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에 대한 숱한 오독(誤讀) 가운데 흔한 사례는 ‘감시와 처벌’과 관련한 그의 담론을 권력에 관한 크리틱으로만 읽는 것이다. 이같은 오해는 전공 연구자들에게서조차 종종 발견되다 2000년대 들어 그의 강의록과 에세이가 사후 출간되면서 차츰 바로잡혀가는 분위기다. 푸코는 사망 2년 전인 1982년 에세이 <주체와 권력>(The Subject and Power)에서 “지난 20년간 내 연구의 주된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라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 논지를 거칠게나마 정리하자면 파놉티콘 꼭대기에 감시 권력이 있으므로, 문제는 저 위의 권력이기도 하지만, 언제 어디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겠는 피감시자들이 스스로를 통제하고 규율하면서 ‘만들어지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감시하는 권력과 감시당하는 주체 중 어느 한쪽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세계의 실체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며,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또한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을 비롯해 <오징어 게임>(감독 황동혁, 2021), <더 에이트 쇼>(감독 한재림, 2024) 등은 초월적 존재가 플레이어들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감금 생존 게임’ 서사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 생존 투쟁에 내던져져 개인화한 인물의 욕망, 그것이 권력구조를 작동시키는 방식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제는 ‘만들어진 주체’에 대한 창작자들의 의식적·무의식적 감각이 대중 서사의 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재난 상황은 디폴트고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문제다. 우선 <전독시>를 출발시킨 게임 서사부터 짚어보자.
애초의 규칙
애초에 게임의 세계는 규칙을 전제로 한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죽거나 혹은 나빠진다. 이 세계와 계약한 이상 살아남아야 한다. 설계자는 ‘나’(이용자가 아니라 게임 속 자아)와는 다른 우주에 있는 존재다. 동의한 약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따지거나 어길 수 없다. 가면 쓴 실무진 (<오징어 게임>)이든 도깨비(<전독시>)든, 하수인들에게 항의해봐야 소용이 없다. 규칙을 바꾸겠다거나 멋대로 움직이는 행동은 상상 가능한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세계는 소멸한다. 플레이어 숫자만큼의 세계를 가진 저 멀티버스는 계약 주체들의 성실한 이행에 의해 구성되는 복잡계다. 거대한 세계 속 작은 개인들은, 어쩌면 지금의 우리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생존 게임의 규칙을 바꾸겠다는 상상은 애초부터 하지 못한 채 살아남느라 바쁘다. 현실로 나와보자. 현재 아동을 포함한 성장기 한국인, 그 성장기를 거친 일부 성인들에게 내면화한 공정 담론, 능력에 대한 보상, 규칙에 순응한 데 따른 성과주의 같은 가치관 형성에 있어 게임이 미친 영향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얘기하고 있든 그 이상이다(2024년 말 현재 모바일게임 시장 규모는 1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세계는 점점 게임의 규칙을 불가역적인 것으로 내면화하는 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저 그린존만 없었으면 모두가 맞서 싸웠을 거야!” 살육의 의자뺏기 놀이를 강요당하던 김독자(안효섭)는 게임의 ‘밖’을 상상한다. 이 대사에서 맞서 싸우자는 말보다 중요한 단어는 ‘애초’다. 원래 그랬던 건 없다. <전독시>는 게임 속으로 들어가서는 게임 세계의 정언명령을 거부한다. 감히 규칙 너머를 상상한다. 지금껏 김병우 감독의 인물들은 이러지 않았다. 자기가 살기 위해 살았다. 게임의 세계관이다. <더 테러 라이브>(2013)에서 방송사 앵커 윤영화(하정우), 보도국장, 경찰 간부들에게 시민의 생명보다 중요한 건 자신의 출세와 입지였다. 게임의 논리 밖으로 나간 주인공이 맞이한 결말은 죽음이었다. <PMC: 더 벙커>(2018)에서 용병 에이헵(하정우)과 팀원들, CIA가 쫓는 것은 남과 북의 평화나 승패가 아니라 자신의 성과와 보상이었다. 게임 플레이어로서 그들에겐 지정된 미션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디자인한 게임 인터페이스는, 정해진 룰 안에서 아이템과 다음 에피소드, 생존을 득하기 위한 세계관 그 자체였다. <PMC: 더 벙커>는 결말부에 이르러 두 주인공이 어깨 겯고 어디론가 향하는 장면을 통해 게임의 밖을 어렴풋하게나마 암시 한다.
본 자와 보지 못한 자
<전독시>의 김독자는 출발부터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는 처음부터 ‘아는’ 존재다. <매트릭스>의 네오(키아누 리브스)는 빨간약을 먹은 뒤 세계의 실체를 봤고, <오징어 게임> 시즌2·3의 기훈(이정재)은 시즌1을 겪으며 게임의 정체를 봤다. 김독자는 극 중 웹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의 1화부터 최종화까지를 유리 상자에 든 개미집 보듯 속속들이 봤다. 게임 내부 캐릭터인 유중혁(이민호)은 <더 테러 라이브>나 <PMC: 더 벙커>의 주인공들과 다름없는 존재다. 여기서 연상되는, 초월적 힘에 의해 인물들이 다짜고짜 게임 속에 갇히는 작품을 되짚어보자. <오징어 게임> 이전부터 <큐브>(감독 빈센조 나탈리, 1999)에서 <더 플랫폼>(감독 갈데르 가스텔루 우루티아, 2019)에 이르는 ‘감금 생존 게임’ 서사들은 자본주의를 서바이벌 제로섬게임에 빗대왔다. <더 에이트 쇼> 는 이 경향의 다소 늦은 종합판으로 볼 수 있다. 저 너머의 설계자를 건드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오징어 게임> 시즌3가 보여준 기훈의 최후는, 무슨 수를 써도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달은 ‘아는 자’의 절박한 선택이었다. 시즌2와 3가 시즌1에서보다 강조한 것은 마치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는 참가자-주체들의 합의와 선택이다. 이 기류는 <더 에이트 쇼>에서 한층 더 강렬하다. 참가자들은 설계-감시자들의 눈에 들기 위해 잔혹 쇼를 자처한다(이와 관련해서는 마크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개념을 가져온 안시환 평론가의 <더 에이트 쇼> 비평-<씨네21> 1464호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우울한 초상’을 참고하길 권한다).
<전독시> 역시 유튜브 스트리밍과도 같은 성좌들의 관전을 뼈대 삼는데 주요 인물들은 살아남으려 애쓰면서도 이 틀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들은 각자도생이라는 시나리오 계약을 거부한 채 팀을 이룬다. 여기서 눈에 띄는 설정이 영화가 강조하는 ‘환영감옥’이다. 환영감옥에 갇히는 인물들의 예외 없는 고통은, 옆 사람이 죽고 혼자 살아남은 데 대한 죄책감에서 나온다. 참사가 있었을 때 우리에게도 찾아온 그 감정. 김독자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환영감옥을 택한다. 갇힘으로써 박차고 나간다. 고통스러운 자기 응시만이 승자독식의 살육 게임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이지혜(지수)만 살고 다른 친구들은 모두 쓰러져 있는 교실의 부감 이미지는, 지금 기성세대가 우리의 딸, 아들들을 어떻게 키우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도 읽힌다. 2010년대 이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다룬 수많은 작품이 잇따른 현재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혼자 살아남으려다 어떻게 됐는지” 우리가 이미 ‘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의 논란, 즉 <전독시>에 대해 적잖이 쏟아지는 부정 평가는 단순히 원작 재현에 대한 실망일지 아니면 주제 의식을 주입하는 데 동의하지 못한다는 것일지에 대해 좀더 많은 이야기를 꺼내놓을 필요가 있다. 넷플릭스에서만 찾아 열거해도 지면이 모자랄 만큼 쏟아져나온 생존투쟁-능력주의 서사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뒤쫓는 것과 잘하는 것
끝으로 이 영화의 VFX에 대해 언급하고 마무리하려 한다. 이제 한국영화는 그린스크린 앞에서 촬영하고 배경을 합성하는 정도의 단계는 일정 수준을 넘어섰다. <전독시>는 CGI 괴수가 사람 배우를 물어뜯고 가상의 빌런이 뿜어낸 화염이 인물을 타격하는 장면들이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영화다. 실재 뒤의 병풍 정도가 아니라, CGI가 배우의 살과 만나고 피가 섞인다. 이질적인 것이 한곳에서 만날 때의 관건은 접점이다. 격투 액션은 타점이 정확해야 하고 CGI 액션은 접점이 명확해야 한다. 매만지고 또 매만지고 다음날 다시 만지면 조금씩 매끄러워지는 것들이다. 제작비(인건비) 상승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한국 관객들이 이미 마블 스튜디오의 작품들에서 외계 괴물과 사람 영웅과 신화 속 인물들이 백주대로에서 치고받는 VFX 품질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다. <전독시>와 같은 저조도 환경에서 적당히 얼버무린 ‘접점’들에 만족하기가 쉽지 않다. 300억원이 들어갔다. 미국영화가 잘하는 게 있고 프랑스, 독일, 일본 영화가 잘하는 게 따로 있다. 관객이 이걸 모를 리 없으므로 한국영화가 우주 배경 SF를 200억원, 300억원 들여 만들어도 관심 갖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국영화도 잘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예컨대 <에이리언>(감독 리들리 스콧, 1979)에서 괴수가 주인공의 뺨 앞으로 스멀스멀 다가오는 장면이 만들어낸 우리 손아귀의 땀은, VFX 기술이 대단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 장면을 예로 든 이유는 한국의 많은 감독들이 VFX 제작 환경으로 넘어갈 때 완급·긴장·이완을 조절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잃고 있다는 추측이 들어서다. 제작비만 있으면 어떤 상상이든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이 도리어 실사 촬영에서의 통제력을 놓치게 만들 때가 있다. 한국영화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은 분명히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라면 환영감옥이라도 선택한다는 심정으로 고민할 지점이다.