 시스템에 대해 알면 더 재밌다. 신상옥과 김기영 감독에 대한 정보까지 더해진다면 더 말할 것이 없다. 하지만 몇 마디 말로 <거미집>의 잔재미를 그대로 설명하거나 전파하기는 불가능하다. 단순한 몇 마디의 글로 환원되지 않는 <거미집>의 재미는 SNS를 타고 영화의 매력이 설명되고 전파되는 시대와 어울리기 어렵다. 또한 <거미집>을 관람했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인스타그램과 X(옛 트위터), 페이스북에 몇 마디의 글을 남기기 위해 영화보다 더 많은 정보를 굳이 알고자 하는 관객을 기대하기도 힘든 시대다.
<거미집>은 영화 엔딩에 욕망의 거미줄에 사로잡힌 인물들을 비춘다. 지금 그 거미줄에 사로잡힌 채 죽어가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 욕망은 누구의 것일까? 시대가 낳은 실패 사례가 <거미집> 하나로 끝나기 바라지만, 영화 엔딩에서 마주한 김열의 표정에 영화의 미래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이번 추석영화가 극장의 미래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지나친 과장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사라진 것을 확인한 <보스톤>,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거미집>, 그리고 이미 눈앞에 당도한 시대를 보여주는 <천박사>. 부디 그것이 지금 이 시대의 이정표가 아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